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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Report

AI 시대, 럭셔리 희소성의 재설계 방안

박찬재,정리=김윤진 | 451호 (2026년 10월 Issue 2)
브랜드 정보·정책의 전파는 AI로 넓히고
최상위 고객과의 관계는 사람이 맡아야
Article at a Glance

AI는 고객 정보를 기억하고 개인화하는 비용을 낮춘다. 그 결과 ‘브랜드가 나를 기억한다’는 사실 자체는 더 이상 희소한 인정의 증거가 되기 어렵다. 럭셔리의 가치는 정보 저장이나 기본 추천이 아니라 담당자의 시간, 현장의 재량, 희소 상품과 접근권처럼 한정된 자원을 누구에게 배분하는가에 남는다. 따라서 브랜드는 AI가 절약한 시간을 단순히 처리량 확대에만 쓰지 말고, 어떤 고객 관계에 다시 투자할지 전략적으로 정해야 한다. 동시에 AI는 고객이 브랜드를 경험하기 전 후보군을 좁히는 새로운 관문이 된다. 브랜드는 제품 정보·정품·이력·정책을 외부에서 검증 가능한 형태로 정리해 AI에 정확히 읽혀야 하지만 그것만으로 선택되지는 않는다. AI 관문을 통과한 뒤의 선택은 여전히 사람, 매장, 서비스, 관계의 경험에서 이뤄진다. 결국 럭셔리의 과제는 ‘기억과 사실 확인’은 넓히되 ‘인정과 관계’는 누구에게 남길지 분명히 구분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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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백화점의 최상위 등급 ‘트리니티’에 들어가려면 얼마를 써야 할까. 중요한 건 금액이 아니다. 그해 구매액 순위에서 999위 안에 들어야 한다. 즉 ‘절대 평가’가 아닌 ‘상대 평가’를 통해 자격이 결정되는 셈이다.1 롯데백화점의 에비뉴엘 블랙에 들어가기 위한 기준도 2026년부터 ‘매출 최상위 777명’으로 기준이 명문화됐다.2 현대백화점은 금액 기준으로 선정하던 ‘쟈스민 블랙’ 등급 위에 사내 기준으로 선정하는 최상위 등급을 신설했다.3

VIP 관리의 기준이 ‘금액’에서 ‘인원’으로 옮겨가고 있다. 가격 인상 등으로 최상위 등급 고객이 늘어나면 VIP의 희소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에 백화점들은 일정한 정원을 두고 최상위 고객 수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반면 고객 응대에서는 정반대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백화점들은 AI를 활용해 더 많은 고객의 취향과 구매 이력을 파악하고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한다. 시스템만 갖추면 고객 한 명을 더 기억하는 데 드는 비용은 크지 않다.

두 전략은 각각 합리적이지만 나란히 놓으면 흥미로운 질문이 생긴다. 백화점은 ‘몇 명에게 VIP 자격을 줄 것인가’는 엄격하게 관리하면서도 ‘몇 명의 고객을 기억할 것인가’에는 제한을 두지 않는다. 그동안 “우리는 당신을 기억합니다”라는 경험은 럭셔리의 중요한 차별점이었다. 판매 담당자(SA)는 고객이 무엇을 샀는지뿐 아니라 선호하는 색과 스타일, 어떤 목적으로 제품을 구매했는지까지 기억했다. 그런데 AI의 등장으로 이 ‘기억’의 희소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기억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값비싼 기억이 만들어지는 자리가 옮겨갈 뿐이다. 그런데 그 이동은 브랜드 안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고객이 브랜드를 만나기 전 어떤 브랜드를 검토할지 정해지는 단계에서도 함께 일어나고 있다.


기억은 왜 특별 대우의 증거였나

사람은 구하기 어려운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단지 희소한 것을 좋아해서만은 아니다. 희소성이 품질과 사회적 인정, 오래 남을 가치를 짐작하게 해주는 단서이기 때문이다. 럭셔리 브랜드 관리에서도 세일즈 담당자가 나를 기억한다는 것은 브랜드가 나에게 한정된 관심을 배분했다는 단서로 작동했다.

그리고 이 기억에는 사람의 시간이 필요했다. 소비자가 지난 시즌에 무엇을 골랐는지, 어떤 색을 싫어했는지 기억하려면 그 고객에게 시간과 주의를 쏟아야 했다. 그래서 모든 고객을 같은 깊이로 기억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브랜드는 ‘선택’해야 했고, 기억은 그 선택의 결과였다.

기억을 돕는 도구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고객수첩에서 고객관계관리 시스템으로, 다시 태블릿의 클라이엔텔링 앱으로 변화를 거듭했다. 하지만 이 도구들은 기억을 저장하고 꺼내는 일은 도와줘도 누구에게 연락할지 정하는 데 드는 시간까지 줄여주지는 못했다. 화면에 뜬 고객이 200명이어도 누구에게 전화를 걸고, 무슨 말을 할지 판단하는 데는 여전히 담당자의 시간이 필요했다. AI 시대에 달라지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무엇을 제안할지 판단하고 연락 초안을 작성하는 일까지 시스템이 맡게 되면 판매 담당자 한 명이 관리할 수 있는 고객 수의 상한도 올라간다. 기억을 돕는 도구의 단계와 판단·실행까지 대신하는 단계는 엄연히 다르다.

기술은 희소성을 없애기보다 희소한 것의 대상을 바꿔왔다. AI도 마찬가지다. AI 덕분에 브랜드는 더 많은 고객을 기억하고 개인화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됐지만 고객이 특별한 대우를 받기 위해 쌓아야 하는 구매 이력과 관계를 맺는 시간까지 줄어든 것은 아니다. 결국 AI가 낮춘 것은 ‘기억의 비용’이지 ‘인정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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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기억과 인정을 분리한다

AI가 누구나 기억하고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면 럭셔리의 희소성은 다른 곳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브랜드가 ‘나를 얼마나 잘 기억하는가’가 아니라 ‘한정된 자원 중 무엇을 나를 위해 내어주는가’다. 이를 이해하려면 ‘기억’과 ‘개인화’ ‘인정’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기억(memory)은 고객의 이름과 사이즈, 구매 이력, 취향, 기념일 등을 저장해 다음 만남에 활용하는 것이다. 고객은 같은 설명을 반복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을 얻는다.

개인화(personalization)는 이 정보를 바탕으로 고객에게 더 잘 맞는 선택지를 제안하는 것이다. 피부 상태에 맞는 화장품을 추천하거나 과거 구매 이력을 토대로 적절한 사이즈를 골라주는 식이다. 고객이 얻는 것은 편리함과 ‘나에게 잘 맞는다’는 경험이다.

인정(recognition)은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고객을 잘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수량이 한정된 무언가를 그 고객을 위해 배분하는 것이다. 전담 직원의 시간, 희소한 제품, 장인이나 전문가의 작업 기간, 한정된 좌석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때 고객이 느끼는 것은 단순한 편리함이 아니다. ‘브랜드가 한정된 자원 중 일부를 나를 위해 내어줬다’는 특별함이다.

앞의 두 가지는 한 명의 고객이 더 늘어나도 다른 고객의 몫을 빼앗지 않는다. 하지만 세 번째는 다르다. 누군가에게 더 준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에게는 덜 준다는 뜻이다. 개인화와 인정은 처음에는 비슷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고객은 둘을 구분한다. 브랜드가 나를 알고 맞춰주는 것과 나를 위해 한정된 자원을 배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전자는 이제 대부분의 브랜드가 할 수 있다. 하지만 후자는 여전히 선택의 문제로 남아 있다. AI는 고객을 더 많이 기억하도록 돕지만 누구에게 더 많은 인간적 재량을 쓸지는 결정하지 못한다.

이런 ‘인정’은 규정과 매뉴얼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지난 상담의 맥락을 이어가고 오랜 관계를 고려해 문제 해결에 더 힘을 쓰거나 한정된 장인의 시간을 배정하는 것처럼 누군가가 자신의 시간과 재량을 특정 고객에게 쓰는 데서 나온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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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고객 이력을 찾고 반복 문의에 답하며 일정을 조율해주면 담당자의 시간이 남는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어디에 쓸 것인가다. 자동화의 성과를 응답 속도나 처리량, 담당자 1인당 고객 수로만 평가하면 절약한 시간은 더 많은 고객을 관리하는 데 쓰이기 쉽다. 물론 효율화 자체도 중요하다. 다만 AI가 아낀 시간을 효율에 얼마나 쓰고, 가치가 높은 고객과의 관계에 얼마나 다시 투자할지는 전략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측정하기 쉬운 지표만이 우선되기 때문이다.

LVMH의 선택은 참고할 만하다. 2021년 구글 클라우드와 손잡고 수요 예측과 재고 최적화, 개인화 등에 AI를 도입하면서도 “AI를 이용해 각 브랜드의 인재를 지원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그룹 매니징 디렉터 토니 벨로니는 “우리에게 프라이버시와 개인화, 럭셔리는 동의어”라고 말했다. 기술은 적극 활용하되 고객과 만나는 마지막 접점에는 사람의 역할을 남겨두겠다는 접근이다.5

에르메스는 AI를 활용하되 명확한 경계선을 그었다. 2025년 AI 거버넌스 위원회를 설치해 기술의 정확성과 윤리뿐 아니라 지식재산권과 창작의 진정성, AI 시대에 창작의 주체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까지 논의하고 있다. AI 활용도 IT와 데이터 관리, 공급망·물류, 매장 운영 지원, 내부 보고 등으로 제한했다. 반면 고객 응대나 자사 웹사이트에는 AI를 도입하지 않고 창작과 공예는 사람이 주도한다는 원칙을 세웠다.6 최근 웹사이트 개편에서도 생성형 AI 이미지 대신 일러스트레이터가 직접 그린 그림을 사용했다.

두 브랜드가 그은 경계선의 위치는 다르다. LVMH는 AI를 폭넓게 활용하되 고객과 만나는 마지막 접점에는 사람을 남겼고, 에르메스는 AI가 들어갈 수 있는 영역 자체를 제한했다. 하지만 공통점은 분명하다. AI를 어디까지 활용하고, 어디서 멈출지를 의식적으로 정했다는 점이다. 특히 에르메스가 이를 위원회 차원의 관리 대상으로 삼은 것은 효율성만을 좇다 보면 AI의 영역이 계속 넓어질 수 있다고 보고 그 경계를 지속적으로 점검하겠다는 의미다.

자신의 정체성이나 개성을 드러내는 소비에서는 기계보다 사람이 만든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아르민 그라눌로, 크리스토프 푹스, 스테파노 푼토니의 2021년 연구에 따르면 소비자는 로봇의 노동에서는 ‘균일함’을, 사람의 노동에서는 ‘고유함’을 더 강하게 느낀다.7 럭셔리 역시 자신을 표현하는 상징적 소비의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이 영역에서 사람의 역할을 줄이면 단순히 비용만 절감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사람이 직접 만들고 서비스한다’는 특별함까지 약해질 수 있다.

또 고가 제품을 살 때 소비자는 가장 좋은 제품을 고르는 것만큼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럭셔리 브랜드는 오랫동안 품질과 가치를 검증하고 보증함으로써 이런 불안을 줄여주는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AI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제품을 비교하고 정보를 검증해 선택지를 좁히는 일은 AI가 잘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제 소비자는 브랜드를 만나기도 전에 AI에 “이 가격을 지불할 가치가 있는가”를 먼저 물을 수 있다. 그만큼 럭셔리 브랜드는 제품을 선별하고 보증하는 역할을 넘어 AI가 대신하기 어려운 가치를 제공해야 한다.


고객만 브랜드를 읽는 것이 아니다

“십 년 뒤에도 가치가 유지될 시계는 뭘까.” 예전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으면 갈 곳이 뻔했다. 시계에 관심이 많은 지인, 언론 기사, 매장의 담당자, 온라인 커뮤니티 등 몇 개 경로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 정보들은 브랜드가 직접 공개한 자료를 통해 만들어졌다. 이에 따라 브랜드는 자사에 대한 정보가 어떻게 보일지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같은 질문을 수없이 많은 AI에 할 수 있고, 그 답을 하는 쪽도 브랜드가 준비해둔 이야기를 그대로 읊지 않는다.

AI는 브랜드 안에서 기억과 인정을, 브랜드 밖에서는 발견과 경험을 떼어 놓는다. 과거에 고객은 검색을 하고 기사를 읽고 매장을 돌아보며 후보군을 몇 개로 추렸다. 이 과정 자체가 이미 브랜드 경험의 일부였다. 그러나 이제는 고객이 AI에 요구 사항을 설명하고, AI가 조건에 맞는 브랜드를 압축한 뒤 고객은 그 목록에 올라온 브랜드를 살펴본다. 브랜드가 준비한 경험은 목록에 오른 다음부터 작동한다. AI가 경험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매장의 공기와 담당자의 응대, 제품을 손에 들었을 때의 감각은 여전히 브랜드의 몫이다. 달라지는 것은 어떤 경험이 검토 대상이 될지를 AI가 중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고가 제품을 잘못 선택할 위험을 줄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브랜드의 명성을 믿거나 소비자가 직접 제품을 비교하고 따져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럭셔리 시장에서는 전자가 우세했다. 소재와 제조 방식, 수리 정책, 중고 가격까지 일일이 확인하기보다 오랫동안 쌓인 브랜드의 명성을 믿는 편이 합리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AI는 직접 따져보는 데 드는 수고를 크게 줄여준다. 그동안 브랜드의 이름이 대신해주던 판단의 일부를 AI가 맡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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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마르 시몬슨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와엠마누엘 로젠 작가는 2014년 발간된 저서 『절대 가치』에서 기술의 발달로 소비자가 제품을 직접 비교하기 쉬워지면서 브랜드가 제공하던 일방적인 신호에 덜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금은 그 비교와 판단을 소비자 대신 AI가 수행한다는 점에서 당시의 예상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갔다.

물론 1억 원짜리 시계를 AI의 추천만으로 바로 결제하는 고객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고가의 럭셔리 구매에는 여전히 매장 방문과 상담,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하지만 결제보다 먼저 이뤄지는 ‘후보군 선정’은 다르다. 고객이 매장에 들어서기 전에 AI를 통해 세 개의 브랜드로 후보를 좁혔다면 그 안에 들지 못한 브랜드는 고객을 설득할 기회조차 얻기 어렵다. AI의 영향은 최종 구매보다 ‘구매 고려 대상에 포함되는가’에서 먼저 나타나는 셈이다.

이런 변화가 가장 빠르게 나타나는 럭셔리 카테고리가 뷰티 산업이다. 개인 럭셔리 소비재의 온라인 판매 비중은 2025년 약 21%인 반면 뷰티의 전자상거래 비중은 이미 26~28%에 이르며 2030년에는 30%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8 상대적으로 가격이 낮고 구매 주기가 짧은 뷰티 산업에서는 AI를 통한 후보군 선정과 실제 구매가 같은 화면에서 이어질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

하이 주얼리나 오트 쿠튀르처럼 관계를 기반으로 판매되는 최상위 럭셔리에는 이런 변화가 제한적일 수 있다. 이미 브랜드와 관계를 맺고 전담 어드바이저가 있는 고객이라면 AI를 통해 구매 후보를 다시 고를 필요가 적다. 하지만 신규 고객은 다르다. 처음 브랜드를 접하고 비교하는 단계에서는 AI가 후보군을 만드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오늘의 최상위 고객 역시 처음에는 브랜드를 새롭게 발견한 뒤 구매 가치가 있을지 신중하게 검토하는 고객이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한 소비자가 럭셔리 브랜드를 처음 만나는 곳은 대개 최상위 제품이 아니다. 향수와 뷰티, 작은 가죽 제품, 호텔 숙박처럼 상대적으로 접근하기 쉬운 제품과 경험이 브랜드의 첫 관문이 된다. 공교롭게도 이 영역은 온라인 구매 비중이 높아 AI 추천의 영향도 먼저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 첫 경험은 이후 더 높은 가격대의 제품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중요한 질문은 “우리의 최상위 제품이 AI의 추천에 오르는가”가 아니다. “고객이 우리 브랜드를 처음 만나는 관문은 어디이며, 그곳에서 우리 브랜드가 제대로 발견되고 있는가”다. 최상위 제품이 검색될 필요가 없는 브랜드일수록 오히려 첫 관문에서 AI에 발견되지 않는 위험을 간과하기 쉽다.

그렇다면 AI가 쉽게 발견하고 이해할 수 있는 브랜드가 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읽히는 것과 선택되는 것은 다르다

앞서 에르메스가 웹사이트에 생성형 AI 대신 일러스트레이터의 손 그림을 사용했다고 했다. 몇 초면 만들 수 있는 이미지를 사람의 손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했다는 사실 자체가 브랜드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보여준다. 고객은 이런 노력과 배려를 경험을 통해 느낀다. 담당자가 지난 시즌의 대화를 기억하고 이어가는 순간에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자신이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음을 알아챈다.

하지만 AI가 브랜드를 판단하는 방식은 다르다. AI는 구조화된 제품 정보와 명시된 정책, 제품의 출처와 이력, 외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정보처럼 기록되고 검증할 수 있는 근거를 중심으로 브랜드를 이해한다. 브랜드가 아무리 많은 노력과 배려를 기울였더라도 이 과정이 정보로 드러나지 않으면 AI는 그 의미를 충분히 파악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사람에게는 감추고 AI에는 모두 공개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사람 역시 가격의 근거와 소재의 출처, 정품 여부 같은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차이는 그다음에 있다. 사람은 객관적인 사실만으로 브랜드를 선택하지 않는다. 정보가 비슷해도 자신에게 얼마나 시간과 관심을 쏟았는지, 어떤 특별한 경험과 기회를 제공했는지가 최종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결국 브랜드는 두 가지 신뢰를 동시에 만들어야 한다. 사람에게는 ‘나를 특별하게 알아보고 대우한다’는 인정(recognition)을 제공하는 한편 AI에는 브랜드의 주장과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야 한다. 후자를 ‘검증 가능한 신뢰’라고 부를 수 있다. AI가 소비자를 대신해 브랜드를 찾고 후보군을 좁히는 시대에는 이 두 가지가 함께 갖춰져야 한다.

검증 가능한 신뢰는 확장해도 손실이 없다. 정품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만드는 일은 한 고객에게 해준다고 다른 고객에게는 못 해주는 종류의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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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역에서 눈에 띄는 것은 개별 브랜드의 대응이 아니라 산업의 움직임이다. 2021년 LVMH와 프라다 그룹, 카르티에가 설립한 아우라 블록체인 컨소시엄에는 이후 여러 그룹과 브랜드가 합류해 50개 이상이 참여하고 있으며 등록된 제품 수는 8000만 개를 넘는다.9 서로 경쟁하는 브랜드들끼리 같은 기반을 쓰기로 했다는 것은 이 일이 차별화 수단이 아니라 산업의 기본 조건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규제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유럽연합은 제품의 소재와 이력, 환경 관련 정보를 디지털로 공개하도록 요구하는 제도를 단계적으로 도입하고 있다.10

브랜드의 정보를 AI가 확인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하는 일은 이제 필수가 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를 단순한 규제 대응이 아니라 브랜드 자산으로 만드는 것이다. 제품의 소재와 제작 과정, 수리 이력 등이 기록되고 외부에서도 확인된다면 그 정보는 제품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뒤에도 남는다. 고객과 브랜드의 관계는 이전할 수 없지만 제품의 이력과 관리 기록은 다음 소유자에게 이어질 수 있다. 다만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것’과 ‘접근을 개방하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가죽의 원산지나 제품 이력, 수리 정책을 투명하게 공개한다고 해서 희소한 제품을 누구에게 먼저 판매할지까지 공개할 필요는 없다. 사실은 있는 그대로 보여주되 제품과 경험에 대한 접근은 선택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 전자는 신뢰의 문제이고 후자는 희소성의 문제다.

그렇다면 AI에 잘 읽히는 브랜드가 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그렇지 않다. AI의 역할은 최종 승자를 결정하는 것이 아닌 소비자가 검토할 후보를 추리는 데 가깝다. 이 첫 관문에서 제외되면 아무리 훌륭한 매장과 서비스, 장인과 전담 어드바이저를 갖추고 있어도 이를 보여줄 기회조차 얻기 어렵다. 반대로 후보에 오른 뒤에는 제품과 서비스, 경험과 인간적 관계를 둘러싼 기존의 경쟁이 다시 시작된다. 결국 AI는 럭셔리 산업 내 경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경쟁할 기회를 얻는 브랜드’를 먼저 가려내는 새로운 관문이 되고 있다.

1. 후보군이 좁아지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기존 검색과 소셜미디어도 브랜드를 선별해 보여줬다. 하지만 검색 결과 열 번째에 있는 브랜드는 스크롤을 내리면 발견할 수 있는 반면 AI의 답변에 포함되지 않은 브랜드는 아예 소비자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다. 반대로 AI가 추린 후보에 들어가면 그다음부터는 더 깊은 검토가 시작된다. 이때 고객이 확인하는 것은 데이터만이 아니다. 매장에서 어떤 경험을 하는지, 담당자가 어떻게 응대하는지, 브랜드가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중요해진다. AI가 후보군을 좁힐수록 오히려 그 이후의 경험과 관계가 갖는 비중은 커지는 것이다.

오랜 시간 브랜드 자산을 쌓아온 럭셔리 브랜드라면 AI의 첫 관문을 통과한 뒤 축적된 경험과 관계 자산이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반면 빠르게 성장하는 브랜드는 AI의 추천 목록에 오르더라도 이후의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최종 선택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결국 AI에 선택되는 것은 출발점이지 승부의 끝이 아니다.

소비자 연구도 이런 구조를 뒷받침한다. 키아라 롱고니와 루카 치안의 2022년 연구에 따르면 소비자는 기능과 성능이 중요한 제품에서는 AI의 추천을 상대적으로 잘 받아들이지만 감각과 취향이 중요한 제품에서는 거리를 두는 경향을 보였다.11 다만 AI가 사람을 대신해 결론을 내리기보다 판단을 돕는 역할을 할 때는 이런 거부감이 줄었다. 감각과 취향이 중요한 럭셔리 시장에서 ‘AI가 후보를 좁히고 사람이 선택을 완성하는’ 구조가 설득력을 갖는 이유다.

2. 자원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AI 관문에 대응하려면 새로운 투자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기존 고객 경험에 대한 투자를 줄이기도 어렵다. 문제는 한정된 자원을 모든 영역에 조금씩 나눠 쓰다 보면 어느 곳에서도 뚜렷한 경쟁력을 만들기 어렵다는 점이다.

럭셔리 브랜드 역시 AI 대응과 고객 경험 가운데 무엇을 강화할지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반드시 전체 예산을 크게 늘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AI가 브랜드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제품과 정책 정보를 정리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데는 비용이 들지만 고객 수가 늘어난다고 그 비용이 같은 비율로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AI와 자동화로 이미 절약되는 시간과 비용이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예산을 얼마나 더 쓰느냐보다 AI로 확보한 자원을 어디에 다시 투자할 것인가다.

3. 무엇을 확장하고, 무엇을 희소하게 남길 것인가

대부분의 브랜드는 향수와 하이 주얼리를 함께 팔고, 브랜드를 처음 접하는 신규 고객과 십 년 된 단골 고객을 함께 상대한다. 카테고리마다 다르고 고객 단계마다 다른 것을 하나의 노선으로 정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AI를 쓸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 AI에 맡기고, 어디부터 사람의 영역으로 남겨둘지를 정하는 것이다.

앞의 두 영역은 넓힐수록 좋다. 브랜드 정보를 정확하게 정리하고 외부에서도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만들면 더 많은 고객과 AI가 브랜드를 발견하고 신뢰할 수 있다. 반면 희소한 제품이나 사람의 시간처럼 한정된 자원은 누구에게 배분할 것인지 자체가 전략이다. 그렇다면 이를 실제 운영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세 가지 질문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읽히는가’. 제품의 특성과 소재, 가격, 수리 정책 등 브랜드의 핵심 정보가 AI가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는 형태로 정리돼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12 채널마다 서로 다른 정보가 제공되고 있지는 않은지도 점검해야 한다.

둘째, ‘확인되는가’. 브랜드가 주장하는 내용을 외부에서도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AI가 어떤 질문에서 우리 브랜드를 추천하고, 어떤 경쟁 브랜드와 함께 비교하는지는 내부 데이터만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따라서 소비자와 AI의 시선에서 브랜드가 외부에서 어떻게 보이는지 지속적으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

셋째, ‘어디까지 맡길 것인가’. AI가 제품을 조회하고 예약하는 것까지 허용할지, 구매와 희소 제품의 배정까지 맡길지는 별개의 문제다.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모두 개방할 필요는 없다. 어디까지 AI에 맡기고, 어디부터 사람과 고객의 관계 안에 남겨둘지를 정해야 한다.

앞의 두 단계가 AI와 고객에게 ‘발견되고 신뢰받기 위한 조건’이라면 세 번째는 ‘무엇을 인간의 관계 안에 남길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다. 이 세 단계를 갖춘다고 고객의 선택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선택받을 기회를 얻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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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넓히지 않을 것인가

기억은 과거보다 값싸졌다. AI가 줄이는 것은 고객을 기억하기 위한 총투자가 아니라 고객 한 명을 더 기억하고 맞춤형 제안을 하는 데 드는 추가 비용이다. 기억의 가치는 여전하지만 이제 기억만으로 특별한 대우를 증명하기는 어려워졌다.

반면 인정은 여전히 값비싸다. 특별함은 고객 정보를 얼마나 많이 아느냐보다 한정된 자원을 누구에게 배분하느냐에서 나온다. 사람의 시간과 재량, 희소한 제품, 오래 이어진 관계는 AI로 무한히 늘릴 수 없다.

또 하나의 변화는 브랜드를 읽는 주체가 하나 늘었다는 점이다. 이제 고객이 브랜드를 만나기 전에 AI가 먼저 후보군을 추릴 수 있다. AI가 최종 선택을 결정하지는 않지만 어떤 브랜드가 검토 대상에 포함될지는 영향을 줄 수 있다. 따라서 브랜드는 AI가 잘하는 기억과 사실 확인은 넓히되 한정된 시간과 재량은 누구에게 쓸지 선택해야 한다. 이 변화는 경영진에게 세 가지 선택을 요구한다.

먼저 시간의 재배분이다. AI가 아껴준 시간을 어디에 다시 투자할 것인가. 판매 담당자의 문의 응대와 고객 정보 정리에 쓰이던 시간이 줄었다면 이를 더 많은 고객을 관리하는 데 사용할 것인지, 핵심 고객과의 상담과 관계 관리에 재투자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미 일부 브랜드에서는 AI를 활용해 고객 이력을 요약하거나 메시지 초안 작성과 같은 업무를 지원하고 있다. 고객 이력을 파악하거나 응대를 준비하는 시간을 줄여주는 보조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것은 AI가 SA를 대신하는가가 아니라 SA가 고객 관계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얼마나 많은 시간과 주의를 확보해주는가에 있다.

다음은 공개 범위의 결정이다. 제품의 소재와 원산지, 정품 여부, 수리 이력, 공식 정책은 고객과 AI 모두가 확인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반면 희소 제품의 배정 기준과 최상위 고객을 위한 특별 서비스까지 모두 공개할 필요는 없다. 전자는 신뢰를 넓히는 일이고 후자는 희소성을 관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권한의 경계 설정이다. 정보 조회와 추천, 예약은 AI가 지원할 수 있지만 고가 구매에 대한 최종 상담, 예외 상황의 해결, 희소한 재고와 접근권의 배분은 여전히 사람의 판단이 필요한 영역이다. 중요한 것은 AI를 사용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디까지를 AI의 영역으로 보고, 어디서부터를 사람의 영역으로 남겨둘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기술이 희소성을 없애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이 정보의 희소성을 무너뜨렸듯 AI는 기억의 희소성을 낮추고 있다. 그럴수록 럭셔리의 희소성은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AI가 기억과 발견의 범위를 넓히는 시대, 럭셔리 브랜드의 경쟁력은 결국 무엇을 모두에게 확장하고, 무엇을 선택적으로 남겨둘 것인지에 대한 의식적인 선택에서 만들어진다. 기억이 값싸질수록 고객이 특별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인정과 관계의 희소성은 더욱 커질 수 있다.
  • 박찬재

    버티컬 한국 대표

    필자는 글로벌 마케팅 테크놀로지 및 고객 경험 전문 기업이자 WPP의 자회사인 Verticurl의 한국 대표다. IBM과 제일기획 등을 거치며 25년 동안 데이터, 디지털 마케팅, CRM 및 고객 경험 분야에서 활동해왔다. 럭셔리, 뷰티 등 다양한 산업의 고객 데이터 전략 및 디지털 경험 고도화 프로젝트를 이끌어왔으며 AI 시대의 고객 경험과 개인화 전략, 마케팅 운영 혁신을 기업 현장에서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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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리=김윤진 truth311@donga.com

    동아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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