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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기의 국가경영: 경신 대기근

대재난 시기, 반대파에 중책 맡겨 역량 총결집

김준태,정리=장재웅 | 415호 (2025년 4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17세기 조선은 경신 대기근이라는 복합 재난 속에서 전국적인 흉년과 전염병, 경제 붕괴를 동시에 겪었다. 이에 현종은 당파를 초월해 서인 세력까지 등용하고 진휼청과 구관당상 같은 전담 조직을 설치해 국가 차원의 대응 체계를 정비했다. 또한 각 지역 감사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고 중앙과 지방 간 통신망을 강화해 현장 대응력을 높이고자 했다. 그러나 재난의 규모가 워낙 컸던 탓에 피해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고 대규모 아사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종의 통합적 리더십과 비상 대응 체계 구축은 조선 사회가 회복탄력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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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면서 소개했듯 17세기에는 몇백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할 대기근이 세 번이나 몰아닥쳤다. 그중에서도 최절정은 1670년(현종 11년) 경술년과 1671년(현종 12년) 신해년에 걸쳐 발생한 ‘경신 대기근’이다. 이 시기에는 가뭄, 지진, 수해, 풍해, 냉해, 병충해, 전염병, 우역(牛疫) 등 자연이 일으키는 모든 재앙이 한번에 몰려왔다. 흡사 지옥이 현세에 펼쳐진 듯한 모습이었다. 이와 같은 대재난을 조선은 어떻게 견뎌냈을까? 조선의 왕과 신하들은 미증유의 위기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앞으로 두 번에 나눠 다루고자 한다.


대기근의 시작

1659년 5월 9일, 조선의 열여덟 번째 군주인 현종(顯宗, 재위 1659~1674)이 즉위했다. 인종 이후 115년 만에 적장자가 왕위를 승계한 뜻깊은 사건이었지만 나라의 분위기는 밝지 못했다. 자연재해와 기근이 계속되며 민생이 도탄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재난은 멈추지 않았는데 현종의 치세 동안 단 한 해도 평온한 시기가 없었다. 그나마 이때까진 버틸 여력이 있었다. 어느 지역에 흉년이 들더라도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지역의 곡식을 가져다 구휼미로 쓰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국의 모든 고을이 동시에 흉년이라면 어떻게 될까? 비축미가 동났는데 손 벌릴 곳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라면? 바로 ‘경신 대기근’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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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준태akademie@skku.edu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초빙교수

    김준태 교수는 성균관대에서 한국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 유교문화연구소, 유학대학 연구교수를 거치며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는『왕의 경영』 『왕의 공부』 『탁월한 조정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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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리=장재웅

    정리=장재웅jwoong04@donga.com

    동아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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