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ential Cases in Books
온고지신(溫故知新). <논어>의 ‘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 너무나도 유명한 공자의 말이다. 한자사전에 보면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가 전체 글인데 뜻은 ‘옛 것을 복습하여 새 것을 아는 이라면 남의 스승이 될 만하다’라고 해석된다. 그런데 주석을 살펴보면 온(溫)은 찾을 심(尋)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찾는다는 것인데 무엇을 찾는가? 심(尋)은 석고(釋故)이니 옛 것을 읽고 풀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온고지신이란 옛 학문을 되풀이해서 연구하고 현실을 처리할 수 있는 새로운 학문을 이해해야 비로소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온고지신에서 시작과 기초가 되는 것은 옛 것을 아는 온고(溫故)이고, 이 말을 다르게 해석하면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는 것이다. 비즈니스든 예술이든 어떤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루기까지 사람들은 수없이 기존의 것을 학습하고 배워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이미 인류가 만들어놓은 지식과 기술이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과거 지식의 도움 없이 완전히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공자의 말이 맞다는 것을 잘 설명한 이론이 1930년대 슘페터의 이론이다. 조지프 슘페터는 <경제발전의 이론>과 <경기순환론>이란 책을 통해 창조적 파괴 행위인 혁신이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라는 통찰을 제시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슘페터가 혁신이 깜짝 놀랄 만한 새로운 발견이나 과거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슘페터는 혁신을 ‘이미 존재하는 지식을 재조합한 결과 만들어진 인공물(artefact resulting from the recombination of existing knowledge)’이라고 강조했다. 즉, 기존 지식이나 기술, 제품 등을 잘 모방하면 얼마든지 혁신적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는 의미다. 이처럼 혁신의 본질적인 의미는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을 모방하고 결합하는 것이다. 바로 온고지신이다. 결론적으로 혁신의 본질은 무에서 유를 찾는 게 아니다. 있는 것을 연결하고 다른 분야의 지식을 모방하며 과거의 지식도 현재의 관점에서 새롭게 되살려내야 한다. 이제부터 우리는 세상에 없는 아이디어를 창조하려고 머리를 짜낼 필요가 없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우리가 조금만 노력하면 알 수 있는 것에 창조적 아이디어의 원천이 숨어 있다. 창조형 모방의 원리를 이해하면 혁신은 한결 친근하게 우리 곁에 다가온다. 따라서 모방과 창조를 대립하는 개념으로 보는 시각은 잘못이다. 창조는 모방에서 출발한다. 모방 없이 창조는 불가능하다. 이미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지식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창조할 수 없다. 그러니 모방과 창조는 사실상 같은 활동이다.
모방의 가치가 아직도 약해보이면 김남국 박사의<창조가 쉬워지는 모방의 힘, 위즈덤하우스, 2012>와 <바로잉, 데이비드 코드 머레이 지음, 흐름출판, 2011>에서 역사를 바꾼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 사례를 살펴보자. 미국 시사 잡지 <라이프>가 지난 1000년간 인류에게 영향력을 행사한 10대 사건을 선정한 결과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견이 1위를 차지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책의 보편화가 가져다준 변화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기계 한 대로 일주일에 책 500여 권을 발행할 수 있게 되면서 지식의 축적과 보급이 순식간에 확산됐다. 특히 성직자들만 볼 수 있었던 성서가 대량 보급되면서 성서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논쟁이 이뤄졌다. 교황청에서 면죄부를 발행한 것도, 이것에 대해 반발한 루터의 반박문도 모두 금속활자 기술 덕분에 많은 사람에게 전파됐다. 이와 같은 놀라운 전파력은 결국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등장하기 전에는 필사본이나 목판 인쇄로 책을 제작했다. 필사본은 한 사람이 두 달 동안 쉼 없이 일해야 책 한 권을 만들 수 있었다. 그나마 수백 년 동안 사용된 목판 인쇄술은 필사본보다는 훨씬 발전된 형태였고 책의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만들었지만 목판을 만들다가 한 글자만 실수해도 판 전체를 다시 만들어야 했다. 이렇게 만든 목판을 달걀을 넣은 템페라 잉크에 적신 뒤 피지(皮紙)에 대고 손으로 눌러 인쇄했다. 이 방법은 시간이 많이 걸렸다. 때로는 책 한 권을 만드는 데 몇 년씩 걸리기도 했다. 이처럼 책을 대량생산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기에 책은 희귀해서 극소수의 상류층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하지만 금속활자 기술은 책의 대량생산을 가능케 해 지식의 대중화라는 혁명적 변화를 불러왔다. 금속활자는 개별 글자를 조합해 틀을 만들었기 때문에 목판 제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생산성이 높았다. 또한 제작 작업 도중에 실수를 하더라도 목판처럼 다시 처음부터 작업을 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구텐베르크 이후로 책은 싼값에 거래됐고 누구나 쉽게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됐으며 계몽시대라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창의적인 시대가 열렸다.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더 간편하게 전파됐으며 다른 아이디어들과 결합해 새로운 것들이 쉽게 생성됐다. 구텐베르크는 아이작 뉴턴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어떤 아이디어들을 습득하거나 그들의 아이디어들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데 필요한 재료를 제공했다.
그런데 이쯤 되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위대한 금속활자 기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해진다. 유럽 중세 사회로 돌아가자. 그 당시에는 목판 인쇄술 외에 주화 등을 만들기 위해 금속을 가공하는 기술도 발달했다. 특히 구텐베르크의 아버지는 조폐국에서 일했으며 그도 금 세공인으로 일하면서 금속을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구텐베르크가 목판 인쇄술의 문제점을 극복할 대안을 고민하면서 자연스럽게 그와 아버지의 주특기인 금속 세공 기술을 떠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금속에 알파벳을 인쇄한 다음, 판에 끼워 넣는 방식을 택하면 중간에 글자가 틀려도 금방 수정할 수 있다. 특히 글자를 하나씩 파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이처럼 주화 생산 방식을 활자 생산에 모방한 것이 그의 첫 번째 성공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 다음으로 고민한 문제는 종이에 직접 잉크를 묻혀 책을 만드는 일이었다. “피지는 너무 비싸단 말이야. 값이 싼 인쇄 재료는 없을까?” 그래서 찾은 것이 종이였고 쿠텐베르크는 피지에 인쇄하는 대신 파피루스나 종이 같은 값싼 재료에 인쇄했다. 당시 종이는 동전처럼 오래 전부터 사용됐지만 책으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피지만큼 내구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량으로 배급될 책에서 내구성이 그렇게 중요한 특징은 아니었다. 더 싸게 만들기 위해 구텐베르크는 달걀을 넣은 템페라 잉크 대신 값이 훨씬 저렴한 기름을 넣은 잉크로 대체했다. 이 잉크는 피지에서는 번졌지만 종이에서는 번지지 않았다. 종이가 잉크를 흡수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인쇄할 때는 목판을 인쇄할 때처럼 활자판을 손으로 누르지 않고 기계 장치를 이용했다. 포도주 제작자나 올리브유 제작자들이 사용하는 나사 압착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포도를 압착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사용했던 와인 프레스는 구텐베르크가 개발한 인쇄기(Gutenberg press)의 구조와 원리가 유사하다. 주변의 포도주 양조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와인 프레스(wine press·포도즙 짜는 기계)가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이다. 구텐베르크는 와인 프레스의 원리를 모방해 금속활자 기술을 완성할 수 있었다. 구텐베르크는 이처럼 목판 인쇄라는 기존의 것에서 구조만 살린 채 요소들을 모두 대체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하나로 결합했다. 이렇게 해서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명품이 탄생했다.
우리나라에서 고려시대 때 직지심체요절을 만들기 위해 이미 구텐베르크보다 먼저 금속활자 기술이 개발됐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역사를 바꾸지 못했는데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역사를 바꿨다고 평가받을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와인 프레스의 모방 덕분이라고 봐야 한다. 인쇄의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활용한 금속활자는 활자 위에 먹물을 묻히고 종이를 댄 다음 솜방망이로 탁탁 두드려 찍어내는 형태였기 때문에 단기간에 대량생산을 하기에는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기술은 와인 프레스의 모방을 통해 유성잉크를 위에서 아래로 압착해 훨씬 빠르게 인쇄물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와인 프레스가 압착하는 대상이 포도가 아니라 종이와 잉크로 바뀌었던 게 역사를 바꾼 원동력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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