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회의 자료를 보면 분량도 많고 내용도 흠잡을 데 없다. 시장 분석부터 실행 방안까지 논리가 매끄럽다. 그런데 근거와 배경에 대해 깊이 질문하면 보고자의 설명이 흐려진다. 문서에 적힌 논리와 대화에서 드러나는 논리가 충돌하는 것이다. AI를 활용하는 직장이라면 어디서든 마주할 법한 장면이다. 보고서의 완성도와 작성자의 능력은 같은 속도로 높아지지 않는다.
AI가 만든 결과물을 자신의 능력으로 받아들이는 ‘역량 착시’는 여기서 시작된다. 좋은 답을 손에 넣었다고 해서 좋은 판단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상황이 달라졌을 때 기존 결론을 버려야 하는지, 어떤 정보를 더 확인해야 하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비로소 그 답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쓴 『사고외주』에서 경계한 것도 스스로 고민하며 판단을 형성하는 과정까지 AI에 통째로 넘겨주는 일이다.
기업에선 이 문제를 대하기가 더 까다롭다. 당장의 성과는 좋아 보이기 때문이다. 보고서 작성 시간이 줄고 제안서의 품질이 높아지면 생산성이 개선됐다고 평가하기 쉽다. 그러나 남겨진 시간에 무엇을 했고, 그 과정에서 직원이 무엇을 배웠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특히 경험이 적은 직원에게 자료를 비교하고 가설을 수정하는 시간은 업무인 동시에 훈련이다. 이를 모두 생략하면 오늘의 업무는 빨라져도 내일의 판단을 맡길 사람을 키우기는 어려워진다.
해법은 업무 안에 생각할 순서를 남기는 데 있다. 먼저 AI에 질문하기 전 자신이 풀려는 문제와 잠정적인 답을 몇 줄로 적어보자. 매출이 줄었다면 곧바로 판매 전략을 요청하기보다 가격, 고객, 유통 중 무엇이 원인이라고 보는지 써보는 것이다. 틀려도 괜찮다. 자신의 가설이 있어야 AI의 답과 비교하며 무엇을 놓쳤는지 배울 수 있다.
다음으로 AI에는 내 생각의 약점을 찾는 역할을 맡겨보자. “이 전략이 실패할 조건은 무엇인가” “반대 결론을 지지하는 근거는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 AI가 제시한 반론 역시 실제 고객의 반응이나 현장 자료에 비춰 검증해야 한다. 마지막에는 채택한 제안과 버린 제안, 그 이유를 자기 언어로 정리한다. 이 짧은 기록이 쌓여야 다음 업무에 가져갈 경험도 남는다.
관리자의 질문도 바뀌어야 한다. “얼마나 빨리 끝냈나”와 함께 “무엇을 직접 확인했나” “어떤 조건이 바뀌면 결론을 수정하겠나”를 물어야 한다. 모든 업무에 긴 검토 절차를 붙일 필요는 없다. 중요한 의사결정이 담긴 보고서에 핵심 가정과 확인한 근거, 남은 불확실성을 간략히 적게 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직원이 AI의 답을 수정하거나 거절했다면 관리자는 그 이유와 판단의 질을 살펴야 한다.
이 질문은 관리자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직원에게 판단을 요구하면서 정작 평가에서는 속도와 문서의 외형만 보상한다면 행동은 바뀌지 않는다. 절약한 시간의 일부를 검증과 토론에 쓸 수 있도록 업무량과 평가 기준도 함께 조정해야 한다.
AI로 절약한 시간은 자동으로 사람의 역량이 되지 않는다. 그 시간을 질문과 검증, 피드백에 다시 투자할 때 비로소 조직의 자산이 된다. 경영자가 확인해야 할 것은 AI 도입 후 늘어난 산출물만이 아니다. 그 산출물을 만든 사람에게 어떤 판단 능력이 남았는지도 물어야 한다. AI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사람의 성장을 어떻게 이어갈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