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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정조를 통해 본 리더십

리더의 집착은 분쟁을 키울 뿐

노혜경 | 231호 (2017년 8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조선시대 기로소(耆老所)는 원래 정2품 이상, 70세 이상의 문신들만 회원이 될 수 있는 관청이었다. 하지만 숙종과 영조는 일흔에 한참 못 미치는 50대 나이에 노령의 신하들만 들어가는 이곳에 들어가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심지어 영조는 반대 상소를 올린 신하들을 파직하고 귀양까지 보내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황당한 것은 이렇게까지 무리를 해 기로소에 가입한 영조가 얻는 건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리더가 조직원들이 공감하지 못하는 일에 집착하고 목표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 아랫사람의 신뢰를 잃게 되고 분쟁만 확대될 뿐이다.


조선사회에서는 최고의 가치를 효에 두고 있었다. 나이가 많은 노인들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국가에서 예우하던 사회였다. 그러나 최고의 예우를 따진다면 신분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관직도 높고, 연세도 많은 노인이 최고 예우를 받는 대상이었다.



70세 이상 고위 문관들을 위한 관청, 기로소(耆老所)

조선시대 때는 서울 중부 징청방(澄淸坊, 현재 세종로)에 기로소(耆老所)라는 관청이 있었다. 정2품 이상, 70세 이상의 문신들만 회원이 될 수 있는 관청이었다. 기로소는 국가 경축일에 축하의례를 진행했고, 중요한 국사를 논의할 자리가 있으면 참여해 왕의 자문에 응했다.

1719년(숙종 45) 때의 일이다. 숙종은 자신도 기로소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옆에 있던 신하들은 깜짝 놀라며 반대했다. 그때까지 기로소는 신하들만으로 구성돼 있던 관청이었다. 왕이 기로소에 들어간 전례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다. 당시 숙종의 나이는 일흔이 되려면 아직도 한참 먼 59세였다. 신하들이 반대할 이유가 충분했다.

그러나 숙종은 막무가내였다. 태조도 기로소에 들어갔고, 그것도 60세에 들어갔다며 억지를 쓰고 있었다. 주위의 신하들이 “그런 내용으로 정확히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고 하자 숙종은 “임진왜란 때 불타서 없어진 것”이라며 계속 우겼다. 할 수 없이 신하들은 숙종이 아직 60도 되지 않았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러자 숙종은 “59세면 망육(望六), 즉 60을 바라보는 나이니 60이다”라고 생떼를 써서 끝끝내 기로소에 들어갔다. 숙종은 왜 그렇게 기로소에 들어가고 싶어 했을까?

당시 정국은 세자(경종)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뒤였고, 숙종이 기로소에 들어가도록 적극적으로 논리를 펴고 방안이 모색된 것은 숙종 자신을 비롯해 세자와 종실의 합작품이었다. 태조의 고사 또한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략(璿源譜略)’에 나오는 내용을 근거로 종친 여성군(礪城君) 이집(李楫, 1668∼1731)이 주장한 것이다. 59세를 망육으로 치며 서둘러 진행한 것도 일반인들이 회갑 등을 당겨서 시행하는 관례를 따른 것이었다. 숙종은 자신이 어떤 이유 때문에 기로소에 들어가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은 정년을 하고 은퇴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고, 이는 곧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고 숙종 자신은 막후에 있으려고 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세월이 흘러 영조가 즉위하고, 영조도 나이가 들었다. 1744년 어느 날, 불현듯 영조가 자기도 ‘망육’이 됐으니 숙종의 고사를 따라 기로소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신하들은 더 어이가 없었다. 그때 영조의 나이는 51세였다.

“51세가 어떻게 망육입니까?”

“59세가 망육이니 50대가 되면 다 망육이다.”

영조는 이렇게 우겼지만 논리가 부족하다는 것은 서로 알고 있는 처지였다. 그러자 눈치 빠른 한 종친이 고사를 뒤져 논거를 찾아 올렸다. 여은군(礪恩君) 이매(李梅)는 중국 당나라와 송나라에도 기로소와 같은 구로회(九老會)와 기영회(耆英會)라는 것이 있었고, 유명한 대신 적겸모(狄兼謨)와 사마광(司馬光)도 70세 이전에 가입을 허락받았다는 내용을 끄집어냈다.

“그래, 그런 고사가 있었구먼. 그래도 나는 너무 이른 것 같아. 아무래도 59세까지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라고 하면서도 구구한 설명이 수백 마디에 달했다고 <실록>에 묘사돼 있다. 결국 이 말은 반어법이다. 이 정도로 암시를 주면 대신들이 “아닙니다. 그런 전례가 있으면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라고 말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주변의 신하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조의 논리를 반박하는 상소를 삼정승이 합동으로 올렸다.

“기로소는 관청입니다. 왕이 어떻게 신하들의 관청에 들어갑니까?”

“50대 남자에게 ‘기로’라는 명칭을 붙일 수 없습니다.”

“선대의 어느 왕도 그 나이에 기로소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강력하게 나오는 신하들을 향해 천하의 영조도 대꾸할 말이 없었다. “내가 언제 기로소에 들어가겠다고 했느냐? 지난번에는 그저 기로소의 내력을 설명한 것뿐인데 그대들이 이렇게 과민반응을 하는가”라며 한발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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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혜경hkroh68@hotmail.com

    - (현) 호서대 인문융합대학 교수
    - 강남대, 광운대, 충북대 강사
    -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 덕성여대 연구교수
    - <영조어제해제6>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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