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쉽게 익숙한 것에 길들여진다. 그리고 한번 익숙해진 것은 웬만해선 바꾸지 못한다. 물론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특히 나는 지독한 방향치인지라 낯선 길로 가는 것을 죽기만큼 싫어한다. 그래서 늘 다니는 길로만 다닌다. 위안이 되는 건 나만 그런 건 아니란 사실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낯선 길을 싫어한다. 그들은 (나를 포함해) 음식점도 익숙한 곳 몇 군데만 다닌다.
물론 여기에는 각자의 타고난 기질도 한몫한다. 정신과적으로 성격 및 기질을 측정하는 검사가 있다. 그런데 정신적 문제를 호소하는 사람들을 보면 기질 중에서 서로 모순되는 두 성향이 똑같이 높게 측정되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측정하는 자극추구 성향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실패나 실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새로운 것을 회피하는 위험회피 성향이다. 그 두 가지 상반되는 성향(새로운 것을 탐구하고 싶은데 그랬다가 실패하면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이 충돌하다 보니 정신적으로 갈등과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다.
흥미로운 것은 젊은 세대로 갈수록 그 두 가지 성향이 똑같이 높게 나온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래서 요즘 젊은 세대들이 정신적으로 더 긴장하고 더 갈등을 심하게 느끼는 것 같다. 인간관계나 일에서 성공하고 싶으면 이 두 가지 성향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되겠지만 그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익숙함에 대한 강렬한 동경
우린 왜 그처럼 변화를 두려워할까? 가장 큰 이유는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질과 상관없이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느낀다. 상담을 하다 보면 낯선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느낀다는 사람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우리가 그토록 낯선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모르는 상황에서는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신과에서는 치료가 끝나갈 무렵 갑자기 병원 다니는 것을 그만두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입원 환자라면 퇴원을 거부한다. 심하면 자살을 기도하는 등의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다. 이제부터 자신이 직면해야 할 낯선 변화가 너무도 두렵기 때문이다. 치료가 끝나면 자신은 더 이상 환자가 아니다. 그동안은 단지 환자라는 이유로 많은 것이 용인됐다. 자기 합리화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주변에서도 다들 그렇게 이해해줬다. 하지만 치료가 끝나고 나면 더 이상 합리화나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내 몸처럼 익숙했던 모든 것들과 단호하게 작별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 당사자들에게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공포를 가져온다. 그런 괴로움을 당하느니 차라리 치료를 그만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환자들만 그런 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익숙한 것에는 친밀감을, 낯선 것에는 공포를 가지고 있다. 특히 익숙함에 대한 동경은 새들의 귀소본능만큼이나 강렬한 그 무엇이다.
우리가 낯선 곳에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또 있다. 그곳에서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대해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린 웬만하면 단골 식당, 미장원 등을 정해놓고 살아간다. 모르는 곳에 가면 그들은 나를 반갑게 대해주지도 않고 알아서 뭘 해주지도 않는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우린 그런 일에 쉽게 마음이 상한다. 상대방이 내 존재를 알아주는가 아닌가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나는 종종 대학병원에 있는 동기나 선배들에게 진료약속 시간을 잡아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원칙대로 예약을 하려면 몇 달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정말 거절을 하기 어려울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부탁을 들어줄 때가 있다. 그러면 이번에는 담당의사에게 직접 자기에 관해 언급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나는 대학병원 의사들의 살인적인 스케줄을 알기 때문에 내가 용건이 있을 때조차도 아주 급한 일이 아니면 전화를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있다. 하지만 지인이 막무가내로 부탁하면 할 수 없이 전화를 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그 후 사람들의 반응이다. 의사가 자기한테 누구 소개로 왔다는 이야기를 안 하던데 네가 전화한 게 맞냐고 따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역시 소개로 가니 대접이 다르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때마다 나는 잠자코 그들의 얘기를 들어준다. 그들이 부탁하는 심리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상대방이 내 존재를 알아주는 약간의 특별 대접을 받고 싶은 것뿐이다.
익숙함과의 결별, 나를 재창조하는 과정
낯선 곳에서는 특별 대접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계속해서 익숙한 곳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어떤 종류든 집착이 생겨나는 이유는 한 가지다. 바로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집착이 그것을 잘 설명해준다. 사랑이 멀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관계가 변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계 자체가 변했건만 그 변화를 인정하지 못하니 집착이 생겨난다.
사랑만이 아니다. 인생의 모든 면에 다 적용된다.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사람이 음식에 집착하는 것도 음식 섭취를 줄여야 한다는 명백한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젊음에 집착해 성형중독이 되는 이유도 나이 들어가는 순간순간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해서다.
하루 일과를 반드시 정해진 순서대로 진행해야 견뎌내는 사람들도 있다. 어느 작가는 그런 상태를 가리켜 ‘완벽주의와 소심함의 합병증’이라고 불렀는데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그런 타입은 데이트도 전날 세운 스케줄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아주 약간의 틀어짐이나 변화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떨치고 일어나면 분명 새로운 기회가 열릴 것을 알면서도 현실에 안주해 시간을 죽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들은 계속해서 불평하고 투덜거리면서 자신이 그래야만 하는 온갖 이유를 다 수집한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역시 하나뿐이다. 행동해야 하는 변화가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삶의 어느 불행한 순간에 고착되고 만다.
영국작가 줄리언 반스의 소설 <내 말 좀 들어봐>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주인공인 질리언의 입을 통해서다.
“야채가게 주인은 아주 세심하게 매번 모든 상품에 대문자로 어포스트로피(예:APPLE’S)를 붙여놓곤 했어. 우린 그 잘못됨과 끈질김을 우습고 약간 불쌍하게 여겼어. 그런데 난 오늘 그게 하나도 우습지 않았어. 그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슬픈 느낌이 들었어. 내가 슬펐던 건 한 번 잘못 쓰고는 다음 상표도 잘못 쓰고, 다음 상표도 잘못 쓰고, 그리고 또 다음 상표도 계속 잘못 썼기 때문이야.”
언젠가 그 문장을 읽으면서 나 역시 슬픔을 느꼈다. 우리가 변화해야 할 때 변화하지 못하고 불행한 상황에 고착되고 마는 모습을 몇 줄의 문장으로 절묘하게 표현해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린 인간인지라 한 번 마음이 기울면 그걸 바꾸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그게 의도했던 것이든, 잘못된 선택이었든 상관없이 그저 지금 이 순간의 변화가 두려운 것이다. 그러다가 모든 걸 되돌리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는 걸 알게 되면 마침내 불행 앞에서 절망한다.
가장 좋은 것은 내게 필요한 변화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거창하게 말하면 변화는 자신을 재창조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알고 있던 지식이나 습관을 과감히 벗어던질 수 있어야 한다. 단지 내게 익숙하다는 이유로 옆에 끼고 있던 많은 것들과도 아낌없이 헤어져야 한다.
그러자면 소소한 변화부터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 늘 다녀서 눈에 익은 길이든, 단순히 친절한 단골 음식점이든 바꾸려는 의지를 가져보는 것이다. 어쩌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신선한 새로운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소소하고 일상적인 경험이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큰 변화 앞에서도 당당하게 그것을 받아들이는 멋진 모습을 연출할 수도 있다. 우선 나부터 그런 변화를 추구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분명 매우 즐겁고 멋진 일일 것이므로.
양창순 신경정신과·대인관계클리닉 원장 lamb55@nate.com
양창순 원장은 정신과, 신경과 전문의로 현재 <양창순신경정신과·대인관계클리닉> 원장이다. 연세대 의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성균관대에서 주역과 정신의학, 리더십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정신의학회 국제회원, 미국의사경영자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ceo, 마음을 읽다> <미운 오리새끼, 날다> 등 자기계발, 대인관계, 리더십을 주제로 한 책들을 10여 권 넘게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