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토목보의 變: 속병든 明나라, 황제를 빼앗기다

95호 (2011년 12월 Issue 2)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1449 8월 중국 산시성(山西省) 다퉁(大同). 만리장성의 바로 안쪽인 이곳은 옛날부터 중국 내지로 침입하는 유목민족을 방어하는 군사 요충이었다. 지금도 네이멍구(內蒙古)로 들어가는 주 도로가 이곳을 지나간다. 넓은 몽골초원을 앞에 두고 약간의 산지가 도시 주변을 감싸고 있다. 이런 지형 때문에 방어요지로 선정됐던 것 같지만 그렇다고 방어에 특별한 장점을 제공해 줄 정도의 지세는 아니었다. 중국의 화베이평원은 평원이 발달해서 산지가 많은 우리와는 방어개념과 방법이 다르다. 중국은 장성을 쌓고 장대한 군사도시를 건설해 이곳을 지켰다. 하지만 별로 아름답지 못한 기억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기원전 200, 한고조 유방(劉邦) 32만의 병사를 이끌고 이곳에서 흉노에게 도전했다가 묵돌선우(冒頓禪于)에게 패했다. 유방은 꼼짝없이 사로잡힐 상황이었지만 묵돌선우의 부인에게 뇌물을 주고 간신히 빠져나왔다.

 

1600여 년 후 명나라 황제 영종이 50만 대군을 이끌고 다퉁으로 진주했다. 몽고족 일파인 오이라트부(瓦刺部)의 추장 에센 부카(也先不和)가 타타르족을 끌어들여 산시성(山西省), 랴오닝성(遼寧省), 산시성(陝西省)을 침공했기 때문이다.

 

명나라는 몽고족이 건국한 원나라를 몰아내고 세운 나라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군사적으로 몽고족을 압도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을 뿐이다. 명나라 역사상 제일 걸출한 영웅이라는 영락제도 몽골 토벌에 도전했다가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막사에서 허무하게 병사했다. 이후 명군은 야전에서 몽골군을 격파한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 않았다. 그런데 평생 궁중에서 자랐고 군사적 재능도 별로 없는 영종이 직접 출정해 에센을 토벌하겠다고 나섰다. 모든 신하들이 만류했으나 영종은 듣지 않았다. 이제 다퉁까지 와서 적과 대면하기 직전이었다. 신하들이 다시 무릎을 꿇고 간절히 회군을 요청했으나 영종은 끄떡하지 않았다.

 

환관 왕진의 전횡

영종의 강경한 태도 이면에는 환관 왕진(王振)이 있었다. 중국 역대 왕조는 환관 때문에 늘 고생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환관에 대한 견제가 철저해서 궁정의 청소, 관리 등 잡무 이상의 직책은 절대 맡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환관이 국정, 정보, 군사 업무에까지 깊이 관여했다. 이것이 황제의 독재권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황제는 환관이라는 특수한 집단에 권력을 부여하고 이를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활용했다.

 

중국 역대 왕조 중에서도 환관의 권력이 가장 강했던 시대가 명나라였다. 명나라는 사례감이라는 환관의 관청을 만들었는데 내각에서 황제에게 보내는 모든 문서가 사례감을 거쳐 황제에게 전달됐다. 명나라 때 황제의 정보기관으로 유명한 동창(東廠)은 황제의 친위 사찰, 사법기관으로 환관이 제독을 맡아 고관에 대한 조사와 처벌을 마음대로 했다. 지금도 이들이 비밀 자객단을 운영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무협 영화의 좋은 소재가 되곤 한다. 이런 명나라에서도 아주 남다른 권력을 누린 환관이 있었다. 그가 바로 영종의 사부 왕진이다.

 

왕진은 환관 중에서는 특이하게 학문을 갖춘 인물로 영종이 세자 시절에 영종을 가르치기도 했다. 영종은 왕진을 사부라고 부르며 존경했다. 이 왕진이 사례감의 최고 책임자인 태감으로 임명되면서 그야말로 환관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환관은 공식적으로 관료의 상위에 군림하게 됐다. 조정의 고위 관료들이 왕진을 만나면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고 큰절을 했다. 황제가 다퉁으로 친정(親征)에 나선 것도, 신하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회군을 거부한 것도 모두 다 왕진이 주도한 것이었다.

 

허울뿐인 명나라 군대

명나라는 행정적으로는 괜찮은 군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베이징의 수비대는 20, 난징의 수비대는 12만이었다. 군율과 군기는 엄격했고 복무 규정, 군수·군량 관리, 군사행정체제도 아주 세밀하게 규정돼 있었다.

 

그러나 안을 들여다보면 엉망이었다. 무장과 군인에 대한 대우는 역대 왕조 중에서 제일 좋지 않았다. 문무차별은 제일 심했다. 고위 장군도 학식이 없다고 조롱을 받았고 조금 유명해지면 바로 숙청됐다. 직업 군인층을 형성하는 군관, 무사는 군에서 제대하면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이전 왕조에서는 나름 이들을 대우하고 흡수하는 정책이 있었지만 명은 그런 것이 없었다. 일반 병사들의 관리 체제도 형편없긴 마찬가지였다. 명나라 건국 초에는 병사의 질을 높이기 위해 군사직을 세습하는 군호제를 시행했다. 그러나 이들도 군역에 대한 보상이 없다시피해서 군호들은 모두 도망쳤다. 그 다음부터는 농민을 징발해서 채웠다. 이들은 적당히 기간만 채웠고 국가는 재정을 아끼기 위해 훈련에 공을 들이지 않았다. 전투력은 말도 못하게 떨어졌다. 장부상의 병력과 실제 병력은 엄청난 차이가 나서 실 병력이 정원의 2∼3%밖에 되지 않는 곳도 있었다. 영종이 인솔한 52만도 과장된 병력이었다.

 

명나라가 군사적으로 앞선, 그리고 유일하게 믿는 분야는 화약병기였다. 화포와 단발식 소총과 유사한 병기가 개발, 보급됐다. 그러나 의욕이 떨어진 군대는 새 무기에 걸맞은 전술을 개발하지 않았고 훈련을 시키지 않아서 병사들은 복잡한 화약무기의 사용법에 전혀 숙달되지 않았다. 군대가 이 모양이니 출전을 삼가고 방어에 주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럼에도 왕진은 친정을 감행했다.

 

토목보(土木堡)의 변()

명군이 다퉁에 도착했을 때 벌써 식량이 결핍돼 병사들이 지치기 시작했다. 실전 상황이 되자 군수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이어 선발대가 오이라트군을 만나 몰살했다. 몽골은 기병이다. 평원에서 패하면 달아날 곳이 없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왕진은 회군하기로 한다. 다행히 40리 밖에 쯔징관(荆关)이란 관문이 있었다. 이곳에 수비대를 배치하고 후퇴하면 베이징까지는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왕진은 가까운 쯔징관 길을 버리고 멀리 동쪽으로 돌아가는 진로를 잡았다. 그 길에 자신의 저택이 있는데 그곳에 황제를 모시고 황홀한 대접을 함으로써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참고로 왕진의 재산은 명나라 몇 년치의 재정에 필적할 정도였다.

 

이 우회가 치명적이었다. 몽골기병은 세계에서 제일 빠른 군대다. 과거에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몽골군은 히틀러의 독일군 기갑사단보다도 빠르게 진격했던 적이 있다. 특히 기동력을 이용한 추격과 우회공격에는 명수였다.

 

명군이 선부(宣府)에 도착했을 때 오이라트 기병이 덮쳤다. 명군은 큰 피해를 입고 후퇴에 성공했으나 요아령(鷂兒嶺)이란 곳에서 다시 매복에 걸렸다. 몽골 기병이 앞서 달려왔던 것이다. 여기서 명군은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살아남은 부대는 토목보(土木堡)라는 작은 요새로 도주했다. 이곳은 높은 곳에 위치한 천험의 요새지만 물이 없고 뒤쪽에 강이 흐르고 있었다.

 

오이라트가 이곳을 포위하자 황제는 완전히 고립됐다. 할 수 없이 영종은 유방의 전례를 따라 강화를 요청했다. 하지만 왕진은 이 대목에서도 사고를 쳤다. 물 부족을 염려한 그가 물을 얻을 수 있는 강가로 이동배치를 명령한 것이다. 명군은 이미 큰 피해를 입고 생존자로 재편한 부대라 멀리서 봐야 그럴듯해 보일 뿐 속은 편제가 엉망이 돼 있었다. 이 상황에서 진을 위험한 고지 아래로 이동시키자 대혼란이 벌어졌다. 오이라트군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대학살이 벌어졌다. 왕진도 혼전 중에 사망했다. 명군 정예는 황제를 옹립하고 강행돌파를 시도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해 영종은 포로가 됐다. 토목보 주변에는 사용하지도 못하고 버려진 화약병기가 즐비했다.

 

뒤늦은 베이징 공격

에센은 내친 김에 베이징까지 단숨에 정복하고 과거 요나라처럼 화베이 지방을 통째로 차지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자신도 예상치 못한 성과에 너무 놀랐던 것 같다. 그는 황제를 인질로 잡았으니 명나라가 항복하거나 베이징을 포기하리라 예상하고 공격을 늦췄다.

 

실제로 조정에 남아 있던 신하들은 난징으로 천도하려고 했다. 베이징은 수비대가 영종을 따라가 버려 병력과 군기가 텅 비어 있었다. 이때 병부상서 우겸(于謙)이 강경하게 반대했다. 그는 즉시 황제의 이복동생을 새 황제(경종)로 즉위시키고 민심 수습에 나서며 병력과 장비를 모았다. 산둥, 하남에 배치한 왜구방어 부대와 장비를 베이징으로 소환했고 난징에 쌓아 둔 장비도 베이징으로 옮겼다. 단 한 달 반 사이에 우겸은 이 일을 해냈다. 경종은 조선에도 원병을 요청했지만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세종은 슬그머니 요청을 묵살했다.

 

베이징의 항전태세를 본 에센은 10월에야 베이징을 공격했다. 베이징 성문에서 벌어진 두 번의 전투에서 명군이 오이라트군을 대파했다. 야전에서는 명군이 절대 불리했지만 수성전에서는 유리했다. 무엇보다 성벽이 튼튼했고 오이라트군보다 우수한 무장이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화기는 몽골 기병에게는 아주 위협적이었다. 몽골군은 아직 화약을 몰랐고 말들은 포의 굉음과 불꽃에 혼비백산했다. 화기의 발사속도와 정확도가 형편없어서 야전에서는 적을 맞추기가 거의 불가능했지만 성벽과 같이 고정 목표를 향해 달려드는 기병에겐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했다. 큰 피해를 입은 에센은 베이징 공략을 포기하고 영종을 송환했다. 이로써 명나라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측근 정치의 위험

명과 오이라트의 전쟁은 군사적으로는 전술적 조건과 지형에 맞는 전투가 얼마나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다. 전술지형의 잘못된 선택으로 명나라는 단번에 망할 뻔했고 오이라트는 중국의 반을 차지할 기회를 놓쳤다. 경영 차원에서는 형태와 외형은 훌륭해도 부실한 운영구조와 측근정치가 얼마나 큰 위기를 초래하는 가를 보여주는 명증이다.

 

송환된 영종은 황제로 복위하지 못했고 경종에 의해 유폐상태가 된다. 그러나 경종도 영종을 제거하지는 않았다. 경종은 재위 8년 만에 갑자기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 후사도 남기지 않았다. 이 덕에 영종은 극적으로 복위했다. 다시 황제가 된 영종은 구국의 공신인 우겸을 바로 처형시켜 버리고 환관정치로 되돌아갔다. 혹자는 영종이 복위한 후엔 이전보다 조금은 더 잘해보려고 했다고 평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궁중에 더 깊숙이 틀어박혀 환관들로 인의 장막을 쳤다. 관료와의 면담은 더 줄었다. 어쩌다 관료를 만나도 정사는 논의하는 법이 없고 인사만 받고 끝냈다고 한다. 측근정치의 본질은 결국 리더의 이기주의라는 점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yhkmyy@hanmail.net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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