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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암의 정원 읽기

의자를 넘어 문화를 설계한 비트라
공장을 세계적 디자인 명소로 바꾼 힘

신현암,정리=백상경 | 446호 (2026년 8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비트라(Vitra)는 ‘임스 의자’ ‘팬톤 의자’ 등으로 유명한 스위스 가구 회사다. 독일 남서부 바일 암 라인(Weil am Rhein)에서 제품을 생산하는데 이 공간이 여느 가구 회사의 생산 공장과는 확연히 다른 정체성을 갖는다. ‘비트라 캠퍼스’로 불리는 이곳은 가구를 생산하는 공장이자 판매장이며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 공간, 그리고 생동하는 정원을 거닐 수 있는 공원이다. 특별한 디자인 가구를 만들던 이곳은 공장이 전소하는 화재 사고를 계기로 세계적인 거장의 건축물이 콜라주를 이루는 명소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건축물 사이 빈 공간을 현대 자연주의 정원을 대표하는 거장, 피에트 우돌프(Piet Oudolf)가 설계한 정원이 채웠다. 감탄을 위한 건축물 사이, 사람이 머무는 정원이 내려앉은 순간 비트라 캠퍼스는 비로소 하나의 풍경이 됐다.



라인강 상류의 낯선 풍경

독일 남서쪽 끝,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이 맞닿는 곳에 바일 암 라인(Weil am Rhein)이라는 마을이 있다. 바젤에서 기차로 한 정거장 거리에 있는 인구 3만 명의 평범한 소도시다. 이 마을 변두리엔 이상한 건물이 모여 있다. 유리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유선형 구조물, 흰 벽이 사방으로 튀어 오른 건물, 기다란 나무 그늘 아래 놓인 벤치까지. 멀리서 보면 공장인지 미술관인지 구분이 안 되는 장소, 사람들은 이곳을 비트라 캠퍼스라 부른다.

비트라(Vitra)는 스위스 가구 회사다. 정확히는 바일 암 라인에서 생산하고, 스위스 비르스펠덴에 본사를 둔 회사다. 두 곳 모두 바젤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있다. 비트라 캠퍼스는 라인강 위쪽에 있어 독일이고, 다른 두 곳은 라인강 남쪽에 있어 스위스일 뿐이다. 창업자 빌리 펠바움(Willi Fehlbaum)은 1950년 비트라를 세웠다. 회사 이름은 비트린(vitrine), 유리로 된 쇼룸 진열 케이스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따왔다. 빌리는 1953년 뉴욕 출장 중 한 의자를 운명적으로 만난다. 미국의 전설적인 부부 디자이너, 찰스와 레이 임스(Charles and Ray Eames)가 디자인한 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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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인 찰스와 추상화가인 레이는 미시간주 크랜브룩 예술 아카데미에서 만나 가정을 이루고 가구를 디자인했다. 찰스의 건축적 사고와 레이의 회화적 감각이 결합하면서 이들의 가구는 구조와 색, 기능과 유머가 동시에 살아 있는 물건이 됐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좋은 것’과 ‘더 좋은 것’, 그리고 ‘임스다운 것’이 있다”고 할 정도였다. 그만큼 이들의 디자인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 찰스와 레이가 디자인한 제품은 허먼 밀러가 생산했다. 빌리가 본 것도 바로 허먼 밀러의 의자였다. 비트라는 1957년 허먼 밀러와 첫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유럽 시장용 가구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후 1984년 양사의 파트너십이 종료되면서 임스 부부, 조지 넬슨, 알렉산더 지라드 디자인의 유럽 및 중동 권리는 비트라에 넘어갔다. 빌리는 제품 디자인 역량도 확충했다. 특히 1967년 출시된 팬톤 의자(Panton Chair)는 덴마크가 자랑하는 ‘색채의 마술사’ 베르너 팬톤(Verner Panton)과의 협업 결과물이다. 하나의 플라스틱 덩어리처럼 이어진 유려한 형태의 의자는 오늘날까지 임스 의자와 더불어 비트라를 대표하는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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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가 기회가 되다

1977년, 빌리의 아들 롤프 펠바움이 비트라의 경영권을 물려받는다. 그런데 4년 뒤인 1981년 여름, 위기가 닥쳤다. 바일 암 라인 공장에 불이 난 것이다. 생산 시설이 대부분 전소했다. 처음부터 공장을 다시 세워야 했다.

롤프는 영국 건축가 니콜라스 그림쇼에게 새 건물을 의뢰했다. 그림쇼는 공장 하나에 그치지 않고 전체 부지를 통일된 양식으로 설계하겠다는 마스터플랜을 제안했다. 롤프는 일단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1984년 아버지의 70세 생일 선물을 준비하면서 만난 조각가 클레스 올덴버그를 통해 건축가 프랭크 게리를 소개받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하나의 통일된 스타일 대신 세계 최고의 건축가들이 각자의 스타일로 건물을 짓는 ‘콜라주’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1989년 게리의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이 문을 열었다. 바일 암 라인 공장 부지가 ‘비트라 캠퍼스’의 정체성을 뚜렷이 갖기 시작한 순간이다. 공장과 전시장, 일부 제품 판매장까지 겸한 곳이었다. 이후 자하 하디드, 안도 다다오, 헤르조그&드뫼롱 등 수많은 거장이 관련 건축물을 지으면서 이곳은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들의 건축물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전 세계 건축학도의 발길이 끊기지 않는다.


비용 문제를 해결한 비밀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프리츠커상 수상자의 작품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를 만드는 것은 당연히 멋진 일이다. 하지만 비용 또한 엄청나게 들어갈 수밖에 없다. 생산 설비가 전소한 마당에 이렇게 많은 돈을 쓰는 일이 과연 필요했을까? 전반적인 구조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첫째, 화재가 발생했기에 새로운 건물이 필요했다. 화재로 공장을 다시 지어야 했고 소방서, 콘퍼런스 시설, 가구를 보관할 쇼룸도 필요했다. 즉 건축 비용 자체는 어차피 나갈 돈이었다. 선택의 문제는 건물을 지을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였다. 둘째, 당시 해당 건축가들의 몸값은 지금만큼 비싸지 않았다. 롤프는 이들 건축가 대부분을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전에 먼저 찾아갔다. 하디드에게 ‘비트라 소방서’는 생애 처음으로 완공한 건물이었고, 게리에게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은 유럽에 세운 첫 건물이었다. 롤프는 재능을 먼저 알아봤고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비용으로 작업할 수 있었다. 셋째, 비트라는 상장사가 아니다. 가족 소유 기업이라는 법적 지위 덕분에 이렇게 장기적이고 수익성이 떨어져 보이는 투자가 가능했다. 주주에게 분기 실적을 보고할 필요가 없으니 수십 년에 걸쳐 건물 하나씩 지어나가는 방식이 가능했다. 상장 기업이었다면 이사회에서 진작에 막혔을 일이다.

즉 어차피 건물을 지어야 할 상황, 유망한 건축가를 일찌감치 알아보는 안목, 외부 투자자의 압력이 없는 가족 기업 구조, 세 가지가 맞물린 결과다. 뮤지엄 운영 경비는 어떨까.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은 입장권 수입, 순회 전시, 미니어처 의자 판매, 매장, 스폰서십 등을 통해 충분한 수익을 낸다. 비용 지출을 상쇄하는 것을 넘어 비트라의 디자인 문화를 확장하는 플랫폼으로도 기능한다.

그렇게 비트라 캠퍼스는 건축가들의 실험장으로 자리매김했다. 허나 건물이 하나씩 늘어날수록 더 선명해진 빈자리가 있었다. 게리의 뮤지엄, 하디드의 소방서, 다다오의 콘퍼런스 파빌리온, 헤르조그&드뫼롱의 비트라우스가 자웅을 겨루는 동안, 땅은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었다. 비트라 캠퍼스에 필요했던 것은 또 하나의 건물이 아니었다. 건축과 건축을 이어 줄 다른 무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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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퍼즐, 피에트 우돌프의 정원

그 무엇을 채운 사람이 현대 자연주의 정원 디자인의 거장, 피에트 우돌프(Piet Oudolf)였다. 뉴욕 하이라인 파크,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의 루리 가든을 설계한 네덜란드 조경가다. 롤프는 훗날 이렇게 털어놓았다.

“캠퍼스 개발 초기 수십 년 동안, 조경 디자인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 알바로 시자(Álvaro Siza)의 산책로가 건물과 건물 사이 동선을 이어주기는 했지만 그것은 정원이 아니라 통로에 가까웠다. 건물 사이의 땅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잔디 관리인은 없고 스타 선수들만 있는 축구 구장 같은 형국이었다.

변화는 2020년에 찾아왔다. 롤프는 우돌프에게 연락했다. 그는 우돌프에게 부지를 안내하며 어디에 정원을 만들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우돌프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구석 어딘가가 아니라 캠퍼스 한가운데, 비트라우스 앞,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그 자리에 정원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우돌프는 “(정원을) 그냥 뒤편에 만들 수도 있었고, 게리의 디자인 뮤지엄 근처에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입구 쪽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정원이 캠퍼스의 중심이 돼야 했다”고 말했다.


우돌프, 식물로 건축에 맞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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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돌프는 1944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자연보호구역 옆에서 식당을 운영했고, 그는 가업을 잇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20대 중반, 크리스마스 시즌에 임시로 일하게 된 가든 센터에서 삶이 바뀌었다. 식물을 보는 눈이 열린 것이다. 식물학 책을 독파하기 시작했다. 1982년엔 아내 안야와 함께 암스테르담 동쪽 훔멜로라는 작은 마을의 폐농장을 샀다. 집을 짓기 전에 먼저 묘목장부터 만들었다. 1000가지가 넘는 품종을 심고, 키우고, 관찰했다. 식물이 봄에 어떻게 올라오고, 여름에 어떻게 자라고, 가을에 어떻게 마르고, 겨울에 어떤 형태로 서 있는지를 수십 년에 걸쳐 몸으로 익혔다.

그에게 정원 설계란 데코레이션이 아니라 디자인이었다. 1980년대만 해도 정원이란 꽃과 색으로 가득한 공간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우돌프는 그 공식을 거부했다. 꽃이 진 뒤에도, 줄기가 마른 뒤에도, 서리가 내린 뒤에도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고자 했다. 새순이 돋는 봄, 피어나는 여름, 땅으로 스러져가는 가을, 마른 줄기가 남아 버티는 겨울까지. 식물의 모든 단계에서 그는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이 철학이 낳은 것이 ‘뉴퍼레니얼(New Perennial) 운동’이다. 한해살이풀 대신 숙근초(宿根草)를 쓴다. 겨울에 땅속에서 살아남아 이듬해 봄에 다시 올라오는 식물들이다. 매년 새로 심을 필요가 없으니 지속가능하다. 관리도 적게 든다. 무엇보다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우돌프는 식물을 이야기할 때 마치 사람을 묘사하듯 한다. 프레리 드롭시드라는 바람풀은 “끝없는 초원에 있는 느낌을 만들어내는 식물”이라 했고, 에키나케아는 “크고 아름다운 창백한 꽃을 가진” 식물이라 했다. 버넷은 “깃털 같은 꽃”, 메도스위트는 “핑크색 물보라를 만들어내는” 식물이라 했고, 글로브 시슬은 “총알처럼 생긴 둥근 꽃차례”를 가진 식물이라 했다. 그에게 식물은 각자 역할이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우돌프의 정원은 꽃이 가장 예쁜 순간을 모아놓은 장면이 아니라 식물이 태어나고, 자라고, 시들고 남는 전 과정을 편집한 시간의 무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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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틈에서 살아남는 것

비트라 캠퍼스에 정원을 만드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상대는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지은 건물들이었다. 게리의 뒤틀린 흰 벽, 하디드의 날카로운 콘크리트 각도, 헤르조그&드뫼롱이 쌓아 올린 비트라우스의 볼륨. 저마다 강한 언어를 쓰는 건물들 사이에 정원을 심는다는 것은 소음 속에서 조용한 목소리를 내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우돌프는 맞서지 않았다. 다른 논리로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조경 철학에 대해 “나는 정원이 건물이 갖지 못한 모든 것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야생 동물, 나비, 벌, 냄새, 계절감”을 강조한다. 건물은 완성된 순간부터 변하지 않는다. 정원은 반대다. 건물이 완공의 언어를 쓴다면 정원은 시작의 언어를 쓴다. “내 작업이 끝났을 때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나는 최소 10년 후를 생각하며 식재를 구상한다”는 게 우돌프의 말이다.

그는 비트라우스 건물 주변에 식물을 촘촘히 심고, 그 너머 넓은 구역에 풀이 더 높고 거칠게 자라는 야생적인 공간을 만들었다. 150종이 넘는 식물을 썼다. 자갈 산책로에는 직선이 없다. 굽이치고 돌아가다 막힌 것처럼 보이다가 다시 열린다. 우돌프는 “모든 식물이 공동체처럼 함께 작동한다. 일종의 식물들의 공연이다. 각 식물은 자기 역할이 있고, 때로는 중요한 역할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렇지 않기도 하다. 9월에 갑자기 터져 나오는 식물이 있다. 나는 사람들이 정원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길을 잃어버리길 바란다”고 말한다.


정원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연극이다

우돌프는 자신의 정원을 ‘공연’에 비유한다. 봄에 고요히 있던 풀이 여름에 키를 키우고, 가을에 황금빛으로 물들고, 겨울에는 마른 줄기만 남아 서리를 맞는다. 꺾지 않고, 잘라내지 않는다. 꽃이 지고 남는 씨앗의 형태, 씨방이 그에게는 특히 중요했다. 겨울 정원의 마른 에키나케아 씨방, 서리 맞은 억새 줄기, 이것들이 우돌프에게는 완성된 풍경이다.

우돌프는 “내 정원은 우리가 바라는 자연의 모습이지만 실제 자연이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자연처럼 보이지만 자연이 아니다. 수십 년의 연구와 실험 끝에 도달한 ‘설계된 야생’이다. 현장을 처음 방문할 때 이미 식물의 배치가 대략 그려진다고 한다. 어디에 무엇을 심으면 10년 후 어떤 모습이 될지. 경험이 아니라 감각이다.

비트라 캠퍼스에는 4000㎡의 땅에 3만 본의 식물을 심었다. 고사리, 억새, 숙근초, 야생화. 2020년 5월에 심기 시작해 2021년 6월이 돼서야 개방했다. 게리의 뮤지엄이 문을 연 1989년부터 따지면 30년이 지난 뒤였다. 정원은 뒤늦게 도착한 손님이었다.


취향은 전략보다 오래 남는다

비트라 캠퍼스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이곳이 미술관인가, 공장인가, 공원인가. 답은 세 가지 모두다. 가구를 생산하고, 건축을 전시하고, 정원을 산책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비트라의 의자를 판다.

결과적으로 비트라는 ‘임스 의자를 잘 만드는 회사’에서 ‘디자인 문화를 정의하는 회사’로 올라섰다. 캠퍼스 자체가 광고이고 쇼룸이며 박물관이다. 이런 비트라 캠퍼스에서 가장 천천히 완성된 것이 정원이었다는 사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건물들이 차례로 들어서는 동안, 그 사이 공간은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건축은 감탄을 위한 공간이다. 정원은 그 모든 것 사이에서 사람이 머물다 가는 공간이다.

롤프 펠바움이 정원에 이른 것은 30년이 지나서였다. 처음부터 완성된 전략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좋은 의자, 좋은 건축가, 좋은 장소를 알아보는 취향을 오래 밀고 갔다. 그리고 가장 나중에 심은 정원이 그 모든 것을 하나의 풍경으로 묶었다. 가구는 방을 채우고, 건축은 공간을 만든다. 그리고 정원이 시간을 심었다.
  • 신현암

    신현암

    팩토리8연구소 대표

    신현암 대표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경영학)를 받았다. 제일제당에서 SKG 드림웍스 프로젝트 등을 담당했고, CJ엔터테인먼트에 근무했으며,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및 사회공헌실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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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리=백상경

    동아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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