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ategic Communication
프로 협상가들은 말한다. 꽉 막힌 협상을 풀어 내려면 상대가 주장하는 요구(Position)가 아닌 욕구(Needs)에 집중해 창조적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또한 창조적 대안을 만들기 위해서는 번뜩이는 창의성이나 협상 경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성공한 협상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몇 가지 패턴을 알면 누구나 창조적 대안을 만들 수 있다.
지난 DBR 117호에서는 창조적 대안을 만들기 위한 2가지 패턴을 알아봤다. 미래 상황에 대해 나와 다른 예측을 하는 상대와의 협상을 풀어 내기 위한 ‘Bet(내기 걸기)’, 협상의 틀 자체를 바꿔서 양측 모두 만족할 만한 대안을 만들어 내는 ‘Rule Change(규칙 바꾸기)’가 그것이다. 이번 DBR 120호에서는 창조적 대안을 만들기 위해 자주 쓰이는 3가지의 패턴을 더 소개한다.
Add(붙이기)
많은 협상가들이 실수하는 게 있다. 협상을 할 때 한번에 하나의 안건만 처리하려는 것이다. 가격 협상이 끝나야 지불 방법을 협상하고, 그게 마무리돼야 물량을 협상하는 식이다. 이건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다. 긴 협상의 과정에서 하나의 어젠다에 묶여 시간을 끄는 것은 소모적인 낭비일 뿐이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당신이 동료와 점심 메뉴를 놓고 협상을 한다. 당신은 오랜만에 햄버거가 먹고 싶다. 그런데 동료는 뜨끈한 설렁탕이 먹고 싶다고 한다. ‘점심 메뉴’라는 하나의 어젠다로 맞선 상황. 해결이 쉽지 않다. 만약 이때 “돈은 누가 낼래”라는 어젠다를 추가하면 어떻게 될까? 혹은 “내일은 뭘 먹을까”라는 어젠다를 추가한다면? 이렇게 협상의 어젠다를 추가해 동시에 협상하면 문제는 훨씬 쉽게 풀린다.
딱 하나의 어젠다만 갖고 협상해야 할 경우는 거의 없다. 비즈니스 상황은 더더욱 그렇다. 구매 협상을 예로 들어보자. 일반적으로 가장 큰 갈등은 가격 문제에서 생긴다. 이때 프로 협상가들은 가격에 집착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접근한다.
“구매 물량을 지금보다 10% 더 늘리겠다”라거나 “현금 결제를 해 주겠다”는 등 가격 이외의 다른 안건을 제시한다. 만약 상대가 ‘생산 물량을 늘려 전체 매출액을 높이는 것’에 관심이 있다면, 혹은 ‘요즘 대금 결제가 잘 이뤄지지 않아 현금 확보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면 가격을 양보하고 이 조건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처럼 가격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구매 협상에서도 물량, 유통비, 지불방법, 품질, AS 등 가격 이외에 수많은 다른 어젠다를 제시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가격 문제를 풀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창조적 대안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협상 테이블에 나서기 전에 최대한 많은 어젠다를 준비해야 한다.
이 패턴을 실전 구매 협상에서 그대로 활용하는 기업이 있다. 제품의 50% 이상을 ‘1000원’에 판매하는 생활용품업체 다이소다. 외환위기 이후 우후죽순 생겨난 ‘1000원 숍’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다이소. 이 기업의 성장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탁월한 구매 협상력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다이소는 상품 가격을 정할 때 재료 및 제조 원가 등을 따져 기획하지 않는다. 대신 판매가격을 먼저 정한다. 기존 방식과 완전히 반대되는 접근이다.1 이렇게 내부적으로 판매 가격을 정한 후 제조업체를 찾아가 가격협상을 한다. 워낙 저가 판매다 보니 납품 업체와의 협상은 항상 어렵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최소한 800원은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납품 업체, 하지만 다이소 입장에서는 500원에 구매를 해야 마진이 남는다. 300원의 차이. 이때부터 다이소 구매담당자의 협상력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첫 번째는 ‘물량’이다. 대부분의 중소 생산 업체들은 ‘안정적 공급원’을 갖길 원한다. 이 부분에 주목, “다이소와 거래하면 공장 가동률 100%를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한다. 공장 가동률이 100%가 된다는 건 같은 고정비를 투자해 더 많은 물건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다. 결국 개당 생산 단가가 낮아지는 셈. 두 번째는 현금 결제다. 다이소의 박정부 회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음이나 당좌수표는 어떻게 생긴 건지도 모른다”2 고 말했다. 물건을 납품하고도 종종 제때 돈을 받지 못하는 ‘사고’를 겪는 중소업체들에 이것만큼 매력적인 조건은 없을 것이다. 마지막은 ‘핵심 기능에만 집중하기’다. 다이소는 구매를 할 때 4단계의 품질 검증 과정을 진행할 만큼 까다롭게 평가한다. 하지만 꼭 필요한 핵심 기능에 영향을 주지 않는 기능이나 불필요한 디자인, 포장 등은 과감하게 없앤다. 이를 통해 생산 공정을 단순화해 제조 단가를 낮출 수 있다. 결국 처음엔 ‘가격’으로 부딪히지만 ‘물량’ ‘결제 조건’ ‘공정 단순화’라는 또 다른 안건을 붙여서(Add) 다이소는 물론 납품 업체도 만족하는 협상 결과를 만들어 낸다.
하나의 문제만 가지고 진행하는 협상은 주어진 파이를 ‘나누는’ 협상이다. 이렇게 되면 누구도 만족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기 힘들다. 이럴 때 또 다른 협상 안건을 더해라. 서로가 관심을 갖고 있는 다른 어젠다를 추가한다면 나눌 수 있는 파이는 더 커진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처음 원했던 것보다 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협상은 양측이 조금씩 양보해 타협점을 찾는 것이 아니다. 절충점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파이의 크기를 키울 방법을 찾아라. 새로운 어젠다를 추가하는 것, 그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다.
Chop(쪼개기)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사물, 하나의 안건에는 하나의 의미만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프로 협상가들은 다르다. 안건이 갖고 있는 의미를 쪼갠다. 이런 방법을 통해 창조적 대안을 만드는 게 바로 ‘Chop(쪼개기)’이다.
지난 호(DBR 117호)에서 대표적인 창조적 대안의 사례로 살펴본 시나이 반도 반환 협상에서 사용된 원리가 바로 Chop이다. 시나이 반도라는 땅 반환 문제로 10년 넘게 지루한 다툼을 하고 있던 이집트와 이스라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재자 역할을 맡은 미국의 국무장관 사이러스 벤스는 ‘땅’의 속성을 쪼개 문제를 해결했다.
많은 사람들이 땅을 갖는다고 하면 그곳의 군사 주둔권도 함께 갖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벤스의 생각은 달랐다. 땅의 ‘소유권’과 ‘군사 주둔권’을 쪼갰다. 그래서 소유권은 이집트가 갖되 군사 주둔권은 이집트가 아닌 제3국(UN)에 주는 창조적 대안을 만들어 냈다.어떤가? 아직도 하나의 안건에는 하나의 의미만 있다고 생각되는가? 하나의 문제를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 바로 그것이 창조적 대안을 만들기 위한 또 다른 접근의 출발이다.
이 방법은 1990년대 초 김포 쓰레기 매립장 사용권을 둘러 싼 문제에서도 사용됐다.3 김포 쓰레기 매립장은 설계 당시 생활 쓰레기만을 처리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지역 주민들을 설득해 매립 부지로 선정됐다. 그런데 ‘산업 폐기물’을 함께 처리해야 할 상황이 됐다. 지역 산업체들이 산업 폐기물을 처리하지 못해 공장 운영이 불가능한 지경이라며 김포 쓰레기 매립장에 산업 폐기물도 반입하게 해달라는 민원을 넣었다. 주변 쓰레기 매립장들이 포화 상태가 되면서 지역 산업체에서 나오는 산업 폐기물의 처리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듣고 지역 주민들은 ‘약속 위반’이라며 격렬히 반대했다.
“산업 폐기물 처리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시민들과 “공장 가동을 위해 산업 폐기물을 처리해 달라”고 요구하는 산업체가 팽팽히 맞선 상황. 이때 지자체는 고심 끝에 산업 쓰레기가 갖는 속성을 쪼개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지역 주민들이 산업 쓰레기 반입을 반대하는 이유는 ‘산업 쓰레기에서 배출되는 유해 물질’ 때문이라는 이들의 니즈에 주목한 것. 다시 말해 ‘유해 물질’이 문제지 ‘산업 쓰레기’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던 셈이다. 결국 이 문제는 “유해 물질이 포함된 산업 폐기물은 절대 반입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어 해결했다. 실제 산업체에서 나오는 산업 폐기물 중 유해 물질이 포함된 것은 30%도 채 되지 않았다. 결국 쪼개기 전략을 통해 지역 주민의 걱정도 없애고 산업체에는 산업 폐기물 처리의 장을 만들어 줄 수 있었다.
국가나 각종 이해 단체의 손익이 엇갈리는 외교 협상에서도 이 방법은 통한다. 뉴질랜드 제스프리의 키위 수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에서도 그랬다. 열악한 재배 환경 속에서도 꾸준한 기술 개발 등을 통해 키위 시장을 조금씩 키워 가고 있던 한국 키위 생산자 단체. 그런데 세계 키위 공급량의 75%를 차지하고 있는 뉴질랜드 제스프리가 한국에 진출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농민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과일 값 폭락 등으로 어려워진 국내 과일 시장 환경에서 제스프리의 맛 좋고 값 싼 키위가 수입된다면 한국 키위 농가는 밀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 정부는 다양한 안건을 붙여(Add) 협상을 풀어가기 위해 노력했다. 대표적으로 “제스프리의 질 좋은 종자를 싸게 공급해 주겠다” “뉴질랜드 농가와 자매 결연을 맺고 재배 기술을 전수해 주겠다”는 등의 제안을 덧붙였다. 이는 우리나라 키위 재배 농민들에겐 분명 좋은 혜택이었다. 선진 종자와 기술을 배우면 그만큼 경쟁력이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혜택만으로 제스프리의 전면 수입을 허용할 순 없었다. 어차피 한정된 국내 시장에서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제스프리에 밀릴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온 해결책이 바로 ‘기간별 수입량 제한’이었다. 제스프리의 재배지인 뉴질랜드는 남반구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북반구인 우리나라와 계절이 정반대라는 뜻이다. 그리고 정반대인 기후 조건에 따라 키위 생산 시기도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키위가 주로 생산되는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제스프리의 수입 물량을 제한하고 나머지 기간, 즉 제스프리가 많이 생산되는 5월부터 10월까지는 수입 물량을 자유화하는 대안을 만들어 냈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의 키위 농가들은 안정적 시장을 확보할 수 있고 국민들은 키위를 1년 내내 먹을 수 있게 됐다.4 ‘1년’이라는 기간을 쪼개서 만들어 낸 창조적 대안이라 할 수 있다.
상대와 같은 것을 갖기 위해 다투고 있는가? 협상 이슈를 잘게 쪼갤 방법은 없는지 찾아보라. 그리고 그 조각들 중에 나에게 필요 없는 것은 버리고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가져라. 그것이 협상 해결의 실마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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