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건설
현대건설의 인수합병이 우여곡절 끝에 2011년 1월 마무리됐다. 2010년 초부터 범(凡)현대가의 일원인 현대상선·현대엘리베이터 측과 현대자동차 측은 현대그룹의 정통성을 둘러싸고 광고전까지 벌이며 현대건설 인수를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처음엔 5조5000억 원의 인수 금액을 제시한 현대상선 측이 현대건설을 인수하는 듯했다. 현대상선은 2010년 11월 있었던 입찰에서 1순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현대상선은 채권단이 요구한 자금 출처를 증명하지 못해 우선협상자 지위를 박탈당했다. 상황은 이랬다. 인수조건에는 ‘자금조달의 적정성’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재무제표상 현대상선이 자체적으로 보유한 현금은 그리 많지 않았다. 따라서 현대상선은 최소 4조 원 이상의 금액을 외부에서 조달해야 할 것으로 예측됐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자 예측과는 달리 현대상선은 생각보다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자금조달에 별 다른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보유자금 중 이상한 내역이 발견됐다. 프랑스 나티시스은행에 현지 법인이 예치해뒀다는 자금 1조2000억 원이 문제로 불거졌다. 전년도 말 자산규모가 33억 원에 불과했던 작은 현지법인에서 갑자기 1조2000억 원이나 되는 예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설득력이 떨어졌다.
현대건설의 대주주인 채권단은 이 자금이 어떻게 마련된 것인지 밝히라고 현대상선에 요구했다. 현대상선은 이 요청을 거부하고 입찰에서 1위를 했으니 계약대로 현대건설을 넘기라고 주장했다. 채권단은 이 자금이 정상적인 회사의 자기자금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결정을 번복했다. 5조1000억 원을 제시해서 입찰에서 2위를 차지했던 현대자동차에 현대건설을 넘기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고(故) 정주영 회장이 설립하고 현대그룹의 모태가 된 현대건설은 2000년 말 파산한 후 채권단 손에 넘어갔다가 10년 만에 아들 정몽구 회장이 경영하는 현대자동차로 돌아왔다. 현대상선에서 거세게 반발했으나 채권단의 결정은 뒤집히지 않았다.
이후 실제 인수가격은 실사과정에서 발견된 부실자산이 반영돼 4조9000억 원으로 조정됐다. 당초 시장에서 예상되던 현대건설 가치가 4조 원 초반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4조9000억 원이라는 인수대금은 싸지는 않지만 크게 비싸지도 않은 수준으로 볼 수 있다. 인수가격은 당시 시가에 약 70%의 프리미엄을 더한 가격으로 현대건설의 전체 지분 중 35%를 인수하는 금액이다. 참고로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시가에 약 90%대 후반의 프리미엄을 더한 가격으로 2006년 말 대우건설을 인수한 바 있다.
현대건설의 경영권 분쟁과 파산
1947년 고 정주영 회장이 설립한 현대건설은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중동 진출 등에 앞장서면서 국내 제1의 건설사로 우뚝 섰다. 그러다 1990년대 후반 아시아 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위기가 시작됐다. 국내 건설경기가 급속히 위축됐고 시장 이자율이 20%선까지 치솟았다. 이라크에 건설 중이던 공사대금 약 1조 원도 받지 못했다.
악재가 겹치면서 현대건설의 경영상황이 급속히 나빠졌다. 1998년 현대건설은 290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지만 1999년 1200억 원 적자, 2000년 3조 원 적자를 내는 등 적자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현대건설을 감사한 삼일회계법인은 현대건설이 계속기업으로 존속할 가능성이 불확실하다는 감사의견을 발표했다. 1996년 한때 최고 4만 원대까지 올랐던 주가는 2000년 들어 2000원대로 급락했다.
이 와중에 2000년 초 정주영 회장의 세 아들이 현대그룹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해 분쟁을 벌이면서 현대그룹에 대한 평판이 급속히 나빠졌다. 고 정주영 회장이 2선으로 물러난 후 현대그룹은 정몽헌 회장의 현대건설/현대아산/현대상선/현대전자/현대증권 계열, 정몽구 회장의 현대자동차 계열, 정몽준 회장의 현대중공업 계열로 크게 삼(三)분된 상태였다. 그런데 정몽헌 회장의 계열사 경영 상황이 악화하면서 자금이 필요한 정몽헌 회장에 대항해 정몽구 및 정몽헌 회장이 반발했고 이는 소위 현대가(家) ‘왕자의 난’이라고 불리는, 형제들 사이의 경영권 분쟁으로 비화됐다.
이런 분란이 발생하기 전만 해도 사실 정부는 정몽헌 회장 측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몽헌 회장은 정부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1999년 말 거의 전액 부채로 조달한 자금 2조6000억 원으로 LG반도체를 인수,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에 합병시키기도 했다. 정부의 역점사업인 대북사업도 정몽헌 회장 측 계열사인 현대아산이 주도하고 있었고 당시 외부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2000년 발생한 4억5000만 달러의 대(對)북한 비밀 송금이나 고위 정치인들에 대한 수백억 원대의 비자금 제공 등도 모두 정몽헌 회장 측 계열사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현대그룹에 대한 여론이 급격히 나빠지자 정부도 현대 측을 보호할 수만은 없었다. 1999년 말 대우그룹 전체가 워크아웃에 돌입해 김우중 회장이 경영권을 박탈당하고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현대그룹만 계속해서 보호해 줄 명분이 없었다. 2000년 중반이 되자 정부도 적극 나서서 현대 계열사들을 압박하며 구조조정을 요구했다. 그중에서도 경영 상황이 가장 나쁜 회사가 현대건설과 현대전자였다. 2000년 중반 산업은행은 현대전자를 인수해서 현대그룹으로부터 분리시켰다. 이후 현대전자는 사명을 하이닉스반도체로 바꿔 현대라는 이름을 떼어냈다.
당시 노환으로 투병 중이던 정주영 회장은 이라크 공사대금 연체로 큰 위기에 처한 현대건설을 살리기 위해 통 큰 결단을 내렸다. 2000년 11월 자신이 보유한 현대건설 회사채 1700억 원을 자본금으로 출자전환한 것이다. 즉 부채를 줄이고 그만큼 새로 발생한 주식과 부채를 교환했다. 또 783억 원을 추가로 회사에 출자하고 현대건설이 보유하고 있던 계열사 지분을 시장에 매각해 3431억 원의 자금을 마련했다. 이런 방법을 거쳐 마련한 자금으로 2000년 말까지 현대건설은 총 1조1700억 원의 부채를 상환하거나 출자전환을 통해 감소시켰다. 그러나 2000년 말 기준 현대건설의 유동부채는 무려 6조8000억 원, 자본은 -8572억 원, 2000년 당기순손실은 3조 원에 달했다. 더 이상 회사를 유지할 수 있는 형편이 안 됐다. 그 결과 현대건설은 2000년 12월30일 만기가 돌아온 기업어음 224억 원을 상환하지 못하고 파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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