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좀처럼 수습되지 않고 있다. 수십 년에 걸쳐 나타날 피해 규모는 금액으로 환산 가능한 것만 따져도 수십 조 원에 이를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원전사고가 이처럼 심각한 단계로까지 악화된 이유 중 하나로 미흡한 초기 대처를 꼽는 전문가들이 많다. 사태 초기에 바로 바닷물을 주입했더라면 폭발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에 대해 원전 운영사인 도쿄전력은 매뉴얼대로 대처했을 뿐이라며 바닷물 주입은 매뉴얼에 없었다고 답했다. 도쿄전력의 매뉴얼에 이번 대지진과 같이 예상을 뛰어넘는 대규모의 자연재해에 대처하기 위한 규정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매뉴얼이 미흡하다는 점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모든 가능한 사고에 대한 대처 방법을 전부 매뉴얼로 만드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또 항상 매뉴얼대로 따르는 게 최선의 해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때로는 상황을 빠르게 판단하고 매뉴얼에는 없는 창의적 대처를 할 수 있는 역량도 필요하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매뉴얼에 대한 지나친 의존이 얼마나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보여준 사례다. 이는 특히 일본, 한국 등과 같이 ‘불확실성 회피도(uncertainty avoidance)’가 높은 나라일수록 더욱 경계해야 하는 일이다. 불확실성 회피도는 마스트리히트대 국제경영학 및 조직인류학 교수를 역임한 세계적인 학자인 기어트 호프스테드(Geert Hofstede)가 각국의 문화를 분류하는 데 활용한 5가지 기준 중 하나로, 모호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불확실성을 견디는 정도를 나타낸다.
그가 분류한 53개국 중 일본은 7위, 한국은 17위로 주로 아시아권 국가들의 불확실성 회피도가 높지만 그리스, 프랑스, 스페인 등 일부 유럽 국가들의 불확실성 회피도도 높은 편에 속한다. 반면 스웨덴, 영국, 미국, 싱가포르, 홍콩 등은 불확실성 회피도가 낮은 나라로 분류됐다. 미국 텍사스대 경영대학의 마이크 펭 석좌교수는 불확실성 회피도가 높은 나라의 의사결정자들은 매뉴얼과 같은 규칙과 규정에 의존하는 경향이 높다고 말한다. 반면 불확실성 회피도가 낮은 나라일수록 상대적으로 경험과 훈련을 중시한다고 한다.
1998년 스위스에어 비행기 추락 사고도 지나치게 매뉴얼에 의존하다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 사례다. 사고 비행기는 이미 내부에 연기가 가득 차 비상 착륙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비행기의 조종사는 기수를 바다로 돌렸다. 매뉴얼에 따라 비상 착륙 시 폭발할 위험이 있는 연료를 바다에 버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비행기는 바다에 추락했고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이 결과를 두고 미국 등 서구의 전문가들은 “규칙이란 비상 상황에서는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며 비행기 내에 연기가 감지되자마자 비상 착륙을 시도해야 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스위스에어 경영진은 “매뉴얼은 바로 이 같은 비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며 사고 비행기의 조종사를 옹호했다. 미국은 불확실성 회피도가 낮은 대표적인 나라다. 반면 스위스는 서구 국가들 중에 상대적으로 불확실성 회피도가 높다.
어떤 비극적 사건도 지나고 나면 왈가왈부하기 쉽다. 하지만 실패를 곱씹고 그로부터 배우는 일은 미래에 닥쳐올 비극을 막거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수많은 크고 작은 지진에 시달려 온 일본보다 한국의 사고 대처 매뉴얼이 잘 갖춰져 있을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사고 대응 인력의 경험과 교육 훈련 수준, 창의적 대처능력은 더욱 미흡할 것이다. 한국 원전 설비의 안전성이 더 높다고 주장하지만 그 한계를 뛰어넘는 대규모 자연재해나 테러가 발생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시설을 보강하고 매뉴얼을 정비하는 데 그쳐서도 안 된다. 외국의 전문가를 데려와서라도 교육 훈련을 강화하고 부족한 경험과 역량을 보완해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감당할 수 없고 관리할 수도 없는 위험(uncontrollable risk)은 보유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한인재 경영교육팀장 epici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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