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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공신, 친인척까지 숙청한 태종의 칼날 하륜만 비켜간 이유는?

김준태 | 152호 (2014년 5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 HR, 인문학

 창업기의 재상은 언제나 위태로운 자리다. 대업을 함께 이루는 과정에서 쌓은 재상의 지분이 왕권 강화에 방해가 되고 재상이 가진 뛰어난 재능도 군주에게는 의심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 정도전 숙청 이후, 태종 이방원과 함께 조선의 설계도를 마저 그려나간 재상 하륜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상사인 태종의 철학과 성격, 업무스타일 등을 이해하고 그에 맞춰 자신의 이상을 펼쳐나갈 줄 아는 지혜가 있었다. 친인척과 공신을 가리지 않고 휘두르던 태종의 칼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다.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1398년 여름, 어느 집에서 떠들썩한 잔치가 열렸다.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된 집주인을 환송하는 자리였다. 집을 가득 채운 손님 중에는 임금의 다섯 째 아들인 정안군도 있었는데 그가 집주인에게 술잔을 건네니 술에 가득 취한 집주인은 비틀거리다가 그만 술상을 정안군 쪽으로 엎어버렸다. 옷이 잔뜩 더럽혀진 정안군이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자 놀란 집주인은왕자께서 노하시어 가셨으니 얼른 가서 사죄를 드리고 오겠다라며 뒤따라 나섰다.

 

사저로 돌아온 정안군은 자신을 쫓아온 집주인에게 짐짓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엇 때문에 왔는가?” 그러자 집주인은 언제 술에 취했었냐는 듯 차분하게 대답했다. “지금 왕자께서 처해 계신 상황이 매우 위태롭습니다. 제가 술상을 엎은 것은 장차 있을 경복(傾覆)1  할 환란에 대해 따로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정안군이 몸을 바로하며 대책을 물으니 집주인은신은 충청도로 부임하라는 어명을 받았기 때문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마침 안산군수 이숙번이 정릉(貞陵)2 을 이장할 군사를 거느리고 한양에 와 있으니 이 사람에게 대사를 맡기시면 될 것입니다. 신 또한 진천(鎭川)에서 대기하고 있겠사옵니다. 일이 시작되면 신을 부르소서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얼마 후인 1398 826. 정안군은 이숙번의 지원을 받아 정도전 등 자신의 반대세력을 숙청했다. 이것이 1차 왕자의 난이다. 이날 정안군은 경복궁 남문 앞에 군막을 치고 정변을 지휘했는데 자신 옆에 장막을 하나 더 설치하도록 했다. 누구를 위한 군막인지 사람들의 궁금증이 더해질 무렵, 충청도로 내려갔던 집주인이 나타나 당연하다는 듯 그 가운데 앉았다.3

 

하륜, 정도전 이후 조선의 설계를 맡다

이 집주인이 바로 이번에 다룰 하륜(河崙, 1347∼1416)이다. 하륜은 여러모로 정도전과 비교된다. 두 사람 모두 조선왕조 건국 초기에 각종 법과 제도를 기획·설계하고 국가 시스템 구축을 주도한설계자형재상이다. 두 사람은 각각 태조와 태종이라는 두 창업군주의 핵심참모였으며 그 치세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불세출의 경세가, 비운의 혁명가라는 이름을 얻고 있는 정도전에 비해 하륜은모사’ ‘책사의 이미지가 강하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사극정도전을 보면 하륜은 고려 말의 권세가 이인임의 측근으로 정도전의 대척점에 서서 책략을 주도한다. 아마도 후반부에 가면 태종의 책사가 돼 정도전을 좌절시키는 역할로 그려질 것이다.

 

이러한 하륜의 이미지는 분명 사실(史實)에 근거한 것이기는 하다. <용재총화(?齋叢話)>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과 같은 사료들도 하륜을 같은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다.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은 하륜을 두고아름다운 모책이나 은밀한 의논을 임금에게 아뢴 것이 대단히 많았고 물러 나와서는 이를 절대 남에게 누설하지 않았다고 묘사하는데 여기서도 그가 막후 책략가적인 면모가 강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륜을 어딘가 정당하지 못한 음지의 인물로만 단정해서는 안 된다. 방향과 태도, 방법의 차이가 있었을 뿐 그 역시 성리학적 이상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유학자였고4  학문이나 정치력 모두 정도전에게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정도전이 조선의 문물과 제도를 설계했다고 하지만 그는 건국 7년 만에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죽음을 맞이했다. 자신의 구상을 온전히 구현해내기에는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다. 더욱이 아직 채 기틀이 잡히지 못했던 조선도 뛰어난 설계자를 계속 필요로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륜이 정도전의 빈자리를 메우게 된 것이다. 정도전이 구상했던 사회개혁의 폭과 깊이를 좁혀 놓았다는 비판이 없지는 않지만 이후 조선의 근간이 된 통치체제, 신분제도, 인재선발제도, 사회운영제도 등은 모두 하륜의 손을 거쳤다.

 

그런데 지난 호에서 조준을 다루면서 창업기의 재상은 매우 위태로운 자리라고 말한 바 있다. 대업을 함께 이루는 과정에서 쌓은 재상의 지분이 왕권 강화에 방해가 되고, 재상이 가진 뛰어난 재능도 군주의 의심하는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업기의 재상들 중 상당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정도전이 대표적인 예다. 지난 글에서 살펴봤듯 조준은 그 칼날을 피하기 위해 우유부단한 실무형 재상으로 스스로를 탈바꿈시켰다. 이런 점에서 하륜은 상당히 독특하다. 정치판을 뒤흔들고, 정변을 성공시킬 정도의 뛰어난 지략을 지녔으며,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힘을 행사했지만 그는 자신의 주군인 태종으로부터 변함없는 신뢰와 보호를 받았다. 왕권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공신뿐 아니라 처남이나 사돈까지도 과감히 제거해버렸던 태종이었기에 이는 더더욱 의외다.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하륜의 생애를 따라 가보며 해답을 찾아보기로 하자.

 

 

 

1347년에 태어난 하륜은 진주(晉州) 사람으로 호는 호정(浩亭)이다. 그는 자신의 문집인 <호정집>에서 집안의 내력을 설명하며 과거시험에 대대로 급제한 명문 사족임을 강조했는데 실상은 증조부·조부·부 모두 과거에 급제한 기록이 없고 벼슬 역시 하급 관원에 그쳤을 뿐이다.5  1377(우왕 3)에 부친 하윤린이 순흥부사를 지낸 것도 당시 대사성(大司成)이었던 하륜 본인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1365(공민왕 14) 19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한 하륜은 당대 최고의 정치가 이인복(李仁復), 대학자 이색(李穡)좌주­문생(座主-門生)’의 관계를 맺게 된다. 여기서좌주란 과거시험의 책임자를 지칭하는 것이며 문생은 급제자를 말한다. 고려시대에는 과거급제자가 자신을 선발해 준 시험관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이좌주-문생은 단순한 사제관계를 넘어 끈끈한 유대를 지닌 정치세력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더욱이 이때 이인복은하륜을 한번 보자마자 그의 재주를 놀랍게 여겨서 아우 이인미(李仁美)의 딸로 아내를 삼게 했다고 한다. 권문세가인 성산 이 씨 집안의 사위가 되고 사대부를 대표하는 이색과 사제 간의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하륜은 막강한 정치적 백그라운드를 얻게 된 것이다.

 

그는 1367년 춘추관 검열을 시작으로 1379년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1384(우왕 10)에는 밀직제학에 오른다. 하륜이 밀직제학으로 있을 때 그의 모사적인 면모가 주목받은 사건이 하나 있었다. 북원이 고려에 보낸 사신을 명나라가 체포하려 하자 고려조정은 김득경에게 지시해 명나라군을 공격하게 했다. 이에 대해 명나라가 문책하며 김득경의 압송을 요구하니 조정은 김득경에게 독단으로 저지른 일이라고 증언해 줄 것을 요청했다. 희생양이 돼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득경은 거부하고 사실대로 밝히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고려조정은 당혹스러워했다. 자칫 명나라로부터 군사적 응징을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하륜이 계책을 내놓는다. 그는권도(權道)6 가 필요한 상황이라며 지금 곳곳에서 왜구가 창궐하고 있으니 왜구의 핑계를 대자고 했다. 왜구를 가장해 김득경을 암살하고 명나라에는 왜구의 침입 때문에 김득경이 살해됐다고 보고하자는 것이다. 결국 고려조정은 하륜의 책략을 따랐고 사건의 당사자가 사라지면서 명나라도 더는 문책을 하지 못했다.

 

승승장구하던 하륜은 1388, 최영과 이성계에 의해 권신 이인임이 제거되면서 시련을 겪게 된다. 이인임의 인척7 이라는 이유로 유배된 것이다. 이후 그는 몇 번의 유배와 해배를 반복하면서 정치적으로 불우한 시간을 보냈다. 또 다른 스승인 이색과 행동을 같이하면서 역성혁명에 반대했고, 정몽주와 함께 고려왕조의 존속을 위해 노력하지만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는 않는다. 그러다 조선이 건국하고 1393(태조 2) 913, 고려의 신하들을 포용하려는 태조의 결정에 따라 경기좌도관찰출척사(京畿左道觀察黜陟使)에 임명되면서 하륜은 조선의 조정에 출사한다. 처음에는 조선의 건국을 반대했지만 이미 조선이 건국한 이상 변화한 대세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륜의변통론(變通論)’과 기업경영참조.)

 

하륜의변통론(變通論)’과 기업경영

하륜은 세종으로부터시기를 알고 변통할 줄 아는 자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평생변통을 강조하고 실천했다. 전통사회에서 개혁의 논리로 활용돼온변통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 나오는 개념으로 그 바탕에는 수시변역(隨時變易, 때에 따라 바뀌고 고쳐진다)과 인시제의(因時制宜, 상황에 맞는 올바름을 찾는다)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는일을 하는 데는 모름지기 변통이 중요한데썩어빠진 유학자들이 옛것에 얽매어 변통을 알지 못한다며 능동적인변통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러한 변통은 무조건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결코 바꾸어서는 안 될 대의, 가치, 정신은 분명히 존재한다. 바꿔서는 안 될 소중한 것들을 온전히 지켜내기 위해, 그 전략과 방법을 변화된 환경에 맞게, 때에 맞게 변통시키자는 것이다.

 

 

조선의 개국에 반대했다가 다시 참여한 하륜의 행동도변통의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는예로부터 이란(理亂)이 순환하는 것은 천수(天數)의 성쇄와 인사(人事)의 득실이 서로 관련돼 그런 것이다i 고 했다. 여기서이란은 치세와 난세가 교차한다는 맹자의일치일난설(一治一亂說)’에서 따온 것으로 시대적 상황과 인간의 행위가 맞물려서 왕조의 순환, 역사의 변화가 온다는 것이다. 만물이 때에 따라 바뀌는 것은 천지의 항상 된 법칙이므로(<주역전의(周易傳義)> ‘항괘(恒卦)’) 일정한 것에 고착돼 있으면 그것은 오래 유지될 수 없다. 따라서 시대 상황에 걸맞은 마땅함을 찾아 적절하게 변화시켜 나가야 하는 것인데, 이와 같은변통의 논리가 당시 여말선초의 상황 속에서도 적용된다는 것이 하륜의 생각이었다. 이렇게 볼 때 조선의 건국은 순리이며 조선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천리를 거부하는 일이 된다. (물론, 고려에 대한 충성의 윤리에서 보자면 이것은 자기변명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유교사상대로라면변통에 따른 변화된 올바름의 기준은 하늘이나 성인(聖人)만이 정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윤리도덕적인 문제에 있어서변통은 개인의 주관에 의해 합리화의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이러한변통의 이념은 오늘날 기업의 경영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업이 같은 시장 안에서, 동일한 고객을 대상으로, 같은 상품을 가지고, 같은 방식만 고집한다면, 결코 성장하지 못한다. 더욱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과 불확실성의 심화는 현상유지를 택하는 기업을 퇴보의 길로 내몰 것이다. 따라서 대내외 환경 변화에 민첩하고도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 다양한 시각과 새로운 프로세스로 스스로를 계속 업그레이드하며 신성장 동력을 찾아내야 한다. 그래야 기업의 창업정신도 더욱 발전시켜 구현해낼 수가 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혁신역량을 높이고 새로운 시장을 발굴하며, 우수 연구 인력을 확보해 스마트화, 그린화와 같은 창조적인 도전을 시도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전제돼야 할 것이 있다. 모든 구성원들이 변화의 비전과 변화의 당위성을 공유하는 것이다. 가치와 중심을 굳건하게 지키면서도 기존의 방식이나 생각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며 늘 새로운 시각과 도전의 자세로 능동적인 변화를 즐기라는변통’의 가르침이 필요한 이유다.

 

이후 태조의 재위 기간 동안 하륜이 정치적으로 주목받은 것은 두 번이다. 개경을 떠나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그는 풍수지리에 관한 해박한 논리로 계룡산 천도작업을 중단시켰다.8  하륜은 무악(毋岳)9 으로 도읍을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다수의 반대에 밀려 채택되지 못한다. 다음으로 명나라가 조선에서 보내온 표전문(表箋文)을 문제 삼으며 이 글을 교정한 정도전을 소환하라고 하자 그는 명나라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정도전은 가지 않았고 오히려 하륜이 사신으로 파견돼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온다. 그의 외교적인 역량이 과시됐던 기회였다. 하지만 정치적 입지를 키우고자 했던 하륜의 노력은 그다지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태조의 조정은 어디까지나 정도전의 조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도전이 존재하는 한 포부를 펼칠 수 없다고 생각한 하륜은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실현시켜 줄 새로운 주군을 찾게 된다. 바로 태종 이방원이다.10

 

태종의 참모가 된 하륜은 1398(태조 7), 태종의 권력획득을 위해 정도전 세력에 대한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서두에서 소개한 1차 왕자의 난을 벌인 것이다. 그는 이때 세운 공로로 정사 1등공신(定社一等功臣)에 올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2차 왕자의 난이 벌어졌을 때는 신속히 임금 정종의 지지를 이끌어내 반군을 무력화시켰다. 그러면서 또다시 좌명 1등공신(佐命一等功臣)에 봉해진다. 이후 하륜은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가 돼 조선의 관직제도를 새롭게 정비했으며 태종이 안정적으로 권력을 승계할 수 있도록 정지작업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태종이 조선의 세 번째 군주로 즉위하게 되면서 하륜은 재상이 된다. 그는 좌정승과 영의정부사를 12년간 지내며 태종조의 정국운영과 정책결정 과정을 주도했다.

 

‘의심 많은 왕태종의 칼이 하륜만은 피해간 이유

익히 잘 알려져 있다시피 태종은 왕권강화와 후계자 보호를 위해 자신의 측근들을 가차 없이 숙청한 군주다. 자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헌신을 하고 공을 세웠는지, 자신과 얼마나 가까운 친척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측근들을 계속 의심했고 왕권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곧바로 매서운 칼날을 휘둘렀다. 태종의 권력 획득 과정에 크게 기여한 이거이와 이저 부자, 병력동원의 공로자 이숙번이 삭탈관직을 당한 채 귀양을 갔고 심지어 핵심공신이었던 처남들에게는 자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일하게 변함없는 비호를 받은 것은 하륜뿐이다.

 

그는 태종의 처남 민무구, 민무질이 숙청당할 때 연루됐지만 경고를 받는 것으로 끝났고 최대의 정치적 위기였던이색(李穡) 비문사건에서도 살아남았다. 이 사건은 하륜과 권근이 그들의 스승 이색을 위해 쓴 행장(行狀)과 묘지명에 태조 이성계를 비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대간들의 탄핵에서 시작됐다. 당시 권근은 이미 사망한 후였기 때문에 비난의 화살은 하륜에게 집중됐다. 하륜이 쓴 묘지명에공양왕이 즉위하자 공이 자기에게 붙지 않은 것을 꺼리던 자가 있어 공을 탄핵하여 장단현(長湍縣)으로 폄척하였다11 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서꺼리던 자가 이성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자칫 태조에 대한 반역으로 몰릴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에 대해서 하륜은 자신이 언급한 것은 태조가 아니라 정도전과 조준이라며 네 차례에 걸친 장문의 변호 상소를 올렸다. 태종은 그의 장황한 변명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이를 수용하면서 하륜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후 1416(태종 16)에 그는 70세의 나이로 관직에서 물러났고 같은 해 함길도로 선왕의 능침(陵寢)을 순시하러 갔다가 도중에 병을 얻어 사망한다.

 

그렇다면 태종의 숙청에서 하륜만이 예외가 됐던 이유는 무엇일까. 창업기의 다른 설계자형 재상들과는 달리 하륜은 어떻게 의심 많은 군주의 비호를 받으면서 무사히 생을 마감할 수 있었을까.

 

 

우선, 하륜은 부를 탐한다는 평을 받았다. 국유지가 민간에 풀리자 사위들을 보내 선점했고, 무단으로 백성들을 동원해 간척사업을 실시, 그 땅을 자신의 것으로 사유화해버리기도 했다. 뇌물을 받는 일도 매우 많았다. 이것은 물론 도덕적으로는 비난받을 일이다. 하지만 처세에 있어서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의 노장 왕전(王?)이 국가의 전 병력을 동원한 60만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 정벌에 나설 때 왕전은 진시황제에게 훌륭한 논밭과 택지와 정원과 연못을 내려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출정을 한 뒤에도 몇 차례나 사람을 보내 좋은 논밭을 내려달라고 청한다. 주위에서 이를 보고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냐고 물으니 왕전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왕은 본래 포악하고 다른 사람을 믿지 않소. 그런데 지금 진나라 군사를 모두 나에게 맡겼소. 내가 자손을 위한 재산을 만들려고 많은 논밭과 정원과 연못을 요청함으로써 다른 뜻이 없음을 보여 스스로를 안전하게 하지 않는다면 왕은 나를 계속 의심할 것이오.”12  비슷한 장면이 한나라의 건국 재상 소하(蕭何)에게서도 보인다. 백성들이 소하를 의지하고 민심이 소하를 향하자 한 고조 유방은 소하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에 소하는헐값으로 백성들의 땅을 강제로 빼앗아 스스로의 명성을 더럽히라는 참모의 조언을 받아들였고 유방은 소하에 대한 의심을 풀었다고 한다.13

 

물론 하륜의 탐욕이 왕전이나 소하와 같은 고도의 계산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재물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결과적으로 보면 하륜은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 태종의 의심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재물에만 신경 쓰고 탐욕으로 인해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재상이 왕권을 위협할 걱정은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하륜은 후계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신하였다. 아무리 충성스러운 신하라도 임금의 사후에 다음 대의 왕에게까지 변함없는 충성을 바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신하가 가진 탁월한 능력과 힘도 그것을 적절히 제어할 수 있는 군주에게나 의미가 있는 것으로, 만일 후계자가 이를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왕권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더욱이선왕의 신하는 기본적으로 후계자에게 부담스러운 존재다. 나이나 경륜이 한참 위일 뿐만 아니라 선왕의 결정과 법도가 임금이 따라야 할 가장 중요한 규범으로 작동하는 시스템 속에서 그 결정과 법도를 정할 때 함께 참여한 선왕의 신하는 얼마든지 왕권을 제약할 수 있는 논리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래서 군주들은 왕위를 물려주기 전에 자신의 신하들이 후계자에게도 충성을 바칠 수 있도록 윤리적 의무감이라는 기제를 설정한다. 임금으로부터 뒷일을 부탁받는고명(顧命)’이 대표적이다. 또는 자신의 신하들이 후계자의 은혜를 입도록 함으로써 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 명분을 새 임금에게 쥐어 주는 경우도 있다. 태종이 황희를 귀양 보냈다가 세종으로 하여금 다시 등용하게 함으로써 황희가 세종의 성은을 입게 한 것이 그 예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이 통하지 않는 신하, 후계자가 감당할 수 없거나 후계자에게 부담을 줄 만한 신하들에 대해서는 차제에 제거해버리곤 한다. 태종이 처남들과 핵심측근인 이숙번을 숙청시킨 것처럼 말이다. 이때 하륜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하륜의 나이가 태종보다 스무 살이나 많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륜이 먼저 죽을 확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설령 오래 살더라도 연로해 힘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후대 임금에게 하륜이 미칠 영향에 대해서 경계할 필요가 없었다.

 

이는 하륜의 입장에서도 홀가분한 문제였다. 권력을 유지하고 싶은 욕망에서건, 자신의 이상을 계속 실현시키고 싶은 바람에서건 간에 신하는 후계자와의 관계 설정이 아주 중요하다. 좋은 관계를 맺어놔야 다음 대에도 자신의 정치적 역할 공간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주가 노쇠해질수록 미래 권력에 대한 줄서기, 눈치 보기가 시작되곤 했다. 정도전은 아예 미래 권력의 후견인이 됨으로써 정국을 계속 주도하고자 했지만 자신이 지지한합법적 미래 권력(세자)’보다 더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실질적 미래 권력(이방원)’에 의해 패배하게 된다. 이에 비해 하륜은 미래 권력의 향방이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임무는 태종의 시대에 끝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은 그저 태종과의 관계에만 집중하면 됐던 것이다.

 

끝으로 하륜은 군주인 태종이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륜은 군주중심의 통치체제를 확립하고자 했다. 이는 태종의 뜻과 일치한다. 그는 정도전이 주장한군신공치에 대해어찌 정승이 왕과 함께 다스리겠습니까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다.물론 그렇다고 그가 재상 제도 자체를 무력화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하륜은의정부상규설(議政府相規說)’ ‘경회루기(慶會樓記)’ 등의 글을 통해서 중국의 역대 훌륭한 재상과 나쁜 재상의 사례를 열거하고 재상이 군주를 어떻게 보좌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화복(禍福)이 결정된다고 말한다. 다만 그는 재상의 역할에 있어서보좌(補佐)’자문(諮問)’에 강조점을 뒀다. 문무재상들의 합좌기구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혁파, 육조직계제(六曹職階制) 실시 등 그가 추진한 군주 중심의 중앙집권적 정책들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왔다. 육조직계제를 실시한 것은 재상이 군주를 보필하고 자문하는 데 힘써야지 자질구레한 서무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명분이었지만 육조를 군주가 직접 관장함으로써 재상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하륜이 군주의 학문인심학(心學)’을 강조한 것, ‘좌주문생제를 혁파하고중시법(重試制)’을 실시한 것도 군주중심의 통치체제 확립과 관련이 있다. 좌주문생제의 혁파는 좌주-문생 간의 사적 네트워크가 정치적 당파로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모든 과거 합격자는 좌주가 아닌 군왕과 국가에 성심을 다하고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인식이 담겨 있다. 중시법은 하륜이 처음 고안해 시행한 것인데 종3품 이하의 관원들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학업능력평가시험이다. 표면적으로는 학문을 장려하고 문풍을 진작시키려는 목적이었지만 왕이 직접 고열(考閱)해 그 순위를 정하게 함으로써 신하들에 대한 군왕의 지배권 강화에도 기여했다.

 

이처럼 군주 중심의 통치체제를 확립하고 그것의 이론적·제도적 틀을 완성시켜 준 하륜은 절대왕권을 꿈꿨던 태종에게 매우 고마운 존재였을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대신 나서서 주도해줬을 뿐 아니라 견고하고 세밀한 시스템까지 구축해줬으니 말이다.

 

 

기업의 임직원들에게 주는 교훈

하륜은 자신과 주군 태종과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관리했다. 군주의 눈치를 보고 아첨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과 임금, 국가 모두를 위한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 의식적으로 관계를 관리한 것으로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어떤 일을 잘 수행하려면 상사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1인자를 상사로 두고 있는 2인자는 더더욱 그렇다. 어떻게 관리하고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1인자가 가진 권위와 막강한 힘을 유용하게 활용해 가며 큰 성과를 이뤄낼 수가 있다.

 

상사를 잘 관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륜이 보여주듯이 무엇보다 상사의 특성과 업무 스타일, 욕구를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과 상사 모두가 윈윈할 수 있는 협력 방식을 구축할 수 있다. 하륜은 의심이 많은 상사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의 힘을 약화시켰다. , 의견을 제시할 때는 단독으로 은밀히 진언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것은 공식적인 회의보다는 개인적인 통로를 통해 정보가 전달되는 것을 선호한 태종의 스타일에 맞춘 것이다.하륜은 아첨만 하는 신하고, 태종은 신하의 충언은 듣지 않는 독단적인 군주여서 그런 것은 아니다. 하륜도 태종의 의견에 강하게 반대하고 직언을 해서 태종의 입장을 바꾸게 한 경우가 많았다. 다만 공개적인 자리를 택하지 않았을 뿐이다. 신하들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였지만 동시에 군주의 권위를 매우 중시했던 태종의 성향상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의견을 제시해 입장을 바꾸도록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또한, 하륜은 상사인 태종이 가졌던 목표와 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추진한 정책과 각종 기획들을 그 목표의 대전제 아래에서 추진함으로써 태종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이끌어내게 된다.

 

이처럼 하륜은 1인자이자 상사인 태종과의 관계를 잘 관리함으로써 자신의 생존뿐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까지 변함없이 유지할 수 있었다. 자신이 계획했던 일들도 현실 속에서 구현해낼 수 있었다. 이러한 하륜에 대해 군주의 총애를 믿고 권력을 전횡한다는 비판이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하륜은결단하고 계책을 정함에 헐뜯거나 칭송한다고 하여 조금도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자신을 정도전에 비유하며 독선으로 인해 환난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친구 민제의 경고에 대해서도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오. 옛사람들도 바른 도리를 가지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요행히 죽음을 면한 사람도 있소. 후세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판단해 줄 것인데, 내 무엇을 두려워하겠소?”14 라는 태도를 보인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a@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한국 철학을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를 거치며 10여 년간 한국의 정치사상과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공부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 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트위터에서 세종(@SejongDaeWang)과 정조(@King_Jeongjo)의 가상 계정을 운영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저서로 트위터에 게재한 내용과 주간지에 연재한 역사 칼럼세종과 정조의 대화를 보완해 엮은 <왕의 경영>, 올바른 리더십의 길에 대해 다룬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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