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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암의 정원 읽기

황제의 공원에서 명품의 성지로…
루이뷔통은 왜 정원을 선택했나

신현암,정리=백상경 | 443호 (2026년 6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파리의 자르댕 다클리마타시옹은 나폴레옹 3세의 손에서 시작했다. 런던 하이드파크를 모델 삼아 조성한 시민을 위한 공공 공원이자 이국적인 동물을 선보이던 ‘제국의 쇼윈도’였다. 그러나 전쟁 이후 소유권을 넘겨받은 섬유 재벌들의 거듭된 파산 속에 황제의 원대한 꿈을 담은 정원은 몰락했다. 1984년 디올을 인수한 베르나르 아르노의 손에서 상황은 반전됐다. 디올 인수 과정에서 우연히 이곳의 운영권을 넘겨받은 아르노는 뜻밖의 자산을 방치하지 않았다. 역사적인 조경을 복원해 시민들의 휴식처로 삼고 그 안에 문화 랜드마크 ‘퐁다시옹 루이뷔통(FLV)’을 건립했다. 이는 루이뷔통을 ‘파리의 문화 지형에 기여하는 위대한 문화 기관’으로 격상하는 치밀한 브랜드 전략이었다.



하이드파크를 넘고자 했던 나폴레옹 3세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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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수도 파리에는 두 개의 허파가 있다고들 한다. 파리 서쪽의 불로뉴 숲(Bois de Boulogne)과 동쪽의 뱅센 숲(Bois de Vincennes)이다. 파리의 면적은 약 105㎢. 서울의 6분의 1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가운데 불로뉴 숲과 뱅센 숲이 각각 약 8㎢, 10㎢를 차지한다. 두 숲을 제외하면 파리의 실제 도심 면적은 87㎢ 남짓이다. 파리를 여행할 때 ‘참 아담하구나’ 하고 느끼는 이유는 그만큼 도시가 작기 때문이다.

불로뉴 숲 안에는 자르댕 다클리마타시옹(Jardin d’Acclimatation)이라는 정원이 있다. 우리말로 옮기면 ‘순화(馴化)의 정원’쯤 된다. 이름이 특이하지 않은가? 여기에는 흥미로운 사연이 있다.

1855년, 나폴레옹 3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초청으로 런던을 방문했다. 황제 부부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하이드파크였다. 시민 누구나 마음껏 거니는 넓은 공원. 파리에도 이런 공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귀국 후 황제는 불로뉴 숲 전체를 영국식 정원으로 바꾸는 대공사를 시작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보자. 프랑스 정원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마 베르사유 정원일 것이다. 직선 축, 기하학적 대칭, 토피어리, 반듯하게 깎은 잔디, 분수. 자연을 인간의 이성으로 완전히 지배하고 통제한다는 철학이 깔려 있다. 프랑스식 정원은 절대왕정 시대 루이 14세의 미학이었고 18세기까지 유럽 전역이 이를 흉내 내려고 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럼에도 나폴레옹 3세는 왜 하이드파크에 시선이 꽂혔을까? 베르사유 정원은 왕이 내려다보는 정원, 즉 감상 위주의 정원이었다. 반면 나폴레옹 3세가 만들려 한 것은 시민이 산책하고 뛰어노는 공공 공원이었다. 자연스럽게 걷고 쉬기에는 구불구불한 영국식 정원이 훨씬 적합했다.

나폴레옹 3세는 오스만 남작을 중심으로 드림팀을 구성했다. 엔지니어 알팡, 조경가 바리에-데샹, 건축가 다비우가 그들이다. 어떤 일을 했는지 야구장으로 비유해보자.

나폴레옹 3세는 구단주였다. ‘파리를 런던보다 멋지게 만들어라’라는 비전을 세우고 오스만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자금을 대는 것도 그의 역할이었다. 오스만은 단장이었다. 구단주의 비전을 실행할 팀을 꾸렸다. 나폴레옹 3세를 설득해 예산을 확보하고 정치적 반대를 막아내면서 전체 프로젝트를 진행시켰다. 알팡은 감독이었다. 그라운드 전체 설계를 책임졌다. 공원의 지형, 호수 위치, 도로망, 배수 시스템 등 마스터플랜을 짰다. 바리에-데샹은 그라운드 키퍼였다. 감독의 설계 위에 실제로 잔디를 심고 관리한 사람으로 어떤 나무를, 어디에, 어떤 배치로 심을지를 결정했다. 다비우는 구장 건축가였다. 파빌리온, 분수, 다리, 벤치, 가로등, 키오스크 등 그라운드 위에 올라가는 모든 구조물을 설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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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동물들의
순화(d’acclimatation)를 지향


불로뉴 숲을 새롭게 만드는 과정에는 동물원도 포함됐다. 기린, 얼룩말, 캥거루, 치타 등 당시 파리 시민에겐 생소한 동물들을 보여줌으로써 제국의 힘을 과시하고자 했다. 파리 시민에게 이들 동물이 생소하듯 동물들에게도 파리의 기후는 낯설었다. 동물들이 건강하게 적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했다. 그래서 이 동물원의 이름이 ‘자르댕 조올로지크 다클리마타시옹’이었다. 낯선 생물을 새로운 환경에 적응시킨다는 뜻, 나아가 세계 각지의 동식물을 한데 모아 유럽 기후에 길들이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1860년 문을 연 이 공간은 불로뉴 숲의 2% 남짓한 면적에 불과했지만 나폴레옹 3세에게는 ‘제국의 쇼윈도’였다.

1870년 보불전쟁이 발발했다. 프로이센군이 파리를 포위하자 진귀한 동물들은 지방으로 옮겨졌다. 전쟁 후 정원은 되살아났지만 나폴레옹 3세는 이미 실각한 뒤였다. 동물이 사라지자 정원은 조금씩 가족 놀이공원으로 변모했다. 1952년에는 섬유 재벌 마르셀 부삭이 운영권을 인수했다. 미니 기차, 회전목마, 인형극장이 들어선 동네 놀이터 등 황제의 꿈은 그렇게 낡아갔다.


섬유 재벌이 공원의 운영권을 인수한 까닭

1889년에 태어난 마르셀 부삭은 직물 제조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1946년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패션 하우스에 자금을 지원하면서 패션 브랜드 ‘디올(Dior)’을 소유했고 1951년에는 언론사를 인수하기도 했다. 이런 재벌이 왜 공원의 운영권을 인수했을까?

흥미롭게도 공원의 위치가 중요한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1952년 당시 부삭은 공원 바로 앞인 뇌이쉬르센(Neuilly-sur-Seine) 지역에 살고 있었다. 공원 주변에 부동산 개발 소문이 돌았다. 자기 집 앞에서 공사 소음이 이어진다면? 건물이 들어서 자신의 집을 가린다면? 말년을 준비하던 부삭에게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공원의 운영권을 확보하는 쪽을 택했다. 파리시로부터 운영권을 따내면 그 땅이 쉽게 개발되기는 어려울 테니까 말이다.

파리시와의 계약 조건에 따라 정원은 ‘교육적·스포츠적·가족적 성격의 야외 산책 및 레저 공원’으로 재정의됐다. 시간이 흘렀다. 텔레비전의 보편화, 디즈니랜드 같은 대형 놀이공원의 등장으로 인해 자르댕 다클리마타시옹의 위상은 점점 떨어져 갔다. 하지만 애초에 사업 목적으로 운영권을 따낸 것은 아니었다. 굳이 대규모 투자를 할 이유도 없었다.

1978년 부삭그룹은 당시 프랑스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파산을 신청했다. 부삭 본인은 2년 뒤인 1980년 세상을 떠났다. 기업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르댕 다클리마타시옹도 조용히 주인을 바꾸고 있었다.


거듭된 소유주들의 파산, 매각 나선 정부

부삭그룹을 인수한 것은 빌로(Willot) 형제였다. 프랑스 북부 루베 출신의 섬유업자 4형제는 붕대 및 위생용품을 만드는 회사로 출발했다. 1967년 섬유·화학 소재 계열회사인 아가슈(Agache)를 인수하면서 ‘아가슈-빌로’라는 지주회사를 만들었다. 1970년대에는 봉마르셰 백화점도 인수했다. 그리고 부삭그룹을 인수하면서 디올까지 소유하게 됐다.

빌로 형제는 인수와 금융 기법으로 덩치를 키운 기업가였다. 현금이 풍부한 것은 아니었다. 성장기에는 대담한 M&A가 빛을 발하지만 쇠퇴기에는 과도한 M&A가 회사의 발목을 잡는다. 경기 악화와 섬유산업 침체가 겹치면서 아가슈-빌로그룹은 1981년 지급불능 상태에 들어갔다.

프랑스 정부가 개입했다. 사회당 정권이었다. 고용과 산업 기반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정부는 이 부실 덩어리를 방치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83년 들어 분위기가 바뀌었다. 미테랑 정부는 긴축으로 방향을 틀었고 부실기업을 계속 떠안기보다 민간 인수자를 찾아 정리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디올과 봉마르셰를 품은 이 골치 아픈 자산을 누군가에게 넘겨야 했다. 조건이 하나 있었다. 프랑스 자본이어야 한다는 것.

이때 베르나르 아르노가 등장한다. 당시 나이 35세. 가업인 건설회사를 부동산 개발회사로 전환해 돈을 벌었다. 1970년대 말 미국 출장에서 우연히 만난 택시 기사로부터 “프랑스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명품 사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디올과 봉마르셰를 헐값에 인수한 아르노

아르노는 가족 자금 1500만 달러에 라자르 프레르 투자은행의 4500만 달러를 합쳐 총 6000만 달러를 투입했다. 언론은 이를 두고 “단 1프랑에 인수했다”고 표현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두 번의 파산으로 헐값이 된 자산을 샀기 때문이다.

인수하자마자 아르노는 칼을 빼 들었다. 직원 9000명을 해고하고 기저귀 브랜드, 가구 체인 등 비핵심 자산을 팔아치워 막대한 현금을 확보했다. 남긴 것은 사실상 두 가지였다. 디올과 봉마르셰. 프랑스 언론은 그에게 ‘터미네이터’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 패키지 안에 자르댕 다클리마타시옹 운영권도 들어 있었다. 부삭에서 빌로 형제로, 빌로 형제에서 프랑스 정부의 개입을 거쳐 다시 아르노로. 세 번 손을 바꾼 끝에 1984년, 자르댕 다클리마타시옹은 아르노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왔다.

아르노에게 처음부터 이 정원이 목적은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디올이었다. 정원은 딸려온 자산에 가까웠다. 그러나 아르노는 그것을 버리지 않았다. 1995년 파리시와 20년간 운영권 계약을 새로 맺으며 정원을 다시 손질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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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다시옹 루이뷔통’을 구상하고 개관하다

2001년 아르노는 건축가 프랭크 게리를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1997년 게리가 건축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에 큰 감명을 받았던 터였다. 아르노도 그처럼 강렬한 문화적 랜드마크를 파리에 갖고 싶었다.

프랑스의 기부 관련 세법 변화는 미술관 건립의 촉매제가 됐다. 2003년 프랑스는 기업이 매출액의 0.5% 한도 안에서 기부한 금액의 최대 60%를 세액공제받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다. LVMH의 매출액은 요즘에야 800억 유로 수준이지만 2000년대 초반에는 100억 유로 남짓이었다. 5000만 유로를 문화 메세나에 쓰면 상당 부분을 세액공제받을 수 있는 환경이 열린 셈이다. 초기 예산이 1억 유로였으니 아르노 입장에서는 제도적으로 매우 유리한 조건이었다. 물론 모든 공사비가 단순히 60%씩 자동 공제된 것은 아니었다. 매출액 한도, 지출 인정 범위, 연도별 회계 처리 등 복잡한 조건이 있었다. 하지만 2003년 세법 변화가 대규모 기업 메세나 프로젝트의 부담을 크게 낮춰준 것은 분명했다. 아르노의 문화적 야망은 세제의 언어를 만나 실행 가능한 사업 구조가 됐다.

프랑스 명품 기업 중에는 미술관이라는 명칭보다 퐁다시옹(fondation), 즉 재단이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물건 파는 회사가 아니라 예술을 후원하는 문화기관’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아르노도 그 공식을 따랐다. 이름은 ‘루이뷔통 미술관’이 아니었다. 퐁다시옹 루이뷔통(Fondation Louis Vuitton)이었다.

2006년 아르노는 파리시와 자르댕 다클리마타시옹 안의 1㏊ 부지를 장기간 임차해 FLV를 짓는 계약을 맺었다. 2008년 FLV 착공 당시 건축비 예산은 1억 유로였다. 모든 게 순탄했던 건 아니다. 프로젝트 기간은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고 최종 비용은 8억 유로 안팎으로 추정됐다. 환경단체의 반발과 소송, 이로 인한 공사 지연도 문제였고 프랭크 게리의 건축 디자인을 현실로 옮기는 일도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아르노의 의지는 확고했다.


정원 계약 기간 연장과 리노베이션

2014년 FLV가 문을 열었다. 정원 방문객은 크게 늘었다. 2015년에는 정원의 운영 위탁 계약 갱신 시점이 도래했다. 1년간의 협상 끝에 계약은 2041년까지 연장됐다. 새 계약에는 바리에-데샹이 설계한 역사적 조경 축선을 복원하는 작업도 포함됐다. 바리에-데샹의 이름이 160여 년 만에 다시 등장하는 대목이다.

2017년 9월부터 2018년 5월까지 8개월간 공원 북쪽 3분의 2를 폐쇄하고 6000만 유로를 투입하는 대규모 공사가 진행됐다. 강을 복원해 물길을 되살렸고 어트랙션을 외곽으로 이동시키면서 중심부를 녹지와 수경 공간으로 되돌렸다. 공원 안에 있던 외제니 황후의 집(Maison Euge´nie)은 주변 건물과 합쳐져 메종 데 아틀리에(Maison des Ateliers)로 부활했다. 지금은 LVMH가 운영하는 고급 행사 공간으로 쓰인다. 나폴레옹 3세의 꿈이 오랜 세월을 넘어 다시금 현실에 소환된 셈이다.


LVMH의 위상을 한층 높인 아르노의 FLV

공식적인 설립 목적은 현대미술과 동시대 예술을 더 폭넓게 소개하는 것이다. 하지만 비즈니스 관점에서 보면 FLV의 존재는 루이뷔통이라는 럭셔리 브랜드의 위상을 한층 끌어올린다. 소위 후광효과(halo effect)다. 루이뷔통은 더 이상 ‘그냥 명품 브랜드’가 아니다. 현대미술을 후원하고, 세계적 건축가의 작품을 소유하며, 파리의 문화 지형에 기여하는 문화기관의 이미지를 얻었다.

파리 한복판이 아닌 정원에 FLV를 넣은 것도 신의 한 수였다. 사실 파리 시내는 각종 건축 규제로 인해 무언가를 새로 짓기 어렵다. 하지만 천하의 아르노가 마음을 먹는다면 불가능하다고 볼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한 수를 더 봤다. 사마리텐, 슈발 블랑 호텔, LVMH 본사 등 자신이 보유한 각종 명품 공간이 위치한 파리 1구가 아니라 시민들의 휴식처로 활용되는 정원에 FLV를 자리 잡게 했다.

공공성이 높은 장소에 FLV가 들어섬으로써 LVMH는 문화적으로 프랑스에 기여하고 있다는 인상을 얻었다. 디올과 봉마르셰를 얻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함께 갖게 된 정원. 아르노는 이 뜻밖의 자산을 방치하지 않았다. 정원을 브랜드의 배경으로 삼고, 브랜드를 다시 정원의 후원자로 세웠다.

나폴레옹 3세가 꿈꾼 것은 시민을 위한 공공 정원이었다. 아르노가 되살린 것은 그 꿈의 순수한 형태라기보다 공공성과 브랜드 가치가 결합한 21세기식 정원이었다. 사업으로 번 돈을 문화로 환원한다. 그 과정에서 사업가는 좋은 평판을 얻고, 그 사업가가 소유한 브랜드의 가치는 더욱 올라간다. 아르노는 이 공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르댕 다클리마타시옹은 그렇게 황제의 정원에서 재벌의 정원으로, 다시 파리의 문화 무대로 변신했다.
  • 신현암

    신현암gowmi123@gmail.com

    팩토리8연구소 대표

    신현암 대표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경영학)를 받았다. 제일제당에서 SKG 드림웍스 프로젝트 등을 담당했고, CJ엔터테인먼트에 근무했으며,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및 사회공헌실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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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리=백상경baek@donga.com

    동아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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