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at a Glance에도 시대를 상징하는 정원 ‘리쿠기엔’은 도쿠가와 막부의 최후와 함께 몰락의 길을 걸었다. 버려진 정원을 다시 살려낸 것은 메이지 시대 신흥 기업인 미쓰비시였다. 창업자 이와사키 야타로, 그 동생이자 2대 총수인 야노스케는 일본 굴지의 기업을 만드는 동시에 리쿠기엔을 복구하고 기요스미라는 최고의 정원을 가꿨다. 3대 총수 히사야는 관동대지진에서 사람들의 피난처가 됐던 기요스미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고, 리쿠기엔 역시 도쿄시에 기부했다. 여기서 비롯한 정신은 4대 총수 고야타의 ‘소기봉공(사회공헌)’으로 이어졌다. 일본 패망과 함께 이와사키 가문의 미쓰비시 경영은 막을 내렸지만 그들이 남긴 도쿄의 정원은 기업의 성취가 영속하는 문화로 이어지는 하나의 길을 보여준다.
1. 문학이 땅 위에 내려온 정원도쿄 분쿄구에 있는 리쿠기엔(六義園)은 에도 시대가 남긴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다. 만든 사람은 5대 쇼군 쓰나요시의 최측근 야나기사와 요시야스다. 1695년부터 7년에 걸쳐 완성했다. 이 정원의 특이한 점은 이름에 있다. ‘리쿠기(六義)’란 중국과 일본의 시를 여섯 가지로 분류하는 방식에서 따온 말이다. 야나기사와는 당대 최고의 시가(詩歌) 학자에게 직접 사사할 정도로 문학에 빠져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옛 시집에 등장하는 명소 88곳을 정원 안에 재현했다. 돌을 놓고, 소나무를 심고, 물을 끌어들여 실제 풍경처럼 만들었다. 이것을 ‘팔십팔경’이라 불렀다. 권력자가 만든 공간이었지만 그 이름과 설계만큼은 무력보다 문학과 교양을 앞세우고 있었다.
6대 쇼군이 들어서자 야나기사와는 리쿠기엔에 은거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권력을 잃으면 돈도 떠나기 마련이다. 정원은 후손에게 전달됐지만 정원을 가꿀 수 있는 돈은 부족했다. 1809년 4대 당주가 대대적인 복구에 나섰지만 이미 많은 것이 사라진 뒤였다. 상징적이었던 88곳 가운데 상당수는 자취를 감췄고 복구할 수 있었던 곳도 절반 남짓이었다. 1868년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면서 리쿠기엔은 야나기사와 가문 손을 떠나 메이지 정부 소유가 됐다. 173년 동안 이어졌던 다이묘 가문의 별장이 하루아침에 국유지가 됐다. 관리되지 않은 정원은 천천히 황폐해졌다. 권력이 남긴 문화 공간도 손길이 끊기면 순식간에 폐허의 길로 들어선다는 사실을 이 정원 역시 피하지 못했다.
2. 미쓰비시 창업자의 두 가지 욕망
버려진 정원을 다시 살려낸 것은 미쓰비시(三菱)였다. 창업자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彌太郎)는 1835년 시코쿠 남부 도사 지방의 몰락한 무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학과 한학을 익히며 번(藩)의 역리와 충돌하기를 반복하다 32세에 도사 번 나가사키 상회의 주임이 돼 구미 상인들과 수출입 협상을 담당했다. 1870년 번선 세 척을 빌려 오사카에 스쿠모(九十九) 상회를 설립한 것이 미쓰비시의 출발이었다. 이후 사명을 거듭 바꾸며 해운업의 치열한 경쟁을 헤쳐나갔고 1877년 서남전쟁에서 보유한 모든 역량을 쏟아 정부군의 수송을 담당하면서 미쓰비시 해운은 일본 최강의 해운사 자리에 올랐다. 이후 해운을 넘어 탄광·광산·조선·은행·창고·보험업으로 사업을 확장해 사세를 키웠다.
야타로에겐 사업 외에 또 하나의 욕망이 있었다. 정원이었다. 그의 아들의 전기인 『이와사키 히사야 전』에는 야타로가 이런 말을 남겼다는 기록이 있다. “나는 본래 이렇다 할 취미가 없지만 늘 마음이 샘과 돌과 언덕으로 향한다. 만약 나에게 정원을 만들 기회가 생긴다면 가가 번 저택의 정원처럼 무수한 거암과 대석을 배치하고 고목이 우거진 깊은 산 같은 것을 본받고 싶다.” 1878년 그는 황폐해진 리쿠기엔을 매입하면서 동시에 에도 시대 다이묘들의 별장터였던 후카가와(深川)의 땅 약 9만9000㎡(3만 평)도 사들였다. 인근 부지까지 합쳐 총 39만6000㎡(12만 평). 해운업을 일으켜 전국을 배로 연결한 야타로는 전국 각지의 명석과 기석을 후카가와로 실어 날랐다. 청석, 붉은 옥석, 화강암 등 저마다 산지가 다른 돌들로 연못가를 채워나갔다.
그는 후카가와 땅에 회사 직원이 쉴 수도 있고 귀빈 접대도 할 수 있는 정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당초 이름은 ‘후카가와 친목원(深川親睦園)’, 훗날 기요스미 정원(清澄庭園)이 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야타로에게 시간이 허락되지는 않았다. 그는 정원 구상을 충분히 완성하지 못한 채 1885년, 쉰 살의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에는 각계 요인을 포함해 3만 명이 참석했다. 사업은 완성했지만 정원은 미완이었다.
3. 동생이 형의 자리에 서다야타로의 뒤를 이은 것은 장남이 아니라 동생 이와사키 야노스케(岩崎彌之助)였다. 열여섯 살 터울의 동생은 형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스물한 살에 미국 코네티컷주 엘링턴의 작은 남자 기숙학교에서 영어와 퓨리턴 정신, 민주주의를 익혔다. 그러나 아버지의 급서 소식에 1년 만에 귀국해야 했다. 귀국 후 형을 도와 미쓰비시에 합류했고, 형이 떠난 자리를 물려받았다.
야노스케의 가장 큰 사업적 결단은 해운업을 과감히 분리하고 사업의 축을 바다에서 육지로 옮긴 것이었다. 1890년에는 정부의 요청을 받아 마루노우치(丸の内)와 간다 미사키초 일대 관유지 약 35만3100㎡(10만7000평)을 일괄 매입했다. 당시 마루노우치는 허허벌판이었다. 야노스케는 그곳에 서양식 건축물로 이뤄진 대규모 비즈니스 센터를 만들어냈다. 오늘날 도쿄 마루노우치가 일본 경제의 심장부가 된 것도 이 결단에서 비롯했다. 1896년에는 일본은행 총재에 취임해 금본위제를 도입하고 일본 금융 시스템의 기틀을 다졌다.
형의 숙원사업이었던 정원 역시 야노스케가 이어갔다. 1886년 리쿠기엔의 본격적인 복구공사를 시작했다. 주변 산림에서 수목을 이식하고, 각지에서 정원석을 모았으며, 에도 시대부터 내려온 수로에서 연못으로 물을 끌어들였다. 황폐했던 공간이 다시 살아났다.
기요스미 정원은 한층 더 공을 들였다. 야노스케는 1886년 교토에서 유명 다인을 특별히 초빙해 조원을 맡겼다. 정원 유람장, 온실 원예장, 식재지를 새로 설치하고 야타로가 전국에서 모아온 명석들에 더 많은 돌을 보태 약 5년에 걸쳐 1891년 완성했다. 일본관과 서양관도 새로 지었다.
4. 정원을 공원으로 바꾼 사람여기서 잠깐 두 단어를 짚고 넘어가자. 정원(庭園)과 공원(公園)이다.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본질이 다르다. 정원은 주인이 있다. 담장이 있고, 문이 있고, 허락된 사람만 들어올 수 있다. 내가 가꾸고 내가 즐기는 공간이다. 공원은 다르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모든 사람이 이용한다. 훌륭한 경영자가 기업을 잘 키우는 것이 한 가지 책무라면 자신이 가진 것을 사회에 돌려주는 것은 또한 다른 차원의 책무다. 정원을 공원으로 바꾸는 결정이 바로 그것이다.
그 결정을 내린 사람이 3대 총수 이와사키 히사야(岩崎久彌)였다. 야타로의 장남인 그는 열 살에 게이오 의숙에 입학해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고 이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유학했다. 스물아홉의 나이에 사장에 취임한 히사야는 은행부·매탄부·광산부를 신설하고 나가사키 조선소를 근대화했으며 사업부별 독립 채산제를 확대해 우수한 전문가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근대적 경영 시스템을 도입했다. 미쓰비시가 일본 최강의 기업 집단으로 완성되는 토대가 이때 마련됐다.
히사야 시기에 리쿠기엔은 미쓰비시 가문의 영빈관이 됐다. 그 절정이 1905년이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해, 히사야는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대장 이하 장병 6000명을 리쿠기엔으로 초청해 전승 축하연을 열었다. 에도 시대 권력자의 문학 정원이 근대 일본의 영빈 무대로 다시 기능하는 순간이었다. 정원 안의 후키아게 차야(吹上茶屋)는 연못을 바라보며 쉬거나 말차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은 기요스미 정원에도 큰 피해를 입혔다. 건물 대부분이 전소됐다. 그러나 정원의 연못과 수목은 불길을 막아 많은 주민의 피난처가 됐고 다수의 인명을 구했다. 이 사실에 감명받은 히사야는 이듬해인 1924년 피해가 비교적 적었던 동쪽 절반을 도쿄시에 기부했다. 도쿄시가 이를 정비해 1932년 기요스미 정원이라는 이름으로 일반에 공개했다. 서쪽 인접 부지는 훗날 정비돼 1977년 기요스미 공원(清澄公園)으로 개방됐다. 히사야는 1938년 리쿠기엔도 도쿄시에 기부했다. 1953년 리쿠기엔은 국가 특별 명승으로 지정됐다.
5. 4대 총수가 완성한 것4대 총수 이와사키 고야타(岩崎小彌太)는 야노스케의 장남, 야타로의 조카였다. 제일고등학교를 거쳐 도쿄제국대 법과에 입학했다가 1년 만에 자퇴하고 영국 케임브리지대로 유학을 떠난 그는 귀국 후 26세에 부사장이 되고 37세에 사장 자리에 올랐다. 고야타의 가장 큰 사업적 업적은 분산된 사업 부문을 각각의 주식회사로 독립시켜 미쓰비시 그룹의 현대적 형태를 완성한 것이었다. 조선부는 미쓰비시 조선 주식회사로, 영업부는 미쓰비시 상사 주식회사로. 그리고 1920년 미쓰비시 상사에서 그가 제시한 경영 방침이 훗날 요약돼 다음의 ‘삼강령(三綱領)’이 됐다.
· 소기봉공(所期奉公) -기대하는 바는 사회에의 공헌.
· 처사광명(処事光明) - 페어플레이에 철저할 것.
· 입업무역(立業貿易) - 글로벌한 시야에 설 것.
1920년대의 일본 기업이 이런 이념을 내걸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사회공헌’은 오늘날에도 기업이 쉽게 실천하기 어려운 가치다. ‘글로벌한 시야’는 당시 일본에서는 드문 발상이었다. 야타로가 세계를 보며 사업을 구상했듯 그 정신이 두 세대를 건너 이념으로 정리된 셈이다. 고야타는 시대를 앞서간 경영자였다. 1945년 일본 패망 후 고야타는 GHQ(연합국 최고사령부)의 재벌 해체 요구에 “이유가 없다”며 끝내 자필 서명을 거부한 채 대동맥 파열로 세상을 떠났다.
6. 손자가 마지막 정원을 만들다5대 총수 예정자 이와사키 히코야타는 야타로의 손자, 히사야의 장남이었다. 재벌 해체로 총수 자리는 끝내 물려받지 못했지만 그는 정원 하나를 남겼다. 1929년 도쿄 교외 국분지에 있는 땅을 사들여 ‘국분지의 집’이라 이름 붙이고 직접 정원을 가꾸었다. 무사시노 특유의 잡목림과 절벽 아래 솟아나는 용수를 살린, 야취(野趣) 가득한 정원이었다. 1934년에는 본관을 새로 짓고 연못 회유식 정원을 완성하며 다실 홍엽정도 신축했다. 국분지 역 남쪽 일대가 대부분 이와사키 가문의 소유지였고 역의 남쪽 출구 자체가 이와사키 가문의 진정으로 생겨난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960년대에 개발 계획이 들어서면서 정원은 철거 위기에 처했다. 이를 막으려는 주민 보존 운동이 일어났고 그 결실로 1974년 도쿄도가 이 땅을 매수했다. 1979년 도노가야토 정원이라는 이름으로 일반에 공개됐다. 야타로의 꿈이 손자의 손에서 마지막 한 점을 찍은 것이다.
7. 정원은 재벌 가문보다 오래 기억된다이와사키 가문이 도쿄에 남긴 정원은 모두 네 곳이다. 리쿠기엔, 기요스미 정원, 구이와사키 저택 정원, 도노가야토 정원. 야타로가 꿈을 품고, 야노스케가 형태를 만들고, 히사야가 사회에 돌려주고, 히코야타가 마지막 한 점을 찍었다. 사업은 재벌 해체와 함께 해산됐지만 정원은 남았다.
일본 최고의 재벌 기업 미쓰비시를 만든 가문, 그들이 도쿄에 남긴 유산으로 정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봄이면 벚꽃 아래를 걷고, 가을이면 단풍 앞에 멈춰 서는 사람들 중에 이와사키 가문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하지만 그들이 발 딛고 선 그 땅은 야타로가 쉰 살에 눈을 감으며 미처 완성하지 못한 꿈에서 시작된 것이다. 정원을 만들고, 이를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도록 바꾸는 일. 사업을 잘하는 것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기억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