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 Case Study: 준오헤어의 HR전략
Article at a Glance
직무 만족도와 자부심이 낮고 이직률이 높은 업종에서 직원들의 충성심을 높이기 위한 동기부여책은 지금이나 앞으로 모두 잘살 수 있게 해준다는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준오헤어는 설립 초기부터 헤어 스타일리스트들이 고소득을 거둘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를 위해 선진 교육을 실시하고 고객과의 소통을 돕기 위한 독서경영을 도입했다. 준오헤어가 생각하는 업의 본질은 ‘People Business’다. 기업의 비전이 조직원의 꿈과 희망을 달성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게 한 것이다. 또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강남권에서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 준오헤어는 대형 ‘플래그십 전략’을 썼다. ‘강북의 캐주얼 브랜드’로 고객에게 인식된 미용실이 그 덕에 강남의 대표 미용실로 재포지셔닝할 수 있었다. |
편집자주
이 기사의 취재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한성희(한양대 경영학부 3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1월5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대강당에서는 미용업체 준오헤어가 주최한 2016년 시무식이 열렸다. 올해로 27년째를 맞이하는 이 연례행사에는 전국의 준오헤어 109개 점포에서 몰려든 2200여 명의 ‘준오맨’, 협력업체 임직원 200여 명과 함께 중국 광둥성, 저장성, 탕산시 등에서 방문한 미용업계 관계자 100여 명이 참석했다. 직원들이 해군복을 맞춰 입고 함께 군무(群舞)를 추는 해군 퍼포먼스며 응원전 등 쇼도 인상적이었지만 더 눈길을 끈 것은 여느 대기업 행사 못지않게 비장한 분위기의 비전 선포식이었다.
2015년 10월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지상 8층 규모의 준오아카데미를 확대 오픈하며 “아시아 미용 교육의 허브로 거듭난다”는 비전을 발표한 강윤선 준오헤어 대표(56)는 이날 시무식에서도 특유의 당찬 목소리로 ‘500년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한 장기 비전에 대해 이야기했다. 특히 준오헤어가 최근 미용 업계에서 가장 주목하는 브랜드로 떠오른 이유가 바로 이 ‘준오아카데미’ 때문이다. 아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최대 규모 미용인 교육기관인 이곳에는 ‘동네 미용실 원장’이었던 시절부터 먼 미래를 바라봤던 강 대표의 비전이 응축돼 있다. 그는 이 아카데미 곳곳에 “넘어지는 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지만 일어나지 않는 것은 너의 잘못이다” “항상 목표를 생각하라. 겨누지 않고 쏜 화살은 빗나간다” 등 자신의 좌우명을 새겨 넣었다. 같은 길을 걷는 후배들이 자신만큼이나 독하게, 그리고 강한 마음으로 미래를 꿈꾸게 하기 위해서다.
부침이 많고 단기 실적을 내기에 급급한 미용 업계에서 ‘500년 기업’을 이야기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이는 강 대표가 업계 평균(40∼50%) 대비 현격히 낮은 이직률(10∼15%)과 직원들 특유의 로열티 등을 통해 지속가능성을 자신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처럼 특히 HR과 브랜드 관리 측면에서 선구자적인 행보로 ‘준오맨 정신’을 업계 곳곳에 알리고 있는 준오헤어의 성공비결을 DBR이 분석했다.
자부심을 충성심으로
강 대표는 극빈층 가정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학업을 계속하기보다는 돈을 벌어야 효도하는 것”이라고 설득하는 아버지에 여봐란듯이 중학교 때부터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했고 전수학교에 등록해 야간에는 학교를 다니고 낮에는 일을 했다. 세 살 무렵 입은 전신 화상으로 18차례나 수술하는 등 죽을 고비를 넘겼고 화상 흉터로 인한 남들의 시선이 고통스러웠던 때도 있었다. 그런 역경을 극복하며 단단해진 내공과 그 과정에서 얻은 성찰은 그가 국내 굴지의 미용업체를 이끄는 데 큰 밑거름이 됐다.
어린 시절부터 회사생활을 시작한 것은 사업가 DNA를 키우는데 큰 도움이 됐다. 첫 직장이던 ‘중앙전기’라는 정보통신 회사는 ‘영어로 이름과 주소 쓰기’를 입사 시험으로 냈고 이 문제에 잘 대비했던 덕에 공장라인 대신 사무직에 투입됐다.
거래처로부터 주문을 받고, 재고를 정리하는 등 회계 업무를 했고 아버지뻘 나이 되는 인생 선배들로부터 인생에 보탬이 되는 ‘멘토링’을 지속적으로 받으면서 차곡차곡 사업가로서의 기본을 다졌다. 1979년, 야간 여상인 무궁화기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약 133㎡(약 40평) 남짓 되는 미용실 ‘고추잠자리’를 열면서 강 대표의 미용인생이 본격적으로 열렸다.
같은 길을 걷는 남편을 만났고, 1982년 드디어 서울 성신여대 앞에 준오미용실을 열고 처음으로 직원을 뽑으면서부터도 그는 ‘구멍가게식으로 운영하기는 싫다’고 생각했다. 직원들에게 출퇴근 시간등 자기관리를 강조했고 회의와 교육을 정례화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기업도 아닌 동네 미용실에서 이처럼 체계를 갖추려 애쓴 것은 궁극적으로 직원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최근에는 미용업이 유망 서비스 직종으로 떠오르면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재들이 영입되는 편이지만 당시에는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가정 형편이 어려운 여성들이 생업을 위해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의 일터가 그저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곳이 아닌 자부심이 넘치는 공간으로 거듭나길 바랐다. 점포가 네 곳으로 늘고 그 만큼 책임이 커지자 강 대표는 ‘인재 관리’의 필요성도 깨닫게 됐다.
인센티브제로 보수가 지급되고 미용사 각 개인이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미용 업계 관행상 이 업계 직원들은 조금이라도 더 벌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곳이 있다면 미련 없이 자리를 옮기려 했다. 강 대표는 “떠나겠다는 직원을 잡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써봤지만 금전적 욕구 때문에 움직이려는 사람은 막기 어렵더라”며 “이런 일을 경험하면서 직원들이 잘살 수 있게 하는 것, 또 자긍심 넘치는 일터를 만들어 미래를 약속할 수 있다면 돈만 쫓아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때 강 대표가 떠올린 단어가 ‘꿈’이었다. 직원들에게 10년 뒤 이 직장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이 조직에 속한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일지 비전과 꿈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회사나 각 개인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고 봤다.
다행히 장사가 잘됐고 ‘10년 장기근속하면 해외여행을 보내주겠다’는 것과 같은 약속도 지킬 수 있었다. 요즘은 장기 근속자가 늘어나 해외여행 자격이 주어지는 직원 수가 매년 40명을 넘어설 정도다. 하지만 여행 때문에 장기근속을 하지는 않았을 터. 직원들이 반겼던 궁극적인 인센티브는 바로 교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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