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at a Glance중국 송나라 때에는 형식적으로 3년에 한 번 30여 명을 선발하던 과거시험 제도를 완전히 바꿔 3년에 한 번 1400명씩을 뽑도록 했다. 지방 유력자의 자제들은 ‘서울’로 올라와 관직에 오르기 위해 시험을 쳤다. 그렇게 지방의 유력자들은 서울에 의해 관리되고 지배됐다. 문제는 처음으로 남중국(강남)의 경제력이 북중국(강북)의 경제력을 앞서면서 두 지역 간 교육과 문화 인프라 격차도 벌어졌다는 점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균형선발제도가 추진됐으나 최종 선발에는 적용되지 못했다. 나중에 벌어진 북중국의 송나라에 대한 민심 이반은 바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밀어 넣을 수 있는 통로가 없었음에 기인한다. 회의실에서, 강의실에서, 내무실에서, 거실에서, 술자리에서 사흘째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 발언할 수 있는 통로부터 만들어 줘라. 그게 이후에 조직이나 자신을 살리는 길이 될 수도 있다.
편집자주 인간사에는 늘 반복되는 패턴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 함은 바로 그 패턴 속에서 현재의 우리를 제대로 돌아보고 조금은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의미일 겁니다. 철학과 역사학을 오가며 중국에 대해 깊게 연구하고 있는 필자가 주(周)나라가 낙양을 건설한 후로 현대 중국이 베이징에 도읍하기까지 3000년 역사 속에서 읽고 생각할 만한 거리를 찾아서 서술합니다. |
사람이 먼저다. 나에게 역사학으로의 문을 열어준 선생님은 한 사회가 변화하는 양상을 들여다볼 적엔 늘 인구 변동(demography)을 먼저 살펴보라고 하셨다. 사람이 늘었는지 줄었는지, 어디서 늘어나는 동안 어디서 줄었는지, 그 많던 사람은 누가 다 먹었는지를 꼼꼼히 챙겨보면 변화의 윤곽이 잡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 축으로 만들어진 좌표평면에 사람들을 점찍는 것이 먼저다.
중국사를 통틀어 ‘사람’의 측면에서 가장 큰 변화가 생긴 시기를 하나만 꼽자면 아마도 송(宋, 960-1279) 대일 것이다. 바로 이때 중국의 통일제국이 낙양(洛陽)과 장안(長安)에서 벗어나 개봉(開封)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장안 근처에서 발호한 주나라(周, 약 BC1050-BC256) 왕실이 낙양을 건설했고, 낙양을 불태운 동탁(董卓, 138-192)은 장안으로 옮겨갔고, 장안이 부담스러운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는 낙양으로 천도했다. 낙양과 장안은 마치 자존심 강한 두 천재처럼 도읍지 자리를 두고 끝없이 경쟁했으나 송나라 황실이 개봉에 자리 잡은 이후로 체제의 변두리로 밀려나고 만다. 저쪽에 있던 황제가 이쪽으로 오면서 한 시대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