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와 정조를 통해 본 리더십

黨同伐異: 내가 하면 로맨스 오죽했으면 ‘하다만 탕평책’이 최대 치적

178호 (2015년 6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영조의 최대 치적으로 평가받는 탕평책은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내 편, 네 편을 갈라 무조건 상대편을 배격하고 보는 당동벌이(黨同伐異) 풍습을 없애기 위한과도기적정책이었다. 영조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적절한 능력자를 선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동벌이로 인해 그것이 쉽지 않아 탕평책을 통한 할당제를 먼저 실시한 것이다. 그런데 후대에 이르면서 탕평책의 할당 그 자체가 목적이 돼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 인사를 할 때 할당제에 매몰돼 이쪽저쪽의 비율을 맞추는 게 본질이 돼 버렸다.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정조는 할당을 거부하고 당파의 비율이 맞지 않더라도 과감하게 인재를 등용했다. 채제공이나 정약용 같은 남인 계열들이 중용될 수 있었던 것도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 등 서얼 4인방의 등장도 정조가 할당제 비율에 집착했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대대적인 인사 발탁이었다. 

 

편집자주

영조와 정조가 다스리던 18세기는 조선 중흥의 시대라 불립니다. 하지만 이런 타이틀은 결코 쉽게 얻어진 게 아닙니다. 노론과 소론 간 권력 투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에 즉위한 두 왕은 군왕의 소임이란 특정 당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도탄에 빠져 있는 조선과 백성을 위해 있는 자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당시로선 너무나 혁명적인 선언인 탓에 수많은 방해와 반대에 직면했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들의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지혜와 용기, 끈기로 무장해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어 낸 두 임금, 영조와 정조의 기록을 통해 진정한 리더의 자질에 대한 통찰을 얻어 가시기 바랍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유행하고 있는 말이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다. 이 말과 똑같은 뜻으로 조선시대에도 널리 사용된 사자성어가 있었다. 바로당동벌이(黨同伐異)’. ‘당이 같으면 동조하고, 당이 다르면 공격한다는 의미다. 옳고 그름을 따져보지도 않고, 자기편은 무조건 동조하고 상대편은 덮어놓고 공격하거나 따돌리거나 거부한다는 뜻이다.

 

조선 후기 숙종 때 당쟁이 특히 심해지면서 이 말은 아주 유행하는 말이 됐다. 숙종 때 많은 환국으로 정국을 주도하는 당파는 계속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똑같은 사안을 두고서도 서로 공격하고 비난하기 일쑤였다. 이 시대를 살았던 거물 정치인치고 이런 당동벌이를 하지 않은, 또는 당동벌이의 대상이 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당대 최고의 거물 정치인이며 대학자로 추앙받았던 우암(尤庵) 송시열도 예외 없이 극단적인 평가를 받았다.

 

 

당쟁(黨爭)의 극치, ‘당동벌이(黨同伐異)’

송시열을 칭찬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평가했다. “거룩한 임금만 믿고 어리석은 소견을 털어놓다가 여러 사람들에게 시기를 받게 됐지만 임금만 알았을 뿐 다른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임금을 요순 같은 임금이 되게 하자던 것이었는데, 이것이 어떻게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던가. 하늘이 내려다보거니와 다른 마음은 아예 없었다.” 송시열이 요순과 같은 훌륭한 임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이런 충심은 사심이 없는 것이었으나 충심이 지나쳐서 시기를 받았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반대편 사람들이 보면 송시열의 충심은 편당이었다. “송시열은 실로 성질이 집요하고 편당 짓기를 좋아했으며 학식이 없었다!” 다른 비판이면 모르겠는데 송시열이 학식이 없었다는 건 좀 심해 보인다. 주자에 견주어송자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인물에 대해 학식이 없다고 폄하했기 때문이다. 이런 비판은 오직 상대를 깎아 내리기 위한 비판일 수도 있지만 감정이 워낙 앞서다 보니 정말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 숙종 때의 당파는 노론, 소론, 남인이 있었고 그 안에 엄청나게 분파가 많았다.

 

그런데당동벌이의 진수는 똑같은 행동을 두고 서로 비난하는 경우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뇌물이다. 그들은 뇌물을 받고 자기 당파나 친인척을 등용했다고 서로서로 비난했다. “토색질이 끝이 없고 뇌물이 마구 몰려 땅과 집이 열 군데가 넘는데 옮겨 다니는 것이 일정하지 않아서 그가 가는 대로 도당(徒黨)들이 모이기 때문에 그 피해가 이웃마을에까지 미치고 닭과 개들까지도 편치 못했다.” 뇌물에 얽힌 송시열에 대한 평가다. 그런데 사실 이 시기에 여러 지역에 집을 두고 돌아다닌 현상은 송시열뿐 아니라 당시 누구나 하던 일이었다. 하지만 당동벌이가 극에 달하다 보니 중앙 정계에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들의 이런 일상적인 삶의 형태도 비난의 대상이 됐다.

 

송시열도 억울하게 당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다음은 송시열이 남인의 영수였던 허적을 비판한 내용이다. “허적이 영의정이었을 때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린다는 말을 듣기 싫어했다. 그래서 몇 만 명이 굶어죽어도 감사와 수령들은 보고를 하지 않았다.” 송시열의 말만 들으면 허적은 정말나쁜 정치인처럼 보인다. 그러나 허적이백성이 굶주린다는 걸 듣기 싫어했다는 사실이 송시열의 말처럼 아랫사람들이 보고를 하지 않을 만큼 정말 듣기 싫어했다는 뜻인지, 아니면 굶주리는 백성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책임감의 표현인지는 불분명하다. 오히려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당동벌이가 유행하던 이 시절은 백성을 걱정하는 것도 죄가 되는 세상이었다.

 

이런 것들이 모함일수도 있고 해석의 차이일 수도 있지만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던 비판이 뇌물이었다. 아니, ‘선물과 뇌물의 미묘한 차이다. 송시열과 허적은 모두 뇌물을 받았다는 비난에 시달렸다. 송시열의 숙적, 윤휴는 문제의식이 투철한 개혁가로 유명했지만 그런 윤휴조차도 뇌물을 받았다는 비난을 끊임없이 받았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무고였을까? 아니면 이당 저당 할 것 없이 정치가들이 모두 타락이라도 한 것일까?

 

여기에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화폐나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아 물물교환이나 증여, 선물, 이런 것들이 일상화돼 있었다. 누구도 이런 것을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었는데, 이게 좋게 보면 선물, 나쁘게 보면 뇌물이다. 내가 받으면 선물이고 남이 받으면 뇌물이었다. 이것이 정적을 공격할 때 뇌물 논란이 그치지 않았던 이유다. 자기들이 받은 것은 모두 선물이라고 우겼다. 행여나 누가 그것도 뇌물이 아니냐고 다그치면저들도 다 받았다며 갑자기 상대를 존중하면서 슬그머니 빠져나가곤 했다.

 

조선시대에는

화폐나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아

물물교환이나 증여, 선물,

이런 것들이 일상화돼 있었다.

누구도 이런 것을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었는데, 이게

좋게 보면 선물, 나쁘게 보면

뇌물이다.

 

 

영조의 최대 치적, 탕평책

숙종 대에 당동벌이를 뼈저리게 느꼈던 영조는 당쟁의 폐단 중에서 제일 먼저 극복해야 할 과제를당동벌이라고 생각했다. 당쟁은 좋게 보면 긍정적인 기능도 있다. 일당 독재를 방지하고 서로 간의 부정과 정책실패를 견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당쟁이 당동벌이로 가면 이런 기능이 완전히 상실되고, 그야말로 이권 쟁탈전만 남게 된다. 그래서 영조는 당쟁의 폐단이 곧 당동벌이라고 판단했다.

 

이 고질병을 고치기는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영조는 일단 인사할당제부터 시행했다. 당파별로 고르게 관직을 배분해 인재를 배치한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영조의 탕평책이다. 영조는 평소에도 늘내가 지독히도 미워하는 것은 당동벌이이고, 이루고자 하는 것은 탕평이다라고 말했다.

 

탕평책은 영조의 최대 치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요즘도 많은 조직에서 영조식() 탕평인사를 시행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정치권에서도 탕평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그런데 여기에는 우리가 크게 잘못 알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탕평인사가 영조가 추구했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탕평인사는 사실상 당동벌이 풍습을 없애기 위한 과도기적인 정책이었다. 이상적인 인사정책은 탕평이 아니라 적절한 능력자를 선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탕평책부터 실시한 것이었는데 이것이 나중에는 탕평책의 할당 그 자체가 목적이 돼 버렸던 것이다.

 

“영조의 진심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미봉책으로 만들어버렸다. 인사 하나를 할 때도 할당제에 매몰돼 이쪽저쪽의 비율을 맞추는 것이 본질이 돼 버렸다. 탕평이란 당파를 잊어버리고 나를 잊자는 것인데, 비율에 집착하니 거꾸로 자기 당파를 등용하는 방법이 돼 버렸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탕평의 당이 옛날 당보다 심하다라고 한다.” 이것은 정조가 할아버지의 탕평책에 대해 평가한 코멘트다. ‘탕평의 당이 옛날 당보다 심하다라는 것은 탕평의 폐단이 옛날보다 더 심해졌다는 뜻이다. 정조도 영조의 탕평책이 형식적인 것이었다고 평가한 것이다. 지역, 학벌, 정파에 의한 할당제는 말 그대로 고육지책일 뿐이었다.

 

할당제로 전락한 탕평책의 본질을 살리려면

정조는 어떻게 이런 방식의 폐단을 해결하려 했을까? 정조의 솔루션은 심플했다. 정조는 할당을 거부하고 당파의 비율이 맞지 않더라도 과감하게 인재를 등용했다. 채제공이나 정약용 같은 남인 계열들이 중용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인사정책의 결과였고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 등 서얼 4인방의 등장도 할당제의 비율에 집착했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대대적인 인사 발탁이었다.

 

‘인사가 만사라고들 한다. 어떤 조직이든, 기업이든 최고의 성공을 거두는 비결은 최적의 인재를 배치하는 것이다. 역사가 증명하는 것처럼 할당제를 실시한다고 파벌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당동벌이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리더가 깨어 있는 수밖에 없다. 일단 리더부터 할당제에 대한 환상을 깨뜨려야 한다. 그 다음 조직원들도 할당제에 대한 환상을 깨고, 할당제에 기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리더의 몫이다. 리더의 생각이 깨어 있는 이런 조직이야말로 공정한 경쟁과 노력이 살아 숨 쉬는 조직이고, 영조와 정조가 꿈꾸던 조선 르네상스의 이상이다.

 

 

노혜경 덕성여대 연구교수 hkroh68@hotmail.com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한국사학) 학위를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을 지냈고 강남대, 광운대, 충북대 강사로 활동했다. 저서로 <영조어제해제6>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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