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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무적 로마군은 지휘관이 무능해도 이긴다고?

임용한 | 81호 (2011년 5월 Issue 2)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강자와 약자의 대결에서 약자가 이길 수 있는 유력한 방법이 기습과 매복이다. 하지만 둘 다 생각처럼 쉽지 않다. 제대로 훈련된 병사들이 정석대로 경계를 유지하며 수색·정찰조를 운영한다면기습을 당하거나 매복에 걸릴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사에는 수많은 성공사례들이 있다. 강자의 패배, 약자의 승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전투가 서기 9년 독일의 토이토부르크 숲(독일어로는토이토부르거발트·Teutoburger Wald’)에서 벌어진 로마군과 게르만족의 전투였다.

로마 제국의 정복전쟁

카이사르가 정복한 갈리아(오늘날 프랑스) 땅은 라인강의 서쪽이었다. 갈리아 정복전에서 로마군은 탁월한 전술과 공병술을 발휘해 문명화된 군대의 힘을 여지없이 보여줬다. 현대인들은 믿기 어렵겠지만 로마군과 당시 갈리아에 거주하던 골족 간 싸움은 19세기 총과 대포로 무장한 유럽군대와 아프리카 원주민의 전투만큼이나 압도적인 격차를 보여줬다.

그 로마군단의 진격이 라인강 동쪽에서 멈췄다. 검은 숲이라고 불리는 게르만 지역은 갈리아 지역보다 더 음습하고 거칠고 야만적이었다. 하지만 로마군이 진격을 멈춰 선 진정한 이유는 병력과 병참의 부족이었다. 당시 로마는 계속된 정복 전쟁으로 더 이상 팽창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한동안 내치에 주력했다. 그러나 만년이 되자 갑자기 전쟁에 욕심을 낸다. 그는 게르만 땅을 차지하기 위해 유능한 장군이었던 드루수스를 파견했다. 드루수스는 게르마니아로 진군해 엘베강 서쪽 지역을 거의 차지했다. 그러나 기원전 9년 낙마 사고로 죽고 만다.

드루수스의 과업은 그의 형인 티베리우스가 이어 받았다. 카이사르 못지않은 명장이던 그는 더욱 효과적으로 게르마니아 정복을 완수했다. 수많은 게르만 부족이 투항했다. 그 중에는 가장 호전적이라고 불리던 케루스키족도 있었다.

게르만의 야심가 아르미니우스

대체로 이 무렵부터 로마군은 너무 넓어진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이민족도 로마군으로 편입시키는 정책을 시행했다. 여기에는 케루스키족의 젊은 왕자 아르미니우스도 포함돼 있었다. 티베리우스의 군에 입대한 아르미니우스는 티베리우스가 발칸반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자 그를 따라나섰다. 그는 기병대를 지휘하며 전공을 세웠고로마는 그 보답으로 아르미니우스에게 시민권과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한편 티베리우스가 발칸으로 떠난 이후 그의 후임으로 바루스가 파견됐다. 바루스는 이전의 두 장군과 달리 행정 관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행정이라도 잘했으면 다행인데 그는 탐욕스럽기까지 했다. 바루스에 대한 게르만족의 불만이 높아갈 무렵, 로마로부터 시민권과 기사 작위를 받은 아르미니우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바루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개명된 이 청년은 로마의 문명만이 아니라 야심까지 품고 귀향했다.

아르미니우스는 똑똑하고 야심이 가득한 영웅의 풍모를 지닌 인물이었다. 야심을 지닌 아르미니우스의 라이벌은 그의 삼촌 세게스티스였다. 아르미니우스는 세게스티스의 딸 투스넬다와 결혼했지만 삼촌과 조카의 관계는 더 나빠졌다. (투스넬다도 원래 다른 사람과 결혼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아르미니우스는 바루스가 그를 밀어줄 것을 기대했던 것 같은데, 바루스도 아르미니우스를 더 이상 키워줄 마음은 없었다. 여기에 실망했기 때문인지, 혹은 처음부터 그에게 강렬한 민족주의적 열망이 있었기 때문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아르미니우스는 비밀리에 게르만 부족들을 모아 반란을 준비한다.

검은 숲, 토이토부르거발트(Teutoburger Wald)

게르만 부족 연맹을 결성한 아르마니우스는 서기 9, 바루스를 찾아가 케루스키족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거짓 정보를 흘리며 자신이 진압을 돕겠다고 자원했다. 반군의 주둔지는 로마군의 숙영지로부터 약 이틀거리에 있었다. 바루스는 즉시 휘하 3개 군단을 전부 동원해 진격을 시작했다. 이 군단은 로마 군단 중에서도 최정예에 속했다.

이때 아르미니우스와 달리 로마의 충실한 지지자였던 세게스티스가 진짜 반란의 주도자는 아르미니우스이며 게르만 연합군이 요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알려왔다. 세게스티스는 두 번이나 전갈을 보냈지만 바루스는 무시했다. 이 정보가 진짜라고 해도 바루스는 게르만족의 습격은 충분히 물리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당시까지도 게르만족은 체격은 우수했지만 무기와 장비는 보잘 것 없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에 의하면 게르마니아에는 철이 부족해 무장이 보잘 것 없었다. 보병이나 기병이나 방패와 창이 주를 이뤘다. 창은 뾰쪽한 쇠로 창날만 만들어 나무자루에 꽂은 원시적인 것이었다. 투창과 찌르기용 창의 구분도 없었다. 철이 부족해서 칼을 지닌 자는 극히 드물었고 대개가 지휘용이었다. 방패도 거의가 나무 방패로 물푸레나무, 단풍나무, 오리나무로 된 얇은 판자로 만들었다. 갑옷은커녕 투구를 쓴 사람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전열도 단순해서 전체 전선을 아우르는 대형 배치를 하지 않고 그저 쐐기꼴 대형으로 뭉쳐서 여기저기 포진했다. 로마군보다 나은 점이라면 기병인데, 말은 작고 멋없고 속도도 빠르지 않아서 압도적으로 우세하진 않았다.

자신감이 넘친 바루스는 신속하게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숲과 늪지대를 횡단하는 최단거리를 택했다. 이 숲(토이토부르거발트)의 위치는 오랫동안 현재의 하노버와 도르트문트 사이에 있는 곳으로 알려져 왔지만, 1987년의 발굴로 40km 정도 북쪽에 있는 칼크리제 숲으로 확인됐다.

이 숲 한쪽은 수풀이 울창한 높은 언덕, 한쪽은 늪지대로 구성된 좁은 통로가 있었다.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은 언덕 비탈에 형성된 좁은 길 밖에 없었다. 길이 좁아 로마군은 잘해야 1, 2열 종대로 행군해야 했고, 그들의 자랑인 밀집대형은 형성할 수 없었다.

아르미니우스의 지휘 하에 게르만족은 이 길을 내려다보는 언덕 비탈 위에 길이 1.5km에 달하는 참호를 팠다. 땅도 1.5m 깊이 정도로 파서 매복할 수 있는 참호를 만든 후 그 위에 잔디를 입히고 나뭇가지를 채워 위장했다. 거의 5000명 내지 7000명이 매복할 수 있는 규모였다. 그 뒤쪽 숲 속에 그만한 병력이 또 매복해 있었다. 이 참호도 1987년에 발견됐는데, 로마군의 정찰대는 이 위장 진지를 탐지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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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용한

    임용한yhkmyy@hanmail.net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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