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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역사

장수 생명체의 비결, ‘시작이 좋아야 좋다’

서광원 | 337호 (2022년 01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변화무쌍한 시대에도 오랜 시간 동안 초기 모습을 유지해 장수하는 생명체들이 있다. 이들은 남들보다 좋은 출발점에 설 수 있도록 기나긴 준비 과정을 거쳐 변화하지 않고도 긴 시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철저한 준비 끝에 사업을 개시하고 순항한 덕분에 인력 조정이나 사업 구조 개편과 같은 일에 에너지를 쓰지 않을 수 있었던 기업처럼 말이다. 일단 시작부터 하고 시행 착오를 통해 경쟁력을 축적하는 방식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란 것을 보여준다.



모든 것은 변한다. 당연은 하지만 피부로는 잘 와 닿지 않는 이 말이 요즘 피부 정도가 아니라 ‘심장 한가운데에 팍팍 꽂힌다’는 이들이 많다. 그야말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세상이 돼가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명확해지는 것도 있다. 어떤 식으로든 변해야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압박감이다.

‘세상의 패러다임이 변하리라’고 모두가 예상했던 21세기가 시작된 지 불과 20여 년이 지났을 뿐인 데도 이러니 몇백만 년, 몇천만 년이라는 시간은 어떨까? 요즘 상황을 생각하면 감이 잡히질 않는다. 오로지 변화하고 진화하는 것만이 해결책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무려 1억 년 이상 살아온 장수 생명체 중에는 이 오랜 시간 동안, 출현할 때의 모습 거의 그대로 변함없이 살아오고 있는 주인공들이 꽤 있다. 어마어마한 시간을 통과하면서도 초기의 형태를 바꾸지 않고 거의 그대로 살아왔다는 건 정말이지 예외적인 ‘사건’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데 이는 생존 전략 차원에서 대단히 좋은 시작을 했다는 뜻이다. 워낙 탁월한 형태로 출발했기에 어떤 환경에서도 고칠 필요가 없었다는 의미인 까닭이다.

고칠 필요가 없다는 건 대단한 이점이다. 무엇보다 형태를 개선하거나 진화하는 데 투입해야 할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체의 형태는 망치 같은 도구로 뚝딱뚝딱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다. 수많은 세대를 거치며 유전자를 바꿔야 한다. 이러는 동안 세상이 다소곳하게 변화의 시간을 기다려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러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이 와중에 다른 방향으로 환경이 바뀌면 그동안의 노력은 헛수고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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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의 ‘장수 편’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 상어와 악어가 대표적이다. 상어의 경우 3억여 년 전 화석(스테타칸투스)과 비교해 보면 몸 크기가 훨씬 커지긴 했지만(당시에는 70㎝였다) 형태는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빨래판처럼 생겼던 등지느러미가 현재처럼 바뀐 게 다를 뿐이다. 크게 바꿀 필요가 없었을 정도로 처음부터 괜찮은 형태로 시작했다는 얘기다. 악어는 2억여 년 전과 비교하면 덩치조차 거의 그대로다. 화석에 존재하는 뼈대를 보면 연대 측정을 하지 않을 경우 얼핏 구분을 잘할 수 없을 정도다. 거북도 마찬가지다. 2억1000만 년 전의 화석과 비교하면 등딱지가 완성되지 않았을 뿐 거의 똑같다. 말 그대로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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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 규모의 멸종 사태라 해도 해당 지역은 지옥과 같은 악조건의 시간이 몇십 년, 길게는 몇백 년까지 이어지는 게 대부분이다. 이럴 땐 보통 몸집이 작거나 땅속에 사는 생명체들이 살아남는 경향이 많다. 직접적인 피해를 덜 받을 수 있어서다. 물론 다른 생존법도 있다. 잠자리나 고사리처럼 몸집을 확 줄이는 것이다. 잠자리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3억 년 전쯤엔 날개 너비가 최대 2m나 될 만큼 거대한 시절이 있었다. 고사리의 조상 고비속은 3억6000만여 년 전 출현한 뒤 한창 번성하던 시절 키가 보통 15m나 됐던 드높았던 과거가 있었다. 하지만 숱한 시련을 거치며 살아남기 위해 덩치를 줄였다. 커다란 덩치로 살아남는다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방증이다.

시작이 좋았던 상어와 악어는 여기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아낄 수 있었을 것이고 이걸 차별화된 다른 기능을 개발하는 데 썼을 것이다. 생존의 돌파구 찾기가 훨씬 용이했음은 당연지사다. 조직 구조나 회사 형태가 좋아 불경기 때마다 개편이다 뭐다 하며 흔들리지 않은 덕분에 항상 잘나가는 일류 기업처럼 말이다. 시작을 잘한다는 건 이렇게 중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시작’은 덩치보다는 생존 전략을 뜻한다. 이전 회에서 생존력이 얼마나 탁월한지 자세히 소개했던 바퀴벌레 역시 3억5000만 년 전 석탄기 습한 숲속에서 나타난 이후 겉모습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이들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자연에서 성취한 기계공학의 진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할 정도로 이들의 신체 구조를 높이 평가한다.1

어떤 구조길래 ‘기계공학의 진수’라는 극찬을 들을까? 이상한 건 아무리 들여다봐도 무엇 하나 특화된 게 없다는 것이다. 곤충을 기준으로 보면 이들만 갖고 있는 유일한 신체 기관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물의 왕국 전체에서 가장 민감한 성능이라고 할 수 있는 미엽도 이들만 갖고 있는 게 아니다. 레이더와 같은 기능을 탁월하게 업그레이드했을 뿐이다. 그럼 뭘까?

두드러질 게 없는 이런 ‘일반적인 구조’, 그러니까 특이할 정도로 특화돼 있지 않은 이것이 바퀴벌레의 강점이라는 게 학자들의 결론이다. 어떤 상황에서나 적응할 수 있는 가장 간결하고 효과적인 구조인 까닭이다. 마치 가장 간단한 필기구인 연필이 최첨단 기술만 필요할 것 같은 우주에서도 쓸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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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억 년 넘게 변함없는 모습으로 살고 있는 투구게도 마찬가지다. 최근 호주 뉴잉글랜드대의 러셀 빅넬 교수는 미국 일리노이 메이존 크리크(Mazon Creek) 화석층에서 3억1000만 년 전의 투구게 화석을 발견했는데 놀랍게도 뇌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 화석의 주인공은 3억5890만∼2억9890만 년 전 석탄기를 살았던 ‘유프룹스 다나에(Euproops danae)’라는 종인데 이미 멸종하긴 했지만 뇌가 지금의 투구게와 다르지 않았다. 무슨 말인가 하면, 당시의 투구게들이 지금과 같은 크기의 뇌를 가지고 있었고, 현재 우리와 같이 살고 있는 투구게들은 그 조그만 뇌로 지금까지 3억 년 이상을 살아오고 있다는 뜻이다. 살아 보니 생존에 필요한 뇌가 딱 그 정도여서 굳이 더 영리해질 필요가 없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뇌가 크지 않고 덩치가 작아도 3억 년 이상 잘 살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 이들을 저 먼 원시에서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게 했을까? 말 그대로 투구같이 생긴 단단한 껍데기 덕분일까? 그럴 수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이들의 특수한 혈액이다. 이들은 우리와 달리 파란 피를 갖고 있는데 이 핏속에는 이들이 오래전 개발한 특별한 물질이 들어 있다. 우리처럼 병원균과 싸우는 백혈구는 없지만 이들의 피는 침입하는 이물질을 민감하게 알아채 그들과 함께 굳어져 버린다.

안타까운 건 수억 년 넘게 이들을 살아 있게 한 이 특수한 피가 요즘 이들을 사지로 내몰고 있다는 것이다. 제약 업체들이 신약 물질을 개발할 때 해당 물질에 독성이 포함됐는지 여부를 가려내기 위해 성능이 뛰어난 이 피를 쓰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백신 생산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수많은 투구게가 억지로 ‘헌혈’을 당한 후 바다로 돌려보내 진다. 무차별적으로 ‘헌혈’을 당한 후 버려졌던 예전에 비해 요즘은 일정량만 ‘헌혈’한 후 돌려보내 지지만 ‘강제 헌혈’이 생존에 이로울 리 없다. 어쨌든 이 피는 갈수록 가치가 높아져 1리터에 수천만 원을 호가한다.

사실 시작을 잘한 덕분에 생명의 역사에서 그 어느 생명체보다 오랜 번성을 누린 대표적인 주인공은 공룡이다. 우리는 공룡을 멸종 관점으로만 보기에 온갖 편견을 갖고 있지만 공룡은 사실 대단한 존재였다. 지구의 지배자로 살았던 기간이 무려 1억5000만 년 이상이다.2 우리 인류는 호모에렉투스까지 간다 해도 그 역사가 200만 년 정도밖에 안 되는데 말이다. 심지어 호모에렉투스는 지구의 주인공이었다고 할 만한 증거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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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이 지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고, 그것도 오랫동안 지배적인 위치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시작이 좋았던 덕분이다. 우리는 공룡에 대해 그저 ‘크다’ ‘거대하다’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어 처음부터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처음부터 큰 생명체는 없다. 적응력을 키워 커질 뿐이다. 공룡은 출현 초기라 할 수 있는 2억4000만 년 전 전후에는 꼬리까지의 길이가 1∼2m 정도에 불과했다. 꼬리를 제외한 몸통만 따지면 1m쯤이었다. 단기간에 커진 것도 아니었다. 이들의 번성은 의외로 종말과 같은 세상의 혼란 속에서 시작됐다.

2억5000만 년 전쯤 지구는 엄청난 대멸종 사태를 맞았다. 당시 현존했던 종의 95%가 절멸됐던 페름기 대멸종이었는데 이후 지구는 좀처럼 예전 환경을 되찾지 못했다. 1억 년 가까이 저산소 시대가 지속됐다. 지금은 21%쯤 되는 대기 중 산소가 11%까지 떨어졌던 시절인데 이 정도면 해발 4300m 수준이라 호흡하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2억 년 전을 전후해 다른 대멸종이 시작됐다. 지구의 모든 대륙이 하나로 뭉쳐져 있었던 초대륙 판게아가 분열하면서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땅이 갈라져 나가기 시작했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시뻘건 용암이 솟구쳐 오르는 화산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올랐고 이 때문에 대기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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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어려운 시절에는 무조건 버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단시간에 지나갈 게 아니라면 새로운 해결책을 만드는 게 낫다. 예전의 좋은 시절이 다시 온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더 그렇다.

공룡은 출현 초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시대 환경에 빠르게 적응했다. 가장 먼저 그 환경이 요구하는 능력, 그러니까 저 산소 시대에 맞는 폐(허파)를 개발했다. 이전의 폐들은 폐활량이 적었다. 보통 파충류는 도마뱀이나 악어가 그렇듯 배를 땅에 댈 듯하면서 네 개의 다리를 마치 배의 노를 젓듯 휘젓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뒤뚱거리며 나아갈 수밖에 없다. 다리를 크게 디딜수록 옆구리가 접었다 펴졌다 하면서 몸이 좌우로 왔다 갔다 한다. 숨을 쉬면서 나아갈 수도 없다. 움직일 때마다 폐가 눌리기 때문이다. 작은 도마뱀이 후루룩 달아나다 잠시 멈추는 것도 숨을 참고 달리다 보니 숨 쉴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다. 페름기 대멸종 사건 전까지는 산소가 많아 이런 폐로도 살기 괜찮았지만 그런 세상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공룡은 출현 초기 이런 원시적인 폐를 혁신, 공기주머니를 하나 더 만들어 효율을 높였다. 공룡의 후예라고 하는 새들이 이런 호흡기를 갖고 있는데 공기주머니가 두 개이면 적은 산소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폐가 하나인 우리는 숨을 들이쉰 다음, 다시 내뱉어야 새로운 공기를 흡입할 수 있지만 이들은 다르다. 들이마신 공기를 두 번째 공기주머니로 보내는 동안 새로운 공기를 연이어 들이마실 수 있다. 2억 년이나 더 지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폐보다 에너지 효율이 최소한 30% 이상 높은 방식이다. 세 배까지 높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혁신적인 능력을 일찌감치 갖추고 오랫동안 유지했기에 이후에도 1억5000만 년 이상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시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장수 생명체들에게서 볼 수 있는 이런 특성은 불확실성 시대를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적지 않다. 특히 시작이 좋아야 좋다는 말이 그렇듯 시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준다.

어떤 일을 시작하는 법은 크게 두 가지다. 일단 시작하고 나서 계속 더 나은 방법을 만들어내고 개선해 나가는 방법이 첫 번째라면, 다른 하나는 처음부터 잘하는 것이다. 전자가 시행착오를 통해 성장하는 방식이라면, 후자는 시작하기 전 신중한 준비로 시행착오에 들어가는 에너지와 시간을 줄이는 이점이 있다. 둘 중 어느 것이 절대적으로 좋다고 할 수는 없다. 환경과 여건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조심할 것이 있다.

대개 환경이 불확실할수록 전자를 우선하는 경향이 있다. 상황이 긴박하고 시간이 없기에 일단 시작하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시행착오를 통한 경쟁력 축적 방식이 언제, 어디서나 최선인 건 아니다. 불확실성 시대에 절대적인 최선이 어디 있겠는가? 일단 시작하고 빨리 실패하는 이런 방식이 가능하고 효과적인 사람이나 회사, 그리고 상황이 있을 뿐이다. 모든 사람에게 다 맞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준비나 경쟁력을 갖춘 사람, 또는 기업에 맞다는 말이다. 실패해도 다시 시도할 수 있는 능력과 역량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준비도 없이 시작했다가는 몇 번의 시도만에 땅바닥에 나동그라지기 십상이다. 특히 특정 분야는 실력이 엇비슷한 선수들이 경쟁하는 달리기와 비슷한 경우가 많은데 이런 상황에서는 한 번 실수가 그대로 ‘게임 끝’으로 이어진다. 달리기에서 한 번 넘어지면 다시 달린다 해도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 힘들 듯이 말이다. 이런 곳에서 준비 없는 시작은 우연에 운명을 맡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적군이 몰려온다고 일단 총부터 쏘는 건 현명한 대책이 아니다. 적진 깊숙이 들어가 싸우는 해병대에서 가장 자랑거리가 되는 건 적이 어느 정도 가까이 왔을 때까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라고 한다. 두려움을 이기는 강심장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만큼 시작이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급하다고 바늘허리에 실을 맬 수는 없다.

상황이 불확실할수록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따라 이후 모든 것이 달라진다. 지뢰밭 헤쳐 가기나 암벽 타기에 비유할 수 있는 요즘 세상에서는 더 그렇다. 둘 다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것 자체가 위험천만하기에 처음부터 경로를 잘 선택해야 한다. 일단 나아가면 되돌아오기 힘들다. ‘아니면 말고’가 통하지 않는다. 복잡계에서 ‘경로 의존’ 이론이라고 하는 이런 세상의 속성은 쉽게 말해 스키장에서 코스를 선택하는 것과 같다. 언덕 위에서 특정 경로를 타면 계속 그 코스로만 내려와야 하듯 말이다. 예전에는 ‘시작이 반’이었지만 이제는 갈수록 ‘시작이 전부’인 세상이 돼가고 있는 것이다. 시작을 잘못해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사라지는 일들과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특히 복잡계 관점에서 보면 시작의 중요성은 더 높아진다. 1961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기상학과 에드워드 로렌츠 교수는 컴퓨터 모델을 이용해 날씨를 예측하는 모델을 개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결과들이 나와 그를 괴롭혔다. 계산을 하다 보니 소수점 이하 숫자들이 생겨 편의상 소수점 셋째 자리에서 반올림을 했는데 이것이 완전히 다른 결과를 도출했던 것이다. 소수점 셋째 자리 이하라면 다들 그렇듯, 끼치는 영향이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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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을 괴롭힌 이 문제를 파고들어 그 유명한 ‘나비 효과’라는 단어를 만들었는데 핵심은 얼핏 아주 사소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로렌츠 교수의 말대로 하자면 “초기 조건에서의 아주 작은 차이가 나중에 매우 다른 결과를 낳는다.” 앞에서 말한 방식으로 하자면 초기 조건의 민감성이 강해지고 일단 시작되면 되돌릴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예측 또한 불가능하다. 지금 일어나는 사소한 일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원인이 결과에 비례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10을 넣으면 20이라는 결과가 으레 나왔다면 이제는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다. 예측이 어려운 게 아니라 예측이 불가능해졌다. 시스템 이론가인 어빈 라즐로가 한 말이 인상적이다.3

“‘보이지 않는 손’은 오래전부터 ‘보이지 않는 발’이기도 했다. 시스템에 일치하지 않는 모든 것을 밟아버리는 발.”

복잡한 사건일수록 초기 대응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 범죄 전문가가 한 말이 있다.

“한국에서 미제 사건이 일어나는 이유의 95%는 능력 부족이 아니라 초기 수사가 잘못된 것이다.”

초기 대응을 잘못한 탓에 엉망이 돼 어떻게 수사를 해야 할지 길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다시 수사하려고 해도 단서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런 일이 스포츠와 수사 분야에만 있을까? 시장에서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다. 예전에는 사소하다고 해서 그냥 넘기던 일이 일파만파로 커져 기업 자체를 위기에 몰아넣는 일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과거처럼 대응하다 일을 키워 호미로 막을 일을 불도저로도 막지 못하는 사태가 드물지 않다. 시작을, 아니 시작부터 잘해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일단 시작하고 보자’라는 말은 이제 지극히 신중하게 해야 할 말이 되고 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엄마 배 위에서 15분을 보낸 것과 그러지 않는 것이 엄마와 아기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고작 15분이 무슨 영향을 미칠까 싶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중요한 일일수록 어떤 시작을 하는가가 큰 영향을 미친다. 태어나자마자 엄마와 따뜻한 접촉을 했던 아기들은 확실히 덜 울었다. 태어난 직후만이 아니었다. 3개월 후 연구팀이 집으로 찾아가 관찰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엄마와 접촉했던 아기들은 그렇지 않은 아기들에 비해 더 많이 웃었다.

아기들만이 아니라 엄마들도 그랬다. 아기들과 따뜻한 접촉을 했던 엄마들은 그렇지 않은 엄마들보다 아기를 더 많이 감싸주었고 더 오래 아기의 얼굴을 들여다봤으며 뽀뽀도 자주 했다. 불과 15분의 투자가 만든 결과였다. 스웨덴 우메오대 페터르 드 샤토 교수와 브릿 비베리 교수의 연구 결과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더이상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이 복잡계 세상은 원인과 결과가 비례하지 않는다. 그러니 문제나 상황에 어떻게 접근하고 있고, 어떻게 시작하고 있는지 자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잘못된 시작으로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주저앉지 않으려면 말이다. 남다른 시작은 물론 이전과 다른 시작이 필요하다. 시작이 좋으면 끝이 좋을 가능성이 높아질 뿐만 아니라 이런 말도 들을 수 있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는 말 말이다.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 araseo11@naver.com
필자는 경향신문, 이코노미스트 등에서 경영 전문 기자로 활동했으며 대표 저서로는 대한민국 리더의 고민과 애환을 그려낸 『사장으로 산다는 것』을 비롯해 『사장의 자격』 『시작하라 그들처럼』 『사자도 굶어죽는다』 『살아있는 것들은 전략이 있다』 등이 있다.
  • 서광원 |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필자는 경향신문, 이코노미스트 등에서 경영 전문 기자로 활동했으며 대표 저서로는 대한민국 리더의 고민과 애환을 그려낸 『사장으로 산다는 것』을 비롯해 『사장의 자격』 『시작하라 그들처럼』 『사자도 굶어 죽는다』 『살아 있는 것들은 전략이 있다』 등이 있다.
    araseo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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