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검색버튼 메뉴버튼

전략으로 다시 읽는 역사

뛰어났던 조선 과학기술, 왜 쇠락했을까

최중경 | 334호 (2021년 12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복식부기, 화포 등 세계적 수준의 기술과 경영 체계를 물려받은 조선이 기술 후진국으로 전락한 이유는 기술을 육성하는 국가 시스템의 부재에서 찾을 수 있다. 사농공상을 기반으로 한 건국 이념은 근본적으로 기술을 경시했으며, 특히 1442년 장영실의 퇴장은 기술 축적의 맥을 끊는 계기가 됐다. 반면 은 제련 기술 등 조선에서 외면당한 신기술은 일본으로 흘러 들어가 일본의 비약적 성장을 이끌었다. 국가뿐 아니라 기업도 기술 개발뿐 아니라 그것을 상용화하고 보호하는 총체적인 시스템을 설계하는 데 각별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고려 시대에는 세계 일류를 자랑하는 과학 기술이 수두룩했다. 먼저 고려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개발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 1 은 독일의 구텐베르크보다 78년 앞섰다. 목판 인쇄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는 당시 책의 제작과 보급이 활발했고 지식의 전파가 체계적으로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2 또 고려 말 최무선이 우왕의 지시로 화통도감을 설치해 화포를 개발하고 1380년 진포해전에서 수군 전함에 배치해 운용한 것도 창의적인 시도였다. 이는 동양 최초의 함포 운용이었을 뿐 아니라 세계 최초로 함포를 사용해 승리한 해전이라고 할 수 있다.3 또 고려 수도 개경의 상공인들은 서양보다 200년 이상 앞서 복식부기(Double Entry Book-keeping)를 사용했다. 송도사개치부법(松都四介治簿法)이라 불리는 개경 상공인들의 복식부기 기록 방식은 서양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만 대차대조표, 손익계산서, 현금흐름표를 생산했다는 점에서 서양의 복식부기와 차이가 없었다. 또 수익적 지출과 자본적 지출을 명확히 구분했다. 4 독일의 지성 괴테가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극찬한 바 있는 복식부기는 서구 자본주의 발전을 이끈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놀랍게도 고려가 유럽보다 앞서서 사용했고 조선 시대에도 계승된 것이다. 조선 초기 상업과 공업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의미 있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고려 시대에 축적된 과학기술은 조선의 세종 시대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많이 계승됐다. 일례로 세종대왕 시절 조선군의 화포 체계는 세계적인 수준으로까지 올라갔는데 세계 최초의 로켓탄이라 할 수 있는 신기전이 개발되고, 권총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10㎝ 내외 길이의 세총통이 개인 화기로 개발됐다. 세종 시대 세계 최초로 제작된 측우기는 강우량을 측정하는 기구라는 하드웨어 측면에서도 탁월했지만 강우량을 측정해 비가 오는 패턴을 연구하고 자료를 축적해 농사에 활용하고자 한 것이 소프트웨어의 혁신이라는 측면에서 더 의미가 있다.

흔히 고려청자의 기술적 우수성과 탁월한 예술성을 강조하면서 조선백자는 그 아래 수준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조선백자는 도자기 제조 기술에서 소재 혁신(진흙 → 고령토)을 이뤘다는 점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맑고 영롱한 빛을 발하는 조선백자에 일본식 도안과 채색을 한 일본자기는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큰돈을 벌었다.

하지만 이처럼 세계 수준의 기술과 경영 체계를 갖추고 출발해 세종대왕 시절에 꽃을 피웠던 조선은 후기에 기술 후진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의 힘은 과학과 기술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해야 산업 생산성이 높아지고 파괴력과 정확도가 큰 무기 개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기와 선동으로 과학과 기술을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국가는 이미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과학 기술의 쇠퇴로 인해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왜 세계 수준이었던 조선 초기 과학기술이 조선왕조 500년을 거치며 하위권으로 전락했을지 분석해보고자 한다.

125


‘사농공상’ 건국이념의 한계

조선은 성리학을 받들면서 중농주의에 입각한 신분 질서를 구축했다. 소위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서열이 있었고 노예제도를 유지했다. 조선의 노예제도는 19세기 미국의 노예제도에 비해 가혹함에서 뒤지지 않았지만 같은 민족을 노예로 삼았다는 점에서 달랐다. 조선의 엄격한 신분제도 아래서 공업에 종사하는 기술자와 상업에 종사하는 경영인들은 노예 바로 위의 하층민으로 대부분 빈곤하게 살았다. 이들은 지배층의 착취 대상이 됨으로써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새로운 기술과 신상품을 개발해도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자유롭게 유통하지 못하면 아예 처음부터 노력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런 면에서 조선에서의 기술 축적과 상용화를 어렵게 만든 단초에는 건국이념 그 자체가 있었다.

조선의 건국이념이 사농공상을 기반으로 했다는 사실이 가진 한계는 미국과 대조했을 때 더 분명해진다. 미국의 건국이념은 자유로운 창업과 신기술을 북돋우면서 미국의 성장 토대가 됐다. 미국의 독립선언서와 헌법에서 제시된 건국이념은 크게 세 가지, 첫째, 개인의 자유(Individual Freedom), 둘째, 기업하는 자유(Free Enterprise), 셋째, 작은 정부(Limited Government)다. 더 나아가 미국은 유럽에 문호를 개방해 적극적으로 이민을 받아들이고 특허권 보호 제도를 세계 최초로 도입해 창의력의 가치를 인정했다. 미국의 건국이념과 이민제도, 특허권보호제도는 서로 선순환을 일으키면서 독립한 지 100년이 채 지나지 않은 농업 국가 미국을 세계 제1의 산업대국으로 올려놓았다.

일례로 유럽의 기술자는 신기술을 개발해서 상용화하려면 동업자조합의 동의를 받든가 왕실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이미 기득권자가 된 동업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고 신기술의 적용을 쉽게 허용할 리 만무했고 왕실도 기존의 질서를 깨는 데 적극적이기 어려웠다. 이에 신기술을 가진 유럽의 기술자들은 좌절하기보다 미국행 선박에 몸을 실었다. 미국에 오면 자유로운 창업이 가능했고 신기술을 특허제도로 보호해주기까지 했다. 게다가 이민이 허용되니 말 통하는 고향 사람들을 노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19세기 이후 인류의 생활에 혁신을 가져온 발명품 거의 모두가 미국 기업에서 개발된 이유와 배경은 바로 이런 미국의 국가 시스템에서 찾을 수 있다. 건국이념, 이민 제도, 특허제도로 구성된 국가 시스템의 설계가 오늘의 미국을 만든 것이다. 소위 한강의 기적이라 부르는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도 이런 미국식 자유기업 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장영실의 퇴장과 일본의 발전

그렇다면 언제부터 조선의 기술이 쇠락하기 시작했을까? 조선 건국 후 반세기가 지난 1442년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1442년은 세종의 관심을 받으며 측우기, 해시계, 물시계, 천문관측 장비 등 여러 가지 발명을 주도했던 천재 과학자 장영실이 곤장을 맞고 역사에서 사라진 해이다. 장영실이 세종의 어가(御駕)를 개조했는데 이동 중 이 어가가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결국 임금에게 불경죄를 진 것이라 해서 처벌을 받은 것이다.

127


그런데 이 사건이 과연 장영실이 직접 처벌을 받을 만한 일이었는지 의심스럽다. 장영실이 손재주가 있다고는 하나 대호군 지위에 있던 그가 어가를 개조하는 일을 직접 하다가 실수를 한 것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누군가 장영실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책임을 장영실에게 씌웠거나 어가를 의도적으로 손상시켰을 가능성은 없을까? 천민 출신으로서 고위 관료가 된 장영실은 벼슬이 오를 때마다 많은 신료가 신분 질서를 내세우며 불편해 했다. 앞뒤가 석연치 않은 장영실의 퇴장은 이후 성리학적 질서 의식이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압도하게 된 계기이자 가시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그의 비참한 퇴장을 지켜본 조선의 기술자들은 충격을 받고 기술 개발과 습득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을 가능성이 높다. 더군다나 세종이 죽고 난 뒤, 세조 때에 이르자 집현전은 문을 닫고 만다. 그로 인해 많은 발명품이 방치되고 발명품을 운용할 수 있는 인력이 사라지게 된 것은 통탄할 일이다. 1713년 숙종이 궁중에 있는 발명품에 대해 아는 자가 없다고 탄식했을 정도로 조선의 과학기술은 퇴보하고 있었다. 궁중에 있던 해시계 앙부일구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는지 몰라 1852년 철종은 앙부일구가 어디에 있는지 하문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5 이처럼 기술자를 천시하는 사회에서는 이들이 노력하기를 기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후대가 기술을 계승해 발전시켜야 할 동기부여도 부족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조선에서 외면당한 신기술이 이웃 일본으로 흘러 들어가 활짝 꽃피우며 일본의 비약적 성장을 이끈 점은 바로 지나쳐서는 안 될 역사의 아이러니다. 일본이 조선으로부터 이식해 꽃피운 대표적인 기술은 조선백자와 은 제련 기술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 장수들은 조선 도공을 데려다가 극진히 대접하면서 조선백자에 일본의 문화를 녹인 일본 도자기를 만들었고 이를 유럽에 수출해 큰 인기를 끌었다. 일본 사가현(佐賀縣)의 영주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가 데려간 조선 도공 이삼평은 일본에서 고령토 광맥을 찾아내 백자를 생산했다. 이삼평이 지역 신사에서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같은 반열로 대우받는 것을 보면 일본에서 조선과는 달리 조선 도공들의 사회적 지위가 월등하게 높았음을 보여준다.

또 조선의 제련 기술 6 은 일본을 세계적인 은 생산 국가로 등극시켰다. 연산군 시대에 개발된 은 제련 기술인 연은분리법은 세계 최첨단의 효율성을 가진 신기술이었다. 당시 세계 무역의 결제 수단이 은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은 제련 기술은 국가의 부를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는 기회였지만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은이 많이 생산되면 사치 풍조가 생긴다는 것이 반정으로 왕이 된 중종이 신기술을 버린 이유였다. 성리학적 가치관에 함몰된 지식인의 시야가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 보여준 사례다. 획기적인 은 제련 기술을 개발한 조선의 단천 은광산은 폐광되다시피 한 데 반해 일본의 이와미 은광산(石見銀山)은 조선의 기술을 받아들여 볼리비아의 포토시(Potosi) 은광산과 어깨를 견주는 세계적인 은광산이 됐다. 매장량이 많아서라기보다는 제련 과정의 속도와 수율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당시 세계무역의 결제통화 역할을 하는 귀한 자원인 은을 활용해 세계 무역 질서에 참여해 국력을 착실히 쌓았다. 19세기 세계 최대의 인구 밀집 도시는 뉴욕도, 런던도, 북경도 아니고 도쿠가와 막부의 수도인 에도(江戶, 현재의 도쿄)였다.

이렇게 이념이 산업을 누름으로써 국가 발전의 기회가 무산됐던 과거가 우리에겐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 반복되는 조짐이 보여 걱정이다. ‘녹색에너지’라는 이념이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산업을 위축시키면서 대한민국의 미래 먹거리를 스스로 내던지고 있는 것이 대표적 사례라고 생각한다.

비슷한 예는 러시아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러시아 공산혁명 직후 보통 교육이 실시되면서 농노의 자식들도 정규교육을 받게 됐다. 인력의 풀이 획기적으로 커지고, 많은 전문가가 양성되고, 그들이 제자들을 훈련하면서 소련의 과학기술은 반세기가 채 지나지 않아 세계 최고 수준이 됐다.7 그리고 소련은 미국을 제치고 가장 먼저 유인 우주선 발사에 성공했다. 유인 우주선을 운용하려면 우주선과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로켓의 운동궤적(Trajectory)을 정확히 계산해야 하는데 그 수학적 기초가 되는 동적 프로그래밍(Dynamic Programming)을 가능케 하는 ‘운동방정식(Equation of Motion)’ 이론이 러시아 수학자에 의해 최초로 고안됐다.

그런데 소련의 독주는 오래 가지 않아 제동이 걸렸다. 사회주의 체제 아래서 개인의 창의와 노력에 대한 보상 시스템이 취약해 발전의 모멘텀을 계속 유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우수한 학생들이 수학, 물리학, 화학, 공학과 같이 어려운 분야로 가길 꺼리면서 다시 반세기가 채 지나기도 전에 미국에 뒤지게 됐다. 그리고 개혁 개방으로 연방이 해체되는 운명을 맞이한 것이다.

128


시스템 설계의 중요성

국가나 기업이 영속적으로 발전하려면 기본적인 시스템 설계를 확실하게 해야 한다. 모든 구성원을 똑같이 대우해서도, 구성원 간 대우에 큰 차별이 있어서도 안 된다. 모든 구성원을 평등하게 대우하면 추가적인 노력이 필요한 자리를 기피하게 되고 개인의 역량이 100% 발휘되지 않아 전체 시스템의 효율성이 떨어지고 시스템의 영속성이 위협받게 된다. 반대로 차별 대우가 심하면 구성원 간 단합이 어려워지고, 사기가 떨어지고,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모멘텀이 사라지면서 시스템이 서서히 가라앉게 된다.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수준에서 이뤄지는 국가와 기업이 영속성을 얻게 된다. 조선은 이런 기본 시스템의 설계 측면에서 실패했다. 소수의 지배 계층만 누리고 사는 불평등한 시스템이었을 뿐 아니라 양반끼리만 예의를 갖추고 일반인에게는 무례한 모순된 시스템이었다.

이런 시스템에서 구성원의 힘이 모이고 과학기술이 발전하길 바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선은 출발점에서는 상당한 수준의 기술력을 갖추고 창의력도 세계적인 수준이었지만 잘못된 시스템이 모두 뭉개버렸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기술자들이 능력을 발휘하고 그들에게 훈련받은 제자들은 불만스럽긴 해도 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이 후진을 양성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우선 지원자가 적었을 것이고 본인도 기술을 전수할 흥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임진왜란 중에도 기관총의 원조 격인 화차, 세계 최초로 신관을 장착해 폭발 시점을 조절한 비격진천뢰와 같은 명품 화약 무기를 개발했지만 이를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어서 부국강병의 길로 연결되지 못했다. 만약 조선이 세계 최첨단의 은 제련 기술을 활용해 국부를 쌓고 명품 화약 무기를 계승 발전시켰다면 명나라에 이어 중원의 주인이 된 나라는 청나라가 아닌 조선이었을 것이다. 미국은 개인과 기업의 자유와 창의력을 존중하는 시스템을 만들었기에 독립 후 1세기도 채 지나지 않아 농업 국가에서 산업국가로 탈바꿈해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올랐다. 시장에서의 경쟁을 통해 보상 수준이 정해지는 미국의 시스템이 어떻게 창의력을 이끌어내고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지 제대로 들여다봐야 한다.

그렇다면 기업의 기본 시스템은 어떠한가? 한국 기업은 CEO에게 충분한 임기를 보장하지 않아 CEO가 빈 카운터(Bean Counter)8 로 전락하고 있다. 단기 이익을 추구해서 자리를 보전해야 하는 CEO가 장기적인 안목으로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신기술을 개발하고 시스템을 혁신하길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CEO 자리를 가급적 많은 사람이 돌아가며 해야 한다는 잠재적 인식은 평등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고 지도자의 무게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조선의 실패와 미국의 성공을 교훈 삼아 기업도 영속성을 갖춘 기본 시스템 설계에 관한 인식을 새로이 할 시점이다. 새로운 기술 개발도 중요하지만 개발된 기술이 상용화돼 시장에서 이익을 창출하도록 경영층이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또한 잠재력이 큰 신기술이 경쟁국 또는 경쟁 기업으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는 시스템을 갖추도록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다.


최중경 한국가이드스타 이사장 choijk1956@hanmail.net
필자는 33년간 고위 관료와 외교관을 지냈고 동국대 석좌교수, 고려대 석좌교수, 미국 Heritage 재단 방문연구원, 한국공인회계사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미 협력을 증진하는 민간단체인 한미협회의 회장과 자선단체 평가 업무를 수행하는 NGO인 한국가이드스타 이사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미국 하와이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저서로는 『청개구리 성공신화』 『워싱턴에서는 한국이 보이지 않는다』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가 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