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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개념화

“설득하기 전에 먼저 공감하라” 이순신은 알고 최만리는 몰랐다

김경묵 | 230호 (2017년 8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개념화된 문장은 논리적인 부분이 조금 부족하다 할지라도 공존하는 사람들의 삶과 연결된 것이어야 한다. 병사들의 공포심을 용기로 바꾸어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과 세종의 한글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최만리는 그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목숨에 기대지 마라”며 직접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선 이순신의 문장은 논리적으로는 최만리의 문장보다 못했을지 모르지만 병사들의 삶에 대한 ‘공감(共感)’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반면 중국을 섬겨야 하는 조선에서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일은 부당하다고 주장한 최만리의 문장에는 기득권을 대변하는 지식인들의 논리만 있었다. 삶과 연결되지 않는 문장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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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개념화하고 그 개념을 상품화한 것이 세상을 바꾼다

잠시 걸어보라. 그리고 뒤돌아보라. 나의 발자국들이 보이는가? 그것이 나의 인문(人文)이다. 인문이란 인간이 그리는 무늬이기 때문이다.1

매일매일 일에 치여서, 앞만 보고 걸으면서 나의 인문을 돌아볼 여유가 부족하지 않는가? 가끔은 뒤돌아서서 나의 인문을 가만히 느껴봐야 한다. 그리고 느낀 것을 말 또는 글로 정리해 봐야 한다. 그리고 정리된 말 또는 글을 동료들에게 설득할 목적으로 설명해 보라. 정리하고 설명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 나의 인문에 기반한 ‘생각의 개념화’ 과정이다.

개념은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른 여러 가지 생각(관념)을 일반화한 결과물이다. 동그라미를 예를 들면 ‘지정된 한 점과 동일한 거리에 있는 점들의 모임’, 이것이 동그라미의 개념이다. 생각의 개념화는 머릿속에 떠오른 여러 생각을 문장으로 정리하는 과정이다. 개념화가 세상을 바꾸는 시작인 이유는 이 과정을 거치며 머릿속 나만의 생각이 비로소 누구나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갖추기 때문이다. 개념화하지 않은 ‘생각’만으로는 소통과 설득에 실패할 확률이 높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에는 대부분 이러한 생각의 개념화 과정이 생략돼 있다. 새로운 것을 보면 그것을 따라만 하려 하고, 따라 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것처럼 생각하곤 한다. 그 결과 내 안의 인문과 충분히 교감하는 개념화 과정 없이 무리하게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겪지 않아도 되는 여러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 또 방향을 급격하게 바꾸어 몸에 무리를 주기도 한다. 만약에 가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면 먼저 나의 인문과 얼마나 방향이 다른지 고민하고 그 방향과 속도를 결정해야 한다. 이것이 나의 인문에 기반한 삶이고, 이 과정이 반복 훈련돼 습관이 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붙게 된다.

애플의 최고경영자였던 스티브 잡스는 생각의 개념화가 갖는 힘을 잘 보여준다. 그는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만약 오늘이 너의 마지막 날이라고 한다면 그래도 오늘 하려던 일을 하고 싶은가”라고 반복해서 자신에게 묻고 답했다고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삶과 일에 대한 생각을 개념화했기 때문에 그 개념과 기술을 결합하는 과정을 거쳐 아이패드와 같이 세상을 바꾼 상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거울 앞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방법은 자기 인식을 통해 생각을 개념화하는 오래된 인문적인 훈련 방법이다. 거울 앞에 서는 것은 뒤를 돌아 나의 발자국을 보는 것과 같다. 잡스는 끊임없이 자신의 삶과 일을 인식하는 과정을 통해 생각을 개념화하고 의사결정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자기의 인문을 성찰했고 그 결과를 개념화함으로써 그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사실 이 과정에서 잡스가 활용한 도구와 기술은 보조 수단이었을 뿐이다. 오히려 자기 성찰에 근거한 개념화, 인문적 삶의 태도가 당대의 도구와 기술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치를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힘이 됐다. 실제로 아이패드를 공개하던 날 마지막 슬라이드에는 애플의 상징처럼 남아 있는 인문학과 기술이 교차하는 표지판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애플이 아이패드와 같은 상품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점에 서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라는 잡스의 말에서 우리가 기술이 아닌 인문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이패드의 탄생 과정에서도 인문의 힘을 확인할 수 있다. 성균관대 철학과 이종관 교수에 따르면 아이패드(2010년)는 제록스파크연구소에 근무하던 마크 와이저가 창안한 ‘유비쿼터스 컴퓨터’(1988년) 개념에 기반해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유비쿼터스 컴퓨터 개념’에는 더 거슬러 올라가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1927년)>에서 언급한 사람과 도구의 근원에 관한 실존주의적 존재론이 담겨 있다.

책상 위에 종이 한 장을 놓고 펜으로 글씨를 써보자. 우리는 책상, 종이, 펜이라는 도구는 인식하지 않고 그 도구가 만든 글씨에 집중한다. 우리 눈에서 도구는 어느새 사라져버린다. 이 도구 중 어느 하나가 고장이 나야 우리는 그때 도구를 보게 된다. 쓸모가 없을 때가 돼서야 비로소 도구가 우리 눈에 띄는 것이다. 또 펜은 글을 쓸 종이와, 종이는 올려놓을 책상과, 책상은 자리할 바닥과 서로 연결돼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렇듯 도구는 서로 연결돼 있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제시한 “도구는 서로 연결돼 있고, 사람에게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라는 도구의 실존주의적 존재론의 핵심이다.

마크 와이저는 위와 같은 하이데거의 인문학을 바탕으로 세상에 없는 새로운 컴퓨터를 만들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컴퓨터는 눈에 띄지 않아야 하고, 기술이 스며들어 있고, 뒤로 물러서 있을 때 가능해진다. 그리고 패드, 탭, 보드와 같은 디바이스로 구현된다”라는 인문적 이해 없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을 제시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라는 라틴어에 착안해 이 개념을 ‘유비쿼터스 컴퓨터’라고 명명했다. 마크 와이저는 이 개념을 적용한 파크패드(1991년)라는 상품을 만들었으나 상용화하지는 못했다. 외관은 아이패드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으나 당시 기술의 한계로 펜으로 메뉴를 조작해야 했고 유선 인터넷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애플은 이 개념을 상품화하기 위해서는 기존 컴퓨터 화면의 가장자리에 있는 수많은 메뉴부터 없애야 한다고 해석했다. 곧 화면에서 메뉴가 사라졌다. 그리고 터치스크린에 손가락을 대고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기능이 작동하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메뉴는 칩에 저장돼 있을 뿐 눈에 보이지 않고 터치스크린과 손가락이 연결되면서 기능이 작동하는 상품을 만든 것이다. 마우스와 키보드도 사라지고 화면만 남았다. 하이데거가 제시한 인문학이 마크 와이저에 의해 개념화됐고 애플은 이를 아이패드라는 새로운 컴퓨팅 디바이스로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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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부분의 기업들은 모든 사물에 반도체 칩을 심고, 성능을 향상하되 작고 가볍게 만들고, 언제 어디서나 사용 가능한 네트워킹 컴퓨팅 환경을 만드는 것으로 이해했다. 특히 일본은 정부 주도로 네트워킹 중심의 유비쿼터스 전략을 수립해 미국을 앞지르겠다는 각오를 다졌다.3 그랬기에 아이패드가 출시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패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왜냐하면 당시의 넷북보다 성능이 떨어졌고 키보드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면을 손으로 만진다는 것은 너무도 낯선 것이었다. 기술과 트렌드를 중시하는 세상에 사람과 ‘도구의 근원’을 반영한 상품이 출시됐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을 깨고 출시 2개월 만에 200만 대 판매라는 대성공을 거뒀고 결국 휴대용 컴퓨팅 디바이스의 개념을 바꾸었다.

아이패드는 명료한 자기 인식, 생각의 개념화라는 인문적 성찰과 도구와 기술의 근원적 의미에 대한 고민을 거치며 탄생한 상품이다. 이 점에서 아이패드는 인문과 기술의 교차점에서 등장했으며 인문의 힘을 기술이 구현한 사례라 하겠다. 기술력에서 애플을 앞섰던 당대 유수의 기업들이 아이패드를 만들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인문과 기술의 교차점에 서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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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묵

    김경묵formook@naver.com

    -(현)성균관대 초빙교수, 사단법인 한국조직경영개발학회 인문디자인경영연구원 부회장 겸 원장, 인문학공장 대표, 디자인철학 자문위원
    -(전)삼성전자 수석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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