畵中有訓
편집자주
미술사와 문학 두 분야의 전문가인 고연희 박사가 옛 그림이 주는 지혜를 설명하는 코너 ‘畵中有訓(그림 속 교훈)’을 연재합니다. 옛 그림의 내면을 문학적으로 풍부하게 해설해주는 글을 통해 현인들의 지혜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옛 그림 속 최고 인기 스타를 꼽으라면 단연 ‘도연명’(陶淵明)이다. 연명은 자(字)이고, 이름은 잠(潛)이다. 생몰년(365∼427)과 국적(동진, 東晋)을 따지는 것이 무색할 만큼 그는 중국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그림과 시문에 들어 수천 년의 생명을 누렸다. 발그레 취한 얼굴로 노란빛 국화를 들고 있는 도연명의 모습과 이를 읊은 노래가 그것이다.
옛 그림문화 가운데 유명한 인물들의 에피소드를 여러 폭으로 담은 병풍그림 한 면에 국화 속 도연명의 모습은 빠짐없이 그려졌다. 조선후기 궁중에서 제작된 고전학습용 그림책 <예원합진> 수십 면에 도연명의 모습이 없을 리 있을까. 이 그림의 왼편에는 윤순(尹淳)의 필적으로 도연명의 <음주(飮酒, 술을 마시며)>의 제5수가 옮겨져 있다. 이 시는 무욕의 높은 정신경지를 표현했으되 글자에 꾸민 흔적 없는 수작으로 칭송되며 그림 속 도연명의 이미지를 결정시켜준 그의 대표 시다.
사람이 사는 곳에 집을 지었건만
수레 소리 말울음의 시끄러움이 없다네.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묻나니,
마음이 속세와 멀어지면 사는 곳도 절로 외지게 된다네.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따고
유연(悠然)히 남산(南山)을 바라보노라.
산 기운은 해 저물어 아름답고
새들은 짝 지어 돌아오는구나.
이 가운데 참뜻이 있기에
설명하려 하지만, 말을 잊었다네.
누구나 사랑한 도연명
누구나 사랑받기를 원한다. 역사 속에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인물이 도연명이었다. 당나라 시인들도 그를 좋아했고, 북송의 문호 소동파(蘇東坡)가 도연명의 ‘음주’시를 다시 해석하며 추앙했고, 남송의 철학자 주희(朱熹)는 도연명에게 제사를 올리고자 사당을 정비하고 화상도 설치했다는 내용이 <주자대전>에 나온다. 소동파와 주자가 모두 도연명을 좋아했기에 조선시대 풍류를 즐긴 시인이나 몹시 엄격한 성리학자도 도연명을 칭송하는 데 제약이 없었다. 퇴계 이황이 도연명의 시를 사랑했고 조선의 국왕들은 도연명의 마음에 대해 신하들에게 묻고 배우고자 했다.
도연명이 무엇을 하였길래? 사실 그는 힘없는 팽택현령(彭澤縣令)을 지내다가 그것마저 그만두고 전원으로 돌아간 사람이다. 도연명의 사직은 오두미(五斗米, 다섯 말의 쌀)라는 보수를 받으려고 소인배 상사 놈한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역사서 열전에 기록돼 전한다. 도연명은 관직을 떠나가는 심정과 전원에서 영위한 생활을 시문으로 남겼다. 사회를 떠나 전원으로 돌아가는 기쁨을 노래한 ‘귀거래사’, 홀로 술 마시며 느끼는 자유를 읊은 ‘음주’, 산수 속 이상사회를 구상한 ‘도화원기’가 모두 뛰어난 작품들이다. 도연명은 현실을 떠나가며, 현실에 종사하느라 맘을 졸이던 과거는 잘못이었다고 말하고 전원으로 돌아가 농사짓고 시 읊으며 사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위해 정말 좋은 일이라고 자신했다.
이후의 학자들이며 정치인들이 내놓고 사랑했던 도연명은 대단한 공적을 남긴 위인이 아니었다. 술에 취하기를 자부했던 애주자요, 오직 자유의 기쁨을 노래한 시인이었다.
도연명의 인기 덕분에 신분이 격상된 식물이 이 그림 속에도 그려진 국화(菊花)다. 도연명은 국화를 일러 서리 내린 가을에 핀 꽃이라며 ‘상하걸(霜下傑, 서리 아래 걸물)’이라 불렀다. 국화는 도연명과 함께 세상을 초월한 은일(隱逸)의 상징으로 통했다. 고려시대 문인 이색은 마주 대하여 마음을 논할 이는 오로지 국화라 하며 도연명의 전원생활을 기렸다. 서거정은 국화의 정이 자신의 마음에 부합하는 꽃이라고 노래했다. 서거정의 몸은 최고 관직에서 수십 년을 머물렀지만 그 마음은 도연명의 명리초월을 품었다는 뜻이다. 덩달아 부상한 것이 국화주(菊花酒)다. 음력 9월9일(중양절)이면 국화주를 마시며 도연명을 기억하는 전통이 생겼다.
도연명이 국화를 들고 바라보는 곳은 남산(南山)이다. 그림 속 남산이 푸르게 표현돼 있다. ‘음주’ 제5수에서 도연명은 이른바 ‘유연히’ 남산을 바라봤다. 아무 생각 없이 바라봄이다. 도연명은 남산 아래 밭을 갈아 콩을 심고 새벽부터 달이 뜰 때 농사를 짓기도 했다. 저녁 이슬에 옷이 젖어 돌아오면서 농사만 잘되면 좋겠다고 노래했다. 조선 땅 한양의 북촌에 사는 사람들이 집 이름에 ‘유연’을 잘 썼다. 집집마다 ‘유연’이라 쓰는 것은 문제라고 박지원이 지적했을 정도다.
도연명의 국화는 그의 전원으로 드는 세 갈래 오솔길에 피어나 도연명 집 동쪽의 울타리 아래로 이어졌다. 세 갈래 오솔길은 시든 풀길이었고, 소나무와 국화가 어울린 길이었고, 도연명과 그의 벗이 드나든 길이었다. 중국과 한국의 문인들은 제 집 앞을 ‘삼경(三徑, 세 갈래 길)’이라 부르기를 즐겼고, 이를 위해 일부러 세 갈래 길을 만들기도 했다.
국화, 국화주, 동쪽 울타리, 세 갈래 오솔길, 그리고 소나무 등이 모두 도연명의 코드가 됐고 시문과 회화의 아이콘이 됐다. 그러나 도연명에 대한 사람들의 지극한 사랑이 국화와 소나무, 그리고 오솔길 따위에 그쳤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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