畫中有訓
편집자주
미술사와 문학 두 분야의 전문가인 고연희 박사가 옛 그림이 주는 지혜를 설명하는 코너 ‘畵中有訓(그림 속 교훈)’을 연재합니다. 옛 그림의 내면을 문학적으로 풍부하게 해설해주는 글을 통해 현인들의 지혜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이교수리(圯橋授履)
그림 속 노인이 도포자락 아래로 맨발을 쓱 내밀었다. 그 앞에는 한 젊은이가 짚신 한 짝을 두 손에 받쳐 들고 앉아 있다. 맨발을 내민 노인의 신발이 분명하다. 이 그림의 왼편 상단에 적혀 있는 그림 제목이 ‘圯橋授履, 이교에서 짚신을 드리다’다. 그림 곁에는 ‘이교수리’의 사연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장량(張良)이 한가롭게 이교 위를 걷고 있었는데 가죽 옷을 걸친 노인이 있었다. 노인이 장량에게 이르더니 신발을 이교 아래로 떨어뜨리고 말했다. “유자(儒者), 신발을 가져오게!” 장량은 화가 치밀어 그 노인을 때려주고 싶었지만 노인이기 때문에 내려가서 신발을 가져다 드렸다. 노인은 “내 발에 신겨 줘”라고 요구했다. 장량이 그리했다. 노인이 말했다. “그대는 가르칠 만한 사람이군. 닷새 뒤 새벽에 여기서 만나세.” 닷새 뒤 장량이 그곳에 갔더니 노인이 화를 내며 “노인과 약속하고 늦게 오다니!”라고 야단을 쳤다. 다시 닷새 뒤 장량은 닭이 울 때 갔다. 그래도 노인은 벌써 와 있었고 장량에게 늦었다고 화를 냈다. 다시 닷새 뒤 장량은 밤중에 갔다. 노인이 기뻐하며 책 한 권을 꺼내주었다. “이것을 익히어 왕을 위한 스승이 되게나.” - <사기(史記)> 유후세가(留侯世家)
이 글은 유후(留侯)의 자리에 오른 장량의 행적을 기록한 <사기>의 일부이다. 이 글의 뒷부분을 마저 읽어보면 노인이 장량에게 준 책은 <태공병법(太公兵法)> 열 권이었다. 노인은 책을 주며 “13년 뒤 그대는 곡성산 아래서 누런 돌을 볼 것인데, 그 돌이 곧 나야”라고 말했다. 장량은 훗날 누런 돌을 찾아다 사당에 모셨고, 이런 이유로 이 노인은 ‘황석(黃石)노인’이라 불린다. 장량은 이 책을 공부했고 말이 통하는 사람을 찾았는데, 그가 유방(劉邦)이었다. 장량은 유방의 휘하로 들어가 그를 도왔다. 유방을 위기에서 건져냈고 유방이 중국을 제패해 한(漢)나라의 첫 황제 고조(高祖)로 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유방을 돕는 장량의 통찰력과 집행력이 하도 탁월하기에 사람들은 장량의 뒤에 비범하고 신비로운 스승이 있었을 것이라 상상했던 것 같다. 그런 상상만이 이런 이야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기이한 이 이야기는 중국의 신선계로 흡수돼 황석노인은 원래 신선이었고 장량도 죽어서 신선이 됐다는 전설이 만들어졌다. 조선의 선비라면 누구나 장량을 알았다. 조선 왕실에서는 화원화가 양기성(梁箕星, 18세기 전반기 활동)에게 이 장면을 그리게 했고 대학자 윤순(尹淳, 1680∼1741)으로 하여금 <사기>의 일부를 옮겨 적게 했다. 자라나는 왕실의 자제들이 이 그림과 글을 보면서 교훈을 얻게 함이었다.
노인의 테스트, 노인과 겨룬 게임
위에 인용한 <사기>의 글을 읽다보면 멈칫하는 부분이 있다. “장량은 화가 나서 그를 때려주고 싶었지만 노인이기 때문에 내려가서 신을 주워다가…”라는 대목이다. 기록자 사마천이 장량의 속마음을 어떻게 알았느냐 물을 일이 아니다. 노인은 분명히 장량의 속마음이 그런 줄 알았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신발을 휙 벗어 다리 밑으로 뚝 떨어뜨려 놓고는 내려가서 주어오라 하다니. 이런 뻔뻔함에 화가 치밀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노인은 장량의 반응을 보고자 한 것이다. 장량은 참았다. 왜 참았을까? 이 순간에 장량이 노인의 비범함을 알아챘을 리 만무하다. 장량은 길 위에서 제멋대로 구는 늙은이 때문에 화가 났을 뿐이다. 그러나 노인을 공경함이 도덕의 강령이었기에 장량은 그것을 지키고자 참았다. 도덕법칙을 행동에 옮기고자 장량이 발휘한 완벽한 인내심을 노인은 지켜봤다. 노인은 이 한 판의 테스트로 장량을 인정했고 그 대가로 큰 가르침을 주겠노라 약속했다.
이후로 노인과 장량은 모종의 게임을 펼치기 시작한다. 닷새 간격으로 제 삼판까지 지속된 게임이었다. 장량은 아침에 나왔다가 실격됐고, 동틀 때 나가서도 실격됐다. 노인은 매번 장량보다 먼저 왔고, 장량에게 늦었다고 야단쳤다. 장량은 포기하지 않았다.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는 애당초의 화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프로세스다. 배움의 기회를 포착하려는 장량 내심의 집념과 끝까지 시험하며 가르치려는 노인의 엄격한 요구가 겨룬 게임이었다. 노인이 제시한 테스트와 노인이 건 게임에서 장량은 합격했고 또 승리했다.
겸손의 미덕
장량을 승리로 이끌어준 인내력의 밑바닥에서 우리는 ‘겸손’(謙遜)의 미덕을 감지할 수 있다. 장량의 인내를 받쳐주고 있는 것은 겸손함이다. 그것은 그가 몸담은 사회의 도덕을 중시하는 태도이며,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이며, 스스로 우쭐대지 않는 태도이며, 바위처럼 무거운 자존감이다.
중국의 고전이며 역학서로 통용되는 <주역(周易)>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해봐야만 터득할 수 있는 사실이 있다. 인생행로의 여정에는 행운과 불운이 변화하며 갈마들기 마련인데 행운이거나 불행이거나 처신의 방법은 대체로 동일하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 처신의 방법이란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며 묵상하고 겸손의 덕을 유지하는 자세다. 이러한 자세는 행운의 시간을 오래 지켜주고 불행의 시간을 잘 견디고 속히 벗어나도록 해준다. 귀인을 만나든, 악인을 만나든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동일하다. 길거리에서 신을 벗어던지며 주어다가 신기라는 웬 노인의 요구를 재수 없는 날의 기분 나쁜 해프닝으로 그치게 하고 말 것인지, 빛나는 미래의 서광이 되는 단서로 만들어 낼 것인지는 이 만남을 맞닥뜨린 당자사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이다. 제대로 된 겸손의 마음과 태도는 불행을 행운으로 바꿀 수 있고 상대방의 모진 마음도 선의로 바꿀 수 있다.
장량의 매력포인트
장량의 자는 자방(子房)이라 조선선비들은 그를 일러 천하의 ‘장자방’이라 불렀다. ‘장막 속에서 책략을 세워 수만리 밖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놀라운 지략의 소유자 장자방이라, 장자방이 없었다면 한고조 유방도 없었을 것이라며 혀를 둘렀다. 장량의 일화를 그림으로 그리자면 장량이 황석노인에게 신비의 병법서를 받는 모습도 좋았을 것 같고, 장량이 홍문(鴻門)의 잔치에서 항우(項羽)의 암살계획으로부터 유방을 구해내던 긴장의 순간들도 좋을 것이며, 유방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서슴지 않던 희생의 모습도 좋고, 높은 벼슬에 올라 황제를 보좌하는 멋진 장면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림을 다시 보자. 그림으로 그려진 장량의 모습이란 노인 앞에 몸을 굽힌 낮은 자일뿐이다. 노인 앞에 신발을 든 장량의 모습은 겸손의 극단을 그린 이미지다. 오직 이 이미지를 조선선비들이 두고 보며 감상했기에 왕실자제의 교육을 위해 제작된 화첩에 채택됐고, 조선후기에서 근대기에 이르는 민화(民畵)류에도 거듭거듭 그려졌다.
장량이 펼쳐낸 놀랍고도 대단한 에피소드들이 얼마나 많거늘 유독 이 장면이 인기를 누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야말로 삶 속에서 필요한 덕목을 가장 잘 가르쳐준다고 판단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장량의 삶이 보여준 수많은 일화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모습이 이 이미지에 담겨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상상해보라. 무례하기 짝이 없는 길거리의 노인에게 공손한 태도로 신을 신겨드릴 수 있는 정도로 도덕적 겸손을 갖춘 젊은이의 모습. 그런 젊은이라면 무슨 일을 못할 것이며 누구를 감동시키지 못할 것인가. 사람들이 사랑했던 장자방의 매력이었고 오랫동안 사람들을 감동으로 가르친 장면이었다.
고연희 이화여대 강사 lotus126@daum.net
필자는 한국한문학과 한국미술사로 각각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에서 연구교수로, 시카고대 동아시아미술연구소의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이화여대, 홍익대, 연세대, 덕성여대 등에서 강의했다. 조선시대 회화문화에 대한 문화사상적 접근으로 옛 시각문화의 풍부한 내면을 해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조선후기 산수기행예술 연구> <조선시대 산수화, 필묵의 정신사> <꽃과 새, 선비의 마음> <그림, 문학에 취하다> <선비의 생각, 산수로 만나다> 등의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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