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위한 인문 고전 강독
편집자주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DBR은 ‘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의 고전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사상과 지혜의 뿌리가 된 인문학 분야의 고전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최근 어느 블로그의 글을 재밌게 읽었다.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소프트웨어 개발자를 육성해야 한다고 다들 호들갑인데 도대체 인문학적 소양이 무엇인지에 대해 묻고 있었다. 내 주변에도 철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소프트웨어 개발을 업으로 하는 친구들이 몇몇 있다. 참으로 미안한 소리지만 그 친구들은 남다른 인문학적 소양을 지닌 것 같지는 않다. 스티브 잡스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친구들이다. 블로그의 저자도 애플의 창업자를 인문학적 소양을 지닌 대표적인 인물로 칭송하면서 ‘아무런 제약 없이 목표를 정한 후에 필요한 자원을 모아가는’ 그의 일처리 방식을 인문학적 소양의 본보기로 삼았다. 사람들은 보통 가용한 자원을 근거로 해서 목표를 설정한다. 인문학적 소양을 지닌 사람은 반대로 목표를 먼저 상상한 후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자원들을 찾아 나선다는 것이다. 멋진 말이다. 하지만 인문학적 소양만큼이나 모호한 말이 인문학적 상상력이다. 가용한 자원에 근거하지 않은 채 목표를 상상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보통 사람의 눈에는 그저 신묘해 보일 따름이다.
박학다식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Erasmus, 1466∼1536)는 술은 잘 못했지만 유머감각만큼은 남달랐다. 그의 유머감각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책이 <바보 예찬>이다. 예전에는 <우신예찬>으로 번역되던 것이 근래에는 <바보 예찬>으로 소개되고 있다. 어리석음을 관장하는 여신 모이라(Moira)의 자화자찬식 즉석연설이 책의 내용이니 두 제목 모두 무방한 듯싶다. 모이라는 화려한 수사를 앞세워 자신의 공덕을 자랑한다.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행복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오쟁이진 어떤 남자는 자기 부인이 현모양처라는 착각 덕에 여전히 행복하다. 사람들은 그를 어리석다고 놀려댈 것이다. 하지만 어리석음 때문에 그는 적어도 행복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그 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행복한 까닭은 어리석음 때문이다. 우신의 보살핌 덕에 사람들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범부들의 어리석음을 예찬하는 만큼 모이라는 현자들의 지식을 비웃는다.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학문 연구에 다 소진해버리고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밤샘과 근심걱정과 끝없는 노고로 다 날려버리고 남은 삶마저 조금도 즐겁지 않게 보내버린 그런 사람을 한번 생각해보라. 그는 늘 인색하고 난처해하고 침울하고 우울하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가혹하며 남에 대해서는 귀찮아하고 지긋지긋해하는 창백하고 수척하고 병약하고 눈곱이 끼고 늙어 비틀어지고 늙기도 전에 머리가 벗겨진 요절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죽어도 상관없다. 여태껏 한번도 제대로 살아본 적이 없지 않는가! 바로 이것이 현자의 한심한 초상이다.”
숨 돌릴 겨를 없이 쏟아져 나오는 모이라의 장광설에 독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진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녀는 어리석어질 것을 사람들에게 권고한다. “행복의 성(城)이라고 불리는 저 완벽한 지혜에 이르려면 나 우신을 통하는 것 말고 다른 길은 없다.”
사실 <바보 예찬>은 일종의 농담이다. 당대에 가장 박식했던 한 인문주의자가 부르는 권우가(權愚歌)가 농담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농담치고는 고도로 치밀한 농담이다. <바보 예찬> 서문에서 에라스무스는 어리석음을 예찬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하찮은 일을 심각하게 다루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없지만 하찮은 것들을 가지고 진지한 일에 도움이 되게 하는 것보다 더 재치 있는 일 또한 없다.”
인간에게 진지한 일이란 행복이다. 인생을 즐길 줄도 모르는 가짜 현자들의 위선을 조롱하면서 에라스무스는 ‘인문주의(Humanism)’라는 새로운 기치를 설파하고자 했던 것이다.
휴머니즘은 보통 인도주의나 인본주의를 뜻하지만 학술적 용어로는 15세기와 16세기에 일었던 신(新)사상을 가리킨다. 인문주의는 오늘날 인문학(humanities)이라 통칭되는 학제와도 밀접히 연결돼 있는데 두 단어는 모두 라틴어 후마니타스(humanitas)에서 유래한다. 후마니타스란 무엇인가? 기원전 106년에서 43년까지 살았던 고대 로마의 정치인 키케로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힘, 구체적으로 인간성을 도야하고 세련되게 만드는 글이나 예술품이 지닌 힘을 후마니타스라 불렀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무엇보다도 언어를 사용할 줄 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거나 타인의 생각을 섭렵하면서 지식을 축적해 간다. 문법, 수사학, 논리학이 중세 대학의 필수 교양과목이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힘인 후마니타스는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힘이다. “즐거움이 없다면 삶은 삶이라 불릴 수도 없다”고 에라스무스는 말한다. 즐거운 삶, 즉 행복이 궁극적 목적이다. 행복은 얻기 어려운 신의 음료 암브로시아가 아니다. 제자들과 격 없이 마시는 술 한 잔에 노스승은 크나큰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석공 일에 미쳐서 어느 날은 둥근 건물을 네모난 건물로, 또 어느 날은 네모난 건물을 둥근 건물로 바꾸며 몇 해를 보낸 사람들도 행복하다. “그들은 공사를 한도 끝도 없이 되풀이하다가 결국은 완전히 부숴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무슨 상관인가! 그들은 너무도 행복하게 몇 년을 살지 않았는가.” 남들은 터무니없다고, 바보 같은 짓이라 비난할지라도 당사자 자신이 그 안에서 커다란 즐거움을 찾는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요, 우신의 지혜인 셈이다.
인문학은 우신의 지혜를 모델로 삼아야 한다. 이 지혜가 가져다줄 보상은 행복이며, 행복의 유일한 원리는 희망이다. 오로지 가능한 자원만을 근거로 해서 목표를 설계한다면 그것은 희망이 아니라 예측일 뿐이다. 예측과 달리 희망은 가능하지 않은 것들을 상상할 때 주어진다. 터무니없는 상상 때문에 좌충우돌의 연속이지만 그 대가로 희망이 우리 안에 꿈틀거린다. 햄릿보다 돈키호테를 훨씬 인간적으로 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는 여전히 무언가를 희망한다. 희망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힘인 것이다. 20세기의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도 같은 말을 한다.
“햄릿은 목표를 너무 많이 선취함으로써, 다시 말해 중요한 행동에 대한 대리 행위를 떠올림으로써 스스로 마비 상태에 빠져 있다. 주인공이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자신이 과장되게 의식으로부터 거리감을 취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햄릿은 너무 많은 불필요한 사고에 빠져 있으므로 우유부단하게 처신한다.”
-에른스트 블로흐, <희망의 원리>
반면 돈키호테에게 있어 목표는 까마득한데 그의 현실은 형편없이 뒤처져 있다. 그가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자 사람들이 그를 바보라고 손가락질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예수도 당대에는 터무니없는 객담이나 늘어놓는 공상가로 조롱받았다. 그가 전한 복음은 오직 하나, 모두가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다. 요컨대 희망 그 자체가 예수가 전한 희망의 메시지이다.
인문학적 소양은 인문학적 상상력에서 나온다. 인문학적 상상력은 특별한 종류의 상상력을 지시하지 않는다. ‘인문학적’이라는 수식어는 아마도 ‘상상 자체를 즐기는’이라는 말로 가장 잘 번역될 것이다. 상상을 즐기는 데 무슨 특별한 지식이 필요하겠는가? 포기하지 않고 희망하는 열정만이 필요하다. 희망, 그것이야말로 공로(空勞)를 공로(功勞)로 바꾸는 진정한 힘이다.
김원철 철학박사 won-chul-kim@hanmail.net
필자는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벨기에 루뱅대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파리 고등사회과학원(E.H.E.S.S)에서 스피노자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특히 윤리학의 역사, 스토아철학, 아우구스티누스에 관심을 갖고 관련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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