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siting Machiavelli-1
편집자주
많은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 ‘권모술수의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게 살고 있는 약자들에게 “더 이상 당하지 마라”고 조언했던 인물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연재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이번 호부터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주는 마키아벨리의 이야기 속에서 깊은 지혜와 통찰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마키아벨리는 공공의 적?
마키아벨리는 천하의 나쁜 놈으로 알려져 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권모술수의 대가로, 이중 플레이의 미덕을 찬양한 ‘악의 교사(敎師)’라 규정했고, 어떤 사람은 그를 ‘독재자를 위한 지침서를 쓴 사악한 정치 이론가’라고 평가한다. 1527년에 사망한 마키아벨리는 죽은 지 40년쯤 지났을 때부터 ‘공공의 적’으로 규정됐다. 1569년에 이미 그의 이름은 영국에서 발간된 영어사전에 마키아벨리안(Machiavellian)이란 형용사로 등장한다. 영어사전에 등장한 이 신조어에는 ‘통치술 전반에서 권모술수를 부리는(Practising duplicity in statecraft in general conduct)’이라는 의미가 부여됐다. 이미 16세기부터 그는 사악함의 대명사가 됐다. 사실 마키아벨리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평가는 지금까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네이버 영어사전에서 ‘Machiavellian’이란 단어를 찾아보니 ‘권모술수에 능한’이란 한글 설명이 나온다. 자신의 이름에 이런 부정적인 의미가 부여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마키아벨리 본인의 마음이 어떨까? 단테나 미켈란젤로 같으면 불같이 화를 냈겠지만 마키아벨리는 씩 웃으며 공연히 딴전을 부렸을 법하다. 마키아벨리에게 ‘원조 악당’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는 과연 정당한 것일까?
<워싱턴포스트>지의 2011년 8월 특집 호에 재미있는 연재 기사가 실렸다. 심리학자 프로이트, 중국의 혁명가 마오쩌둥, 영국 역사의 황금기를 이뤘던 빅토리아 여왕, 현대 자본주의 경제 이론의 대가 케인스, 피렌체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마키아벨리를 새로운 각도로 분석한 글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이름 자체가 모두 형용사로 사용될 만큼 자기 분야를 대표하거나 위대한 업적을 쌓았다는 것이다(각각 Freudian, Maoist, Victorian, Keynesian, Machiavellian). 그런데 실제로 이들은 자기 이름이 의미하는 것과 전혀 다른 삶을 살거나 상이한 사상을 갖고 있었다. 대표적 인물이 마키아벨리다. 요컨대 마키아벨리의 이름은 ‘권모술수에 능한’이란 형용사로 묘사되고 있지만 실제 그의 삶은 전혀 ‘마키아벨리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1 마키아벨리는 오히려 순진할 정도로 애국적인 인물이었으며 친구들에게 마음씨 좋은 벗으로 남고 싶어 했기 때문에 오히려 친구들이 그의 돈을 상습적으로 떼어먹기까지 했으며 어린 친척이 고아가 됐을 때는 자기 식솔도 잘 돌보지 못하면서 그 아이를 입양해서 호구책을 마련해 주었다. 외교를 담당하는 피렌체 제2서기장의 높은 공직에 있으면서도 공금을 아껴 쓰는 것으로 유명했고 자리에서 쫓겨났을 때 “조국에 대한 나의 충성심과 공직자로서의 정직함은 내가 가진 가난으로 충분히 증명되고 남음이 있다”고 자랑할 만큼 사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오해가 생겼을까? 전혀 마키아벨리적이지 않았던 마키아벨리가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가르친 악의 교사(敎師)로 세세 영원토록 지탄을 받게 된 것일까?
그것은 <군주론> 등에서 표현된 마키아벨리의 정치 이론이 강자(强者)들의 눈에 너무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일견 강자를 위한 권력의 조언자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특별한 사람만이 선택되던 피렌체 공화정 정부의 제2서기장으로 일했고 메디치 가문을 위해 <군주론>을 썼기 때문에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처세술을 가르친 것처럼 보인다. 이미 16세기에 마키아벨리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평가가 내려지기 시작했다. 1569년에 영국에서 출간된 영어사전에 ‘Machiavellian’이란 형용사가 신조어로 등장한 이래 그의 이름은 영국의 희곡 작가 크리스토퍼 말로(Christopher Marlowe)의 작품 속에서 처음 인용됐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말타섬의 유대인>이란 작품(1589년)에서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표현된다.
“내 이름은 마키아벨리,
나는 사람을 믿지 않아! 당연히 사람들의 말은 더욱 믿지 않지.
나를 가장 미워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날 제일 존경한다네.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 앞에서 내 책에 대한 비난을 퍼붓지.
그러나 혼자 있을 때는 몰래 내 책을 읽는다네.
내 책을 몰래 읽은 자는 교황의 자리까지 차지하고,
내 책을 던져 버린 자는 경쟁자들이 몰래 탄 독약을 성배처럼 들게 되지.”
피렌체 도심의 베키오궁정에 소장돼 있는 마키아벨리의 흉상. |
1589년의 작품 속에 최초로 등장한 마키아벨리야말로 장차 그의 이름이 안고 가야할 불운의 숙명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마키아벨리의 책은 원래 철저한 약자(弱者)의 입장에서 약자를 위해 집필됐는데 이 책의 가공할 만한 가치를 알아본 그 시대의 강자들이 다른 사람들이 읽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마키아벨리를 ‘악의 교사’로 몰고 간 것이다. 강자들의 눈에 비친 마키아벨리의 책은 불온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천기를 누설하듯이 권력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솔직하게 까발리는 마키아벨리의 지혜와 통찰력이 두려웠던 것이다. <말타 섬의 유대인>에서 표현돼 있는 것처럼 권력을 가진 강자들은 마키아벨리의 책을 몰래 혼자서만 읽고 싶어 했다. 그의 책은 나의 적에게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나의 경쟁자가 마키아벨리의 책을 읽는다면 나는 그를 이길 수 없다. 마키아벨리를 읽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의 놀라운 통찰력을 독점하기 위해, 마키아벨리를 사악함의 대명사로 몰고 간 것이다.
약자를 위한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는 특유의 대범함을 지녔고 무엇 하나 거칠게 없는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이름이 ‘권모술수에 능한’이란 악의적인 형용사로 사용된다고 해도 별로 상심하지 않을 인물이다. 그러나 평생을 권력의 위협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약자로 살면서 같은 동료 약자들에게 강자의 횡포에 당하지 말고 살자며 그들을 위로했던 마키아벨리로서는 그의 책과 사상이 ‘강자를 위한 지침서’로 잘못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아마 대성통곡을 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늘 약자였다. 약자들이 그의 동료였다. 권력을 가진 강자들이, 황제의 왕관을 뒤집어쓴 권력의 괴물들이 서로 부와 명예, 영토와 백성을 놓고 무한 경쟁을 펼치고 있을 때 철저한 약자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늘 가난에 쪼들렸으며, 공직에서 해고당할까 두려워했고, 줄을 잘못 서서 공직에서 파면되고, 실업자로 무려 15년 동안 빈둥거리는 삶을 살았던 불쌍한 인물이었다. 그가 공직자로 있었던 피렌체도 위태로운 약체 국가였다. 도시국가로 분열돼 있던 이탈리아는 중앙집권 국가에 강력한 군대를 가진 프랑스의 침공(1494년) 앞에서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다. 폭풍 앞에서 꺼져갈 듯 하늘거리는 촛불처럼 피렌체는 프랑스를 집어삼킬 듯이 다가오는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독일)의 부상을 토끼 눈을 뜨고 지켜봐야만 했다. 이탈리아 내에서도 피렌체는 자체 군대를 가지지 못한 최약소국가였다. 프랑스가 침공해왔을 때 제일 먼저 항복을 선언하며 스스로 성문을 열었던 피렌체는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 1475/6∼1507)와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Ⅱ, 1443∼1513)가 이탈리아를 정복 전쟁의 대혼란으로 몰아가고 있을 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피렌체의 외교와 국방을 책임지고 있던 마키아벨리로서는 매순간 약자의 위기감을 느꼈다. 유럽 정세의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권력을 잡기 위해 이전투구를 벌이는 피렌체 정치가들의 한심한 작태를 지켜보면서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약자들의 한심한 현실 인식에 혀를 찼다.
우리가 마키아벨리를 다른 각도에서 읽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모두 마키아벨리의 조언을 들어야 하는 약자다. 약자의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마키아벨리를 다시 읽어야 하는 독자다. 마키아벨리는 강자에게 당하지 않고 사는 법을 약자인 우리들에게 은밀히 속삭이고 있다.
정말 우리가 매일 살아가야 하는 일상은 애잔하고 괴로운 약자의 삶이다. 강자는 늘 우리 앞에 있어왔다. 나보다 힘이 센 골목대장부터 늘 노는 것 같은데 나보다 공부를 잘해서 명문대에 철썩 붙는 친구 녀석까지. 나는 수십 통의 면접원서를 넣어도 연락 한 통 없는데 일류 대기업에 쉽게 취직해서 내 연봉 수준의 추석 보너스를 챙기는 대학 친구. 야근과 주말 근무를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요구하는 우리 부장님. 그들은 우리가 감히 제어할 수 없는 힘으로 언제나 우리를 억눌러왔다. 그들이 이 세상의 주인 같고 우리는 그들이 만들고 싶어 하는 세상의 작은 소모품처럼 느껴진다.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우리는 등수에 들지 못하는 약자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야만 한다. 약자인 우리가 살아야 할 아픔을 알기나 하는지 어느 서울대 교수가, 우리 사회의 잠재적 최강자들만 모아다가 가르치는 강자들의 선생께서 “아프니까 청춘이다”고 우리를 위로한다. 솔직히 제목으로만 본다면 약자의 아픔은 당연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건 완전히 병 주고 약 주는 것이 아닌가. 우리 시대의 약자들은 짱돌을 들기 전에 마키아벨리의 책을 들어야 한다. 앞으로 연재가 계속되면서 밝혀지게 되겠지만 그의 가르침은 온전히 우리 같은 약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우리에게 강자에게 당하지 않고 사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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