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d management

중요한 것은 몸으로 기억하라

89호 (2011년 9월 Issue 2)

















배우 전도연의 매니저를 했던 박성혜 씨는 자신의 책 <별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에서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줬다. 매사에 분명하고 정확한 전도연이 “언니, 분명히 저번에 언니가 가장 먼저 감독에게 얘기하고 다음은 프로듀서, 다음엔 그 프로듀서가 상대 배우에게 이야기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감독, 상대 배우, 프로듀서 순으로 이야기가 전달된 것 같던데 어떻게 된 거야?”라고 물은 적이 있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까다로운 스타일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일의 순서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배우 전도연의 프로 근성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상대 배우보다는 프로듀서가 먼저 알아야 할 내용을 프로듀서가 늦게 알았을 때 그것은 단지 시간적으로 늦게 아는 문제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내용을 나만 모르고 있었네”라는 서운함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그것 때문에 프로듀서와 감독 사이가 벌어질 수도 있으며, 그로 인해 전체 프로젝트가 삐걱거릴 수도 있다. 배우 전도연은 아마 그런 것을 머리로 하나하나 따지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랬다면 전도연은 상당히 계산적인 사람일 것이고 연기에서도 그런 면모가 드러났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감성적인 연기에서 추측되는 바로는 그녀는 당연히 그래야 할 것으로 알고 거의 본능적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순서를 지키도록 요구했을 것이다. 


 
바둑의 정석(定石) 
등산을 하거나, 요트를 타거나, 인명구조를 하는 사람들에게 로프를 묶는 일은 사람의 목숨과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행동이다. 그래서 그들은 로프 묶는 방법에 대해 많은 교육을 받고 수없이 훈련을 반복한다. 로프를 묶을 때 중요한 것은 얼마나 세게 잡아당기고 꽉 묶느냐가 아니라, 매듭을 짓고 고리를 만들어 꿰는 순서다. 그 순서가 잘못되면 아무리 세게 묶어도 로프는 쉽게 풀리고 만다. 순서를 잘못 꿴 로프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갈 수도 있다. 그런데 히말라야처럼 아주 높은 산을 등반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산소가 희박해지는 고도 이상으로 올라가면 눈앞의 사물도 제대로 보이지 않고, 판단력이 흐려지며,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고 한다. 그야말로 본능에 의지해서 몸을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그런 상태에서 갑자기 어떤 상황이 닥쳐 로프를 묶어야 할 때는 머리로 생각해서 순서를 따져가면서 묶을 수는 없다. 그야말로 본능적으로 묶게 된다고 한다. 훈련을 할 때는 멀쩡하게 순서를 기억하고 아무 문제 없이 로프를 묶을 뿐 아니라 남에게 설명까지 할 수 있었던 사람이 전혀 터무니 없이 로프를 잘못 묶어서 큰 사고를 당한 사례들이 있다고 한다.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로프를 잘 묶지만 남에게 차근차근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런 실수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기억하고 설명한다는 것은 뇌의 생각하는 부분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뇌의 생각하는 부분은 뇌에 과부하가 걸리거나, 산소가 희박해지거나 몇 끼를 굶게 되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뇌의 여러 부분 중 가장 에너지를 많이 쓰는 부분이기에 상황이 열악해지면 가장 먼저 스위치가 꺼지기 때문이다. 로프를 잘못 묶어서 사고를 당하는 고산등반가는 뇌의 생각하는 부분에 의존해서 로프 묶는 법을 기억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로프를 순서대로 묶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남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은 뇌의 생각하는 부분을 작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운동능력과 본능적인 것들을 관장하는 기저핵을 작동시킨다고 한다. 이 부분은 몸을 움직이거나 생각하는 순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매우 에너지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스위치가 거의 꺼지지 않는다. 그래서 산소가 희박하고 의식이 희미해진 상황에서도 작동을 멈추지 않고 정확하게 로프 묶는 순서를 불러내서 몸을 그대로 움직이게 만든다. 물론 때에 따라 산소가 극도로 희박해지면 기저핵도 손상을 받을 수 있으며 아주 위험한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 

바둑은 흰 돌과 검은 돌을 19X19의 점으로 이뤄진 반상에 번갈아 놓으며 승부를 가르는 게임이다. 대부분의 점에 돌을 채우게 되지만 각 점에 돌을 놓는 순서가 바뀌면 승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필자는 젊은 프로 바둑기사 두 명이 마주 앉아 연습대국을 하고 복기하는 장면을 구경한 적이 있다. 그야말로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한 판의 바둑을 끝낸 두 바둑기사가 복기를 하는데 승부의 각 장면에서 실제대국과 다른 점에 돌을 놓았다면 그 다음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일종의 시뮬레이션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야말로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수십 수를 펼쳐 보이고서는 “아, 이렇게 되는 거지…” 또는 “봐, 안되잖아?”라는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돌을 쓸어 담고 다시 다른 상황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하기를 수백 번 반복했다. 한 판의 대국을 복기하는 것이 일반인들의 기준으로는 수백 번의 대국을 하는 것과 같았고 그 속도는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필자가 “어떻게 그렇게 빠를 수 있냐? 돌을 놓을 때 생각을 하고 놓느냐?”라고 묻자 바둑기사 중 한 명이 무심한 표정으로 “생각하면서 이렇게 하려면 하루 종일 걸려도 제대로 복기 못해요. 돌 하나하나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돌 하나 놓고 나면 그 다음의 칠팔십 수는 당연히 그렇게 가야 되기 때문에 그냥 놓는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생각을 하지 않고 어떻게 돌을 놓을 수 있을까?

바둑기사들은 공격과 수비에 있어서 흰 돌과 검은 돌이 둘 다 최선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진행되어야 하고 바뀔 가능성이 없는 패턴을 정석(定石)이라고 부른다. 수백 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바둑기사들이 승부를 겨루면서 검증한 것이다. 어떤 정석을 선택할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만 일단 정석의 상황에 들어오면 그들은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본능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일 뿐이다. 정석 안의 매 한 점에 대해서까지 생각을 하게 되면 뇌에 과부하가 걸려서 정작 중요한 승부처의 한 점에 대해 판단하고 결정할 수가 없다. 즉, 일련의 순서로 연결해서 하나의 묶음으로 처리하면 되고 결코 바뀌어서는 안 되는 것, 또는 바뀔 수 없는 것들은 머리 속 깊숙한 부분에 저장해서 필요할 때마다 자동으로 끌어내서 쓰는 것이다. 

 
반복연습이 중요한 이유
이처럼 가장 중요하고 바뀌지 않아야 하는 것들은 뇌의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기저핵에 저장해야 한다. 목숨과 관계되는 로프 묶는 법이나 바둑에서의 정석과 같은 것들이 그런 것이고, 일의 순서와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판단하는 능력, 사람의 도리를 행하는 윤리나 철학과 관계되는 부분도 여기에 해당된다. 이런 것들이 기저핵 안에 저장되도록 하는 방법은 오로지 반복밖에 없다. 더 많이 반복할수록 기저핵에 강하게 자리잡는다. 로프 묶는 법을 수십 번 반복 훈련한 사람은 뇌의 생각하는 부분에 기억을 담지만 수백 번 반복 훈련한 사람은 기저핵에 저장되기 때문에 뇌에서 그것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몸이 먼저 기억한다. 바둑기사가 정석을 익힐 때나 피아니스트가 콘서트를 앞두고 정해진 곡을 연습할 때는 생각이 손가락에 미치지 않고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과제를 수행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연습한다. 유아기의 어린 아이에게 숟가락질 하는 법뿐 아니라 친구와 사이 좋게 지내고 어른에게 인사를 잘하도록 가르치고 이미 잘 알고 있는 당연한 얘기조차 귀가 따갑도록 반복해서 교육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업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그 기업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본적인 것들은 구성원들의 본능 속에 각인시켜야 한다. 고객제일 마인드가 될 수도 있고, 안전우선이 될 수도 있으며, 품질이 뛰어나야 한다는 품질중시가 될 수도 있고 지속적인 혁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길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든지 경영자의 연설에서 한두 번 언급하는 것이나 제도, 절차, 업무표준에 들어가 있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채용과 교육, 평가와 보상의 모든 인사절차뿐 아니라 업무의 기획, 자원배분, 실행, 평가에 이르는 모든 단계에서, 최고경영자에서부터 일선종업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구성원의 일상 속에 반영되고 드러나며 반복적으로 환기시키고 적용하도록 해야 한다. 

본능 속에 각인됐다는 것은 굳이 생각을 의식적으로 하지 않고도 그런 방향과 순서로 개인의 몸이나 조직이 움직이고 일이 진행돼서 당초의 목적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는 생각이라는 유한한 자원을 정말로 필요한 곳에 유용하게 쓸 수 있다. 바둑에서 상대방이 정석을 벗어난 한 수를 놓았을 때 정석에 통달한 바둑기사는 그것을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비로소 승부를 결정짓는 판단을 하기 위한 생각에 집중한다. 반복을 통한 각인으로 원칙에 충실한 기업은 경쟁자의 전략이나 환경이 변할 때 그것을 감지하는 속도가 빠르고 수월하게 대응방안을 찾아서 빨리 실행에 옮길 수 있다. 탄착군의 확인을 통해 영점 조정을 마친 사격수와 그렇지 않은 사격수가 바람의 변화에 대응하는 결과가 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최근 환경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폭이 커지면서 발 빠른 대응과 창의성은 중요하게 여겨지지만 원칙과 기본은 소홀하게 생각하고 무엇이든지 반복해야 하는 것은 폄하 당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상황에 걸맞은 창의성은 기본이 탄탄하고 원칙에 충실할 때 나온다. 코미디언은 수많은 청중을 웃기는 반면 똑같은 콘텐츠를 갖고도 아마추어는 친구 한 명도 제대로 웃기지 못한다. 코미디언은 청중에게서 예기치 않은 반응이나 야유가 나와도 그것을 다시 애드리브로 활용하는 반면 아마추어는 미처 예견하지 못한 친구의 표정이나 반응에 스스로 어색해하기 마련이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오로지 반복연습이다. 코미디언은 반복을 통해 웃음을 만들어내는 순서와 디테일을 몸으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애드리브를 해야 할 때 생각의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지 않지만 아마추어는 머릿속의 생각으로만 기억하고 반복연습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조그마한 상황변화에도 생각이 복잡해져서 자연스럽게 웃길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기억해야 한다.

 정현천 SK에너지 상무 hughcj@lycos.co.kr

정현천 상무는 서울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1986년 SK그룹에 입사해 회계, 국제금융, 투자가 관리, 구조조정, 해외사업, 전략수립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현재는 SK에너지 상무로 근무 중이다. 경영학, 경제학, 심리학, 생물학, 인류학, 역사 등 여러분야의 책을 가리지 않고 읽는 다독가(多讀家)이며 변화추진을 위한 강사로도 활약하고 있다. 최근 포용을 주제로 한 <나는 왜 사라지고 있을까>라는 저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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