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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siting Machiavelli-1

권모술수의 대가 vs 약자의 대변자 ‘진짜 마키아벨리’를 알고 계십니까

김상근 | 90호 (2011년 10월 Issue 1)



편집자주

많은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권모술수의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게 살고 있는 약자들에게더 이상 당하지 마라고 조언했던 인물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연재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이번 호부터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주는 마키아벨리의 이야기 속에서 깊은 지혜와 통찰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마키아벨리는 공공의 적?

마키아벨리는 천하의 나쁜 놈으로 알려져 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권모술수의 대가로, 이중 플레이의 미덕을 찬양한악의 교사(敎師)’라 규정했고, 어떤 사람은 그를독재자를 위한 지침서를 쓴 사악한 정치 이론가라고 평가한다. 1527년에 사망한 마키아벨리는 죽은 지 40년쯤 지났을 때부터공공의 적으로 규정됐다. 1569년에 이미 그의 이름은 영국에서 발간된 영어사전에 마키아벨리안(Machiavellian)이란 형용사로 등장한다. 영어사전에 등장한 이 신조어에는통치술 전반에서 권모술수를 부리는(Practising duplicity in statecraft in general conduct)’이라는 의미가 부여됐다. 이미 16세기부터 그는 사악함의 대명사가 됐다. 사실 마키아벨리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평가는 지금까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네이버 영어사전에서 ‘Machiavellian’이란 단어를 찾아보니권모술수에 능한이란 한글 설명이 나온다. 자신의 이름에 이런 부정적인 의미가 부여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마키아벨리 본인의 마음이 어떨까? 단테나 미켈란젤로 같으면 불같이 화를 냈겠지만 마키아벨리는 씩 웃으며 공연히 딴전을 부렸을 법하다. 마키아벨리에게원조 악당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는 과연 정당한 것일까?

 

<워싱턴포스트>지의 2011 8월 특집 호에 재미있는 연재 기사가 실렸다. 심리학자 프로이트, 중국의 혁명가 마오쩌둥, 영국 역사의 황금기를 이뤘던 빅토리아 여왕, 현대 자본주의 경제 이론의 대가 케인스, 피렌체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마키아벨리를 새로운 각도로 분석한 글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이름 자체가 모두 형용사로 사용될 만큼 자기 분야를 대표하거나 위대한 업적을 쌓았다는 것이다(각각 Freudian, Maoist, Victorian, Keynesian, Machiavellian). 그런데 실제로 이들은 자기 이름이 의미하는 것과 전혀 다른 삶을 살거나 상이한 사상을 갖고 있었다. 대표적 인물이 마키아벨리다. 요컨대 마키아벨리의 이름은권모술수에 능한이란 형용사로 묘사되고 있지만 실제 그의 삶은 전혀마키아벨리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1 마키아벨리는 오히려 순진할 정도로 애국적인 인물이었으며 친구들에게 마음씨 좋은 벗으로 남고 싶어 했기 때문에 오히려 친구들이 그의 돈을 상습적으로 떼어먹기까지 했으며 어린 친척이 고아가 됐을 때는 자기 식솔도 잘 돌보지 못하면서 그 아이를 입양해서 호구책을 마련해 주었다. 외교를 담당하는 피렌체 제2서기장의 높은 공직에 있으면서도 공금을 아껴 쓰는 것으로 유명했고 자리에서 쫓겨났을 때조국에 대한 나의 충성심과 공직자로서의 정직함은 내가 가진 가난으로 충분히 증명되고 남음이 있다고 자랑할 만큼 사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오해가 생겼을까? 전혀 마키아벨리적이지 않았던 마키아벨리가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가르친 악의 교사(敎師)로 세세 영원토록 지탄을 받게 된 것일까?

 

그것은 <군주론> 등에서 표현된 마키아벨리의 정치 이론이 강자(强者)들의 눈에 너무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일견 강자를 위한 권력의 조언자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특별한 사람만이 선택되던 피렌체 공화정 정부의 제2서기장으로 일했고 메디치 가문을 위해 <군주론>을 썼기 때문에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처세술을 가르친 것처럼 보인다. 이미 16세기에 마키아벨리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평가가 내려지기 시작했다. 1569년에 영국에서 출간된 영어사전에 ‘Machiavellian’이란 형용사가 신조어로 등장한 이래 그의 이름은 영국의 희곡 작가 크리스토퍼 말로(Christopher Marlowe)의 작품 속에서 처음 인용됐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말타섬의 유대인>이란 작품(1589)에서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표현된다.

 

“내 이름은 마키아벨리,

나는 사람을 믿지 않아! 당연히 사람들의 말은 더욱 믿지 않지.

나를 가장 미워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날 제일 존경한다네.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 앞에서 내 책에 대한 비난을 퍼붓지.

그러나 혼자 있을 때는 몰래 내 책을 읽는다네.

내 책을 몰래 읽은 자는 교황의 자리까지 차지하고,

내 책을 던져 버린 자는 경쟁자들이 몰래 탄 독약을 성배처럼 들게 되지.”

 

피렌체 도심의 베키오궁정에 소장돼 있는 마키아벨리의 흉상.

1589년의 작품 속에 최초로 등장한 마키아벨리야말로 장차 그의 이름이 안고 가야할 불운의 숙명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마키아벨리의 책은 원래 철저한 약자(弱者)의 입장에서 약자를 위해 집필됐는데 이 책의 가공할 만한 가치를 알아본 그 시대의 강자들이 다른 사람들이 읽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마키아벨리를악의 교사로 몰고 간 것이다. 강자들의 눈에 비친 마키아벨리의 책은 불온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천기를 누설하듯이 권력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솔직하게 까발리는 마키아벨리의 지혜와 통찰력이 두려웠던 것이다. <말타 섬의 유대인>에서 표현돼 있는 것처럼 권력을 가진 강자들은 마키아벨리의 책을 몰래 혼자서만 읽고 싶어 했다. 그의 책은 나의 적에게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나의 경쟁자가 마키아벨리의 책을 읽는다면 나는 그를 이길 수 없다. 마키아벨리를 읽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의 놀라운 통찰력을 독점하기 위해, 마키아벨리를 사악함의 대명사로 몰고 간 것이다.

 

약자를 위한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는 특유의 대범함을 지녔고 무엇 하나 거칠게 없는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이름이권모술수에 능한이란 악의적인 형용사로 사용된다고 해도 별로 상심하지 않을 인물이다. 그러나 평생을 권력의 위협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약자로 살면서 같은 동료 약자들에게 강자의 횡포에 당하지 말고 살자며 그들을 위로했던 마키아벨리로서는 그의 책과 사상이강자를 위한 지침서로 잘못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아마 대성통곡을 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늘 약자였다. 약자들이 그의 동료였다. 권력을 가진 강자들이, 황제의 왕관을 뒤집어쓴 권력의 괴물들이 서로 부와 명예, 영토와 백성을 놓고 무한 경쟁을 펼치고 있을 때 철저한 약자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늘 가난에 쪼들렸으며, 공직에서 해고당할까 두려워했고, 줄을 잘못 서서 공직에서 파면되고, 실업자로 무려 15년 동안 빈둥거리는 삶을 살았던 불쌍한 인물이었다. 그가 공직자로 있었던 피렌체도 위태로운 약체 국가였다. 도시국가로 분열돼 있던 이탈리아는 중앙집권 국가에 강력한 군대를 가진 프랑스의 침공(1494) 앞에서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다. 폭풍 앞에서 꺼져갈 듯 하늘거리는 촛불처럼 피렌체는 프랑스를 집어삼킬 듯이 다가오는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독일)의 부상을 토끼 눈을 뜨고 지켜봐야만 했다. 이탈리아 내에서도 피렌체는 자체 군대를 가지지 못한 최약소국가였다. 프랑스가 침공해왔을 때 제일 먼저 항복을 선언하며 스스로 성문을 열었던 피렌체는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 1475/6∼1507)와 교황 율리우스 2(Julius Ⅱ, 1443∼1513)가 이탈리아를 정복 전쟁의 대혼란으로 몰아가고 있을 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피렌체의 외교와 국방을 책임지고 있던 마키아벨리로서는 매순간 약자의 위기감을 느꼈다. 유럽 정세의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권력을 잡기 위해 이전투구를 벌이는 피렌체 정치가들의 한심한 작태를 지켜보면서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약자들의 한심한 현실 인식에 혀를 찼다.

 

우리가 마키아벨리를 다른 각도에서 읽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모두 마키아벨리의 조언을 들어야 하는 약자다. 약자의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마키아벨리를 다시 읽어야 하는 독자다. 마키아벨리는 강자에게 당하지 않고 사는 법을 약자인 우리들에게 은밀히 속삭이고 있다.

 

정말 우리가 매일 살아가야 하는 일상은 애잔하고 괴로운 약자의 삶이다. 강자는 늘 우리 앞에 있어왔다. 나보다 힘이 센 골목대장부터 늘 노는 것 같은데 나보다 공부를 잘해서 명문대에 철썩 붙는 친구 녀석까지. 나는 수십 통의 면접원서를 넣어도 연락 한 통 없는데 일류 대기업에 쉽게 취직해서 내 연봉 수준의 추석 보너스를 챙기는 대학 친구. 야근과 주말 근무를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요구하는 우리 부장님. 그들은 우리가 감히 제어할 수 없는 힘으로 언제나 우리를 억눌러왔다. 그들이 이 세상의 주인 같고 우리는 그들이 만들고 싶어 하는 세상의 작은 소모품처럼 느껴진다.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우리는 등수에 들지 못하는 약자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야만 한다. 약자인 우리가 살아야 할 아픔을 알기나 하는지 어느 서울대 교수가, 우리 사회의 잠재적 최강자들만 모아다가 가르치는 강자들의 선생께서아프니까 청춘이다고 우리를 위로한다. 솔직히 제목으로만 본다면 약자의 아픔은 당연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건 완전히 병 주고 약 주는 것이 아닌가. 우리 시대의 약자들은 짱돌을 들기 전에 마키아벨리의 책을 들어야 한다. 앞으로 연재가 계속되면서 밝혀지게 되겠지만 그의 가르침은 온전히 우리 같은 약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우리에게 강자에게 당하지 않고 사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인문학자

마키아벨리가 권모술수의 대가로 잘못 알려진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쓴 책의 진면목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흔히 마키아벨리 하면 <군주론>을 떠올리는데 이 책은 그의 정치사상의 전모를 밝히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 책의 집필 동기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권모술수로 권력을 유지하는 법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공직에서 쫓겨난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의 정치 실세로 복권된 메디치(Medici) 가문으로부터 일자리를 얻기 위한 일종의 자기 추천서(Self Recommendation Letter)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런 특별한 목적으로 썼기 때문에 <군주론>은 권력 집중을 강조하고 군주의 처세가 극단적이어야 한다고 애써 강조했다. 군주에 의해 권력이 집중되면 될수록 그 군주는 더 유능한 참모를 거느려야 하고 군주의 통치가 극단적일 때 이를 현명하게 조율할 수 있는 책사(策士)가 필요해진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참모와 책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군주론>의 내용을 극단으로 몰아갔다. 이런 집필의 일차적 목적을 조심스럽게 분별하면서 <군주론>을 읽어가더라도 곧 두 번째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그것은 마키아벨리가 현란할 정도의 인문학적 지식을 집필에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의 다양한 고사(古事)나 인물의 인용은 보통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놀라운 인문학적 지식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복잡다단했던 16세기 이탈리아의 정세를 헤쳐 갈 군주의 덕목을 파헤치기 위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를 자유자재로 인용하면서 그의 인문학자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한다. 당시 인문학(studia humanitatis)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이기도 했지만 예술과 인문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던 메디치 가문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는 과도할 정도로 인문학적 정보를 집필에 활용한다.

 

상황에 따른 군주의 임기응변적인 리더십을 촉구하던 마키아벨리는 갑자기 고대 그리스나 로마로 돌아가 의미심장한 그리스 신화나 로마 황제의 정치적 판단력을 인용한다. 이런 인문학적 정보에 익숙하지 않은 현대의 독자들은 그 부분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포기하게 되고 결국 읽고 싶은 부분만 골라서 읽게 된다. 이런 선택적인 독서 방식은마키아벨리는 권모술수를 가르쳤다는 일반적인 선입관과 결합해 <군주론>을 읽고 싶은 대로 읽게 한다. 그러나 <군주론>을 포함한 마키아벨리의 여러 저작들은 권모술수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일차적인 목적은 현실의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고전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은유적으로 설명돼 있고 고대 로마의 정치가와 철학자들에 의해 펼쳐진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을 되새기면서 지금의 난제를 풀어가자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전술론>이란 책에서 고전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당신은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로마인의 상황에 대해 예를 들어왔는지 상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거듭 내가 로마인에게서 영향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얼마나 절실하게 염원해왔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술론, 7>

 

마키아벨리의 이런 고전에 대한 회귀 열망은 현대 독자들에게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안겨 주었다. 마키아벨리의 책을 읽기 어려운 이유는 그의 글이 인문학 고전을 종횡무진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시로 등장하는 이집트, 그리스, 페르시아, 로마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마키아벨리 사상의 전모를 이해하는 것은 그야말로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 같다.

 

아버지의 서재에 꽂혀 있던 책

마키아벨리가 가졌던 놀라운 인문학적 지식은 어떻게 습득된 것일까? 그가 현실을 이해하고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지침으로 삼았던 고전에 대한 통찰력은 어떻게 얻었을까?

 

마키아벨리 가문은 토스카나 지방의 귀족(popolani grassi)으로 출발했고 피렌체의 여느 귀족들처럼 교황을 지지하는 겔프(Guelph)당에 소속돼 있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아버지 베르나르도(Bernardo)는 궁핍한 생활을 했던 가난한 삼류 법률가였다. ‘메세르라는 법률가의 호칭으로 불린 것으로 보아 법률과 관련된 모종의 자격증을 취득한 것은 분명하지만 실제로 변호사나 공증인으로 활동했던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아버지 밑에서 성장하면서 지독한 가난을 경험했다. 그는 어린 시절에 겪었던 경제적 어려움을 한 친구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나는 가난 속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부터 풍요로움이 아니라, 궁핍함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먼저 배웠다네.”2

 

마키아벨리 가문의 거의 유일한 재산은 피렌체 남쪽의 산골 마을 산 카시아노(San Casciano)의 산탄드레아(Sant’Andrea)에 있는 작은 농장이었다. 마키아벨리는 1513년에 공직에서 쫓겨난 후 이 산골 마을의 작은 농장에서 주로 생활했다. 마키아벨리의 아버지 베르나르도는 피렌체에서 주로 거주했지만 유일한 수입원은 이 산골 농장에서 나왔던 것으로 보인다.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의 수입에 의존하면서 살고 있던 베르나르도에게 장남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탄생은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된 것 같다. 아들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자부심이 느껴지는 일기의 구절을 보면 마키아벨리는 어릴 때부터 아주 똑똑하고 성격이 원만했던 모양이다.

산탄드레아의 농장. 지금도 마키아벨리의 먼 후손이 소유하고 있다.

 

장남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469 53일 피렌체 도심 한가운데서 태어났다. 피렌체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아르노강을 연결하는 베키오다리에서 불과 30m 정도 떨어진 비아 로마나(Via Romana)의 허름한 집이 그의 출생지다. 명색이 법률가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 아버지 베르나르도는 스페키오(specchio)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스페키오는세금 미납자란 불명예스러운 명칭이다. 각 길드를 중심으로 철저한 상업도시의 성격을 유지하던 피렌체에서 세금을 납부하지 못한 사람은 치욕적인 대우를 받아야만 했다. 피렌체 정부로부터 한번 스페키오로 소환된 사람은 어떤 공직에도 오를 수 없었고 그 자녀에게도 같은 징벌적인 규제가 가해졌다. 나중에 피렌체의 제2서기장 자리라는 고위공직에 올랐던 마키아벨리는 자기 아버지가 한때스페키오였다는 사실에 큰 부담을 느끼게 된다. 법률박사였던 베르나르도가 왜 뚜렷한 직업도 없이 가난하게 살면서스페키오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가난했던 아버지 베르나르도는스페키오라는 오명을 아들에게 남겼지만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좋은 점만 물려받았다. 이 세상 모든 아버지의 로망은 자녀가 자신의 좋은 점만 닮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아버지 베르나르도로부터 고전을 열심히 읽는 좋은 습관을 배웠다.

 

가난했던 법률가 베르나르도의 유일한 기쁨은 고전을 읽는 것이었다. 가난했던 그의 서재에는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의 전집, 역시 로마의 문법학자이자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였던 마크로비우스(Macrobius)의 책, 지질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책, 로마시대를 대표하는 자연과학자인 대() 플리니우스(Pliny the Elder)의 책이 꽂혀 있었다.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가 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서 등이 소장 목록에 포함돼 있는 것으로 보아 베르나르도의 지적 수준이 상당히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베르나르도가 소장하고 있던 책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값어치가 나가는 책은 리비우스의 <로마사 논고>였다. 다독가이자 장서가였던 베르나르도는 리비우스의 유명한 고전을 소장하고 싶었지만 워낙 고가로 팔리던 터라 엄두를 내지 못할 형편이었다. 독일 마인스의 인쇄업자 구텐베르크가 서양에서 최초로 <성서>를 이동식 활자체로 인쇄한 것이 1455년의 일이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피렌체에 전래된 것은 1471년이었지만 아직까지 리비우스의 <로마사 논고>가 베르나르도와 같은 가난한 시민에게 팔릴 만큼 대중화되지 않았던 때였다.

 

베르나르도는 이 책을 소장하고 싶어 피렌체의 인쇄업자 니콜로 델라 마냐에게 접근했다. 돈으로 살수 없으니 대신 출판과 관련된 일을 해주고 임금 대신 인쇄본을 한 부 받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인쇄업자 니콜로 델라 마냐는 베르나르도에게 <로마사 논고>의 지명 색인 작업을 맡겼다. 리비우스의 방대한 역사서에 색인 작업을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베르나르도는 이 책 한 질을 얻기 위해 아홉 달 동안 지루한 작업에 매달렸고 마침내 무려 12질의 종이에 빼곡히 채운 <로마사 논고>의 지명 색인을 완성해냈다.

 

소년 마키아벨리가 제본을 마친 <로마사 논고>를 찾아가기 위해 건너갔을 피렌체의 베키오다리. 그의 집은 이 다리에서 3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인쇄술이 발명된 초기에는 지금처럼 출판사에서 인쇄와 제본을 함께 처리하지 않았다. 인쇄업자는 낱장으로 종이에 인쇄했고 이를 구입한 장서가가 다시 제본업자에게 맡겨서 한 질의 책으로 만들었다. 베르나르도는 아홉 달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얻은 리비우스의 <로마사 논고>를 몇 해가 지난 1486년에 이르러서야 피렌체의 제본업자에게 맡길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윤택하지 않았던 베르나르도는 구차한 지불방식을 택했다. 리비우스의 역사책을 제본해주는 대가로 베르나르도가 지불한 것은피아스코 병에 담은 붉은 키안티 포도주 3병과 식초 1이었다. 그는 당시에 피렌체에 없었기 때문에 17살 소년으로 성장한 큰 아들 니콜로 마키아벨리에게 이 심부름을 시켰다. 어린 아들은 아버지가 시킨 심부름을 하기 위해 포도주 3병과 식초 1병을 들고 제본업자를 찾아갔다. 그리고 깔끔하게 제본된 리비우스의 책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난했던 아버지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얻게 된 이 책을 명민했던 아들은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장차 <리비우스의 로마사 논고>라는 책을 써서 근대 정치학의 비조(鼻祖)로 불리게 된다. 리비우스가 쓴 <로마사 논고>를 읽으며 그는 세상의 이치와 권력의 속성을 꿰뚫어 봤다. 마키아벨리의 통찰력은 본인의 회고대로고대사에 대한 끊임없는 독서때문에 가능했다. 그의 끊임없는 독서 습관은 가난했던 아버지의 헌신적인 노력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약자를 위한 인문학

마키아벨리는 약자의 시선으로 읽어야 한다. 그는 강자들이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조언한 것이 아니라 강자들에게 억울하게 당하고 살고 있는 약자들에게더 이상 당하고 살지 마라고 조언했다. 마키아벨리는 이 세상 모든 약자들의 수호성자이다. 또한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으로 가득한 마키아벨리 사상의 뿌리는 고전과 인문학적 성찰에 깊이 기인한다. 우리가 인문학 공부의 일환으로 마키아벨리 읽기를 시작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마키아벨리를 사회과학과 정치학의 굴레에서 해방시키는 작업을 통해 우리는 약자가 지녀야 할 세상을 보는 시각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가난했던 아버지 베르나르도는 마키아벨리에게 엄청난 유산 두 개를 물려줬다. 하나는 풍요롭지 않았던 경제적 형편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풍요로웠던 인문학과 고전에 대한 열망이었다. 피렌체를 유유히 감싸고도는 아르노 강둑을 따라 포도주 세 병과 식초 한 병을 달랑 들고 갔던 소년 마키아벨리는 깔끔하게 제본을 마친 리비우스의 고전 <로마사 논고>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포도주 세 병과 식초 한 병이 그의 풍요롭지 않았던 경제적 형편을 상징하고 있다면 그가 집으로 들고 왔던 리비우스의 고전에는 세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놀라운 통찰력이 가득 담겨 있었다.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skk@yonsei.ac.kr

필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및 에모리대에서 석사 학위를,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신과대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SK케미칼 고문도 맡고 있다. <르네상스 창조 경영>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15권의 책을 냈다. 르네상스 시대의 창조적 영감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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