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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엽편 소설: 우리가 만날 세계

누구에게나 신이 머물다 가는 순간이 있다

이경 | 391호 (2024년 4월 Issue 2)
추웠다.

주머니에 구겨 넣은 손끝도 곱아드는 추위였다. 아무도 없는 마을버스 정류장을 향해 굳이 종종걸음을 쳐야 했던 것도 이 추위 때문이었다. 길은 반쯤 녹은 눈과 섞여 슬러시 상태가 된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게 5분 전 07번이 출발해 아무도 없는 한겨울 한낮의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벌러덩 뒤로 자빠져 머리를 깨뜨릴 뻔한 이유였다.

전세 사기를 당하는 것과 빙판길에서 종종걸음 치다 뒤로 넘어져 머리를 깨는 것 중 더 멍청한 건 어느 쪽일까? 다행히 내 머리는 깨지진 않았다. 초보 서커스 줄광대처럼 꼴사납게 파닥거리며 간신히 균형을 잡은 덕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게 내가 멍청하지 않다는 보증은 될 수 없었다.

사흘 전, 집주인이 ‘돌려줄 전세금이 없으니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매입하든가 아니면 마음대로 길바닥에 나앉든가’로 요약되는 문자를 세입자 전체에게 보낸 후 잠적해 버렸다. 이틀 전, 우리 빌라 세입자들이 모인 단톡방이 개설됐다. 그때부터 48시간 내내 핸드폰이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어댔다. 부르르, 부르르, 부르르. 한 번 떨릴 때마다 새로운 피해자와 새로운 피해 건물이 단톡방에 들어왔고 피해 금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틀 동안 모인 피해 금액은 나처럼 조그만 디자인 회사에 다니는 말단 직장인이 한 번 만져보려면 삼백 년, 아니 삼천 년쯤 월급을 모아야 가능한 액수였다.

오늘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찰서에 갔다. 거기 모인 모두는 하나같이 억울했고 화가 나 있었다. 나는, 나도 억울했고 화가 나 있었는데 거기 모인 모두의 사연에 비하면 어쩐지 내 사연이 조금 덜 억울하고 덜 긴급한 것 같아 이상했다. 나는 한 달 전 결혼해 처음 함께 살 집을 마련한 신혼부부거나 처자식이 주렁주렁 딸린 가장이 아니었고, 곁을 떠나지 않고 부양해야 할 노부모나 간병해야 할 환자도 없었다.

내가 전세 사기를 당했단 소식을 전하자 엄마는 본가로 들어오라고 딱 잘라 말했다. 아빠는 그 옆에서 엄마를 거들며 내게 걱정 말라고 했다. 사기꾼 고소는 고소고, 당장 네가 지금 거리에 나앉게 생겼으니 일단 내려와 마음을 추스르면서 상황을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즉, 나는 은행 빚이 얹힌 전 재산을 다 털렸을 망정 비빌 언덕은 그나마 있었다. 회사에서 왕복 세 시간 거리에 돌아갈 수 있는 집과 가족이 있었다. 그러나 거기 모인 어떤 사람들에게는 비빌 언덕조차 없었다. 한 대야에 모인 꼴뚜기처럼 조로리 앉아 조사를 받다 보면 싫어도 알게 되는 어떤 사정들이 있었다. 그러한 사실이 내 억울함과 화를 덜어줄 순 없었지만 그러나 전세금 반환 우선순위 따위를 떠올리면 마음은 한층 더 착잡해져만 가고….

나는 긴 한숨을 쉬고 핸드폰을 꺼냈다. 5분 전 떠난 07번은 벌써 수란시장까지 가버렸는데 와야 할 07번은 아직 수란시장 한참 전에서 미적대고 있었다. 공기가 너무 차가워 손가락이 떨어질 것 같았다.

내가 얼른 핸드폰을 주머니에 도로 넣고 두 손을 마주 잡아 싹싹 비비던 때였다.

“학생, 이거 받아요.”

내 바로 왼쪽 귀에 대고 새된 목소리가 속삭였다. 동시에 어떤 힘센 손이 내 왼쪽 어깨를 꽉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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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악!”

나는 소리를 지르며 거의 펄쩍 뛰다시피 몸을 돌렸다. 이 정류장엔 분명 나 말고 아무도 없었는데?

“미안해요, 내가 놀라게 했나요?”

내 등 뒤에 찰싹 달라붙다시피 자그마한 아줌마가 서 있었다. 등산복 같은 검은 바지 아래 검은 방한화를 신고 자주색 패딩 점퍼를 입은 아줌마였다. 아줌마가 눈썹까지 푹 눌러쓴 갈색 털모자가 무슨 러시아 아기들이 쓴다는 모피 모자처럼 어마어마하게 풍성해서 나는 방금 심장이 떨어질 것처럼 놀란 것도 잊고 모자를 바라보았다.

“자, 이거 받으라고 찾아왔어. 많이 추울텐데 어서 받아요.”

아줌마가 나를 향해 왼손을 불쑥 내밀었다. 불그스름한 페이즐리 무늬가 가득 새겨진 네모나고 얇은 것이 손바닥에 놓여 있었다.

“이, 이게 뭔데요?”

“어머, 보고도 몰라. 핫팩이야, 핫팩.”

얼빠진 대답이 우스웠는지 아줌마는 내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왜 이러세요? 이게 뭔데요? 누구세요? 저 아세요? 필요 없어요! 아무도 없는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땅에서 솟아났는지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모를 낯선 사람이 덥석 손을 잡아끌면 정당하게 뱉어도 되는 대사들이 솟구치다가 목구멍에서 콱 틀어 막혔다. 아줌마가 내 손을 잡아끌어 억지로 쥐여 준 것이 너무나… 따끈했기 때문이다. 꽝꽝 얼어 곱은 손끝에 따끔한 감각이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진짜… 핫팩이네요.”

“그래, 핫팩. 핫팩 처음 봐요?”

아줌마가 내게 측은하다는 눈길을 보냈다.

“아, 아니요… 처음은 아닌데….”

“이런 날에 코트 한 장 입고 어떻게 버텨, 산에는 그렇게 입고 다니면 큰일나요. 객사하기 딱 좋지.”

산.

그러고 보니 관악산 가는 등산객들이 이 정류장을 많이 이용했던 것 같다. 이 아줌마도 등산객인가?

“저 산에 가는 거 아니에요.”

경찰서 다녀오는 길이라는 묻지 않은 사실까지 튀어나오려는 것을 나는 꾹 삼켰다.

“학교 가는 거 아냐?”

아줌마가 정류장 건너편에 보이는 대학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아뇨, 저 학생 아니에요. 그냥, 일이 있어서.”

“그래요. 내 나이쯤 되면 다 학생처럼 보여서, 내가 실수했네.”

“아녜요.”

아줌마가 핫팩을 주고도 내 옆에 착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에 점점 더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대화가 끊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다. 나는 일부러 눈을 깔고 핸드폰을 꺼내 버스 앱을 다시 켰다. 07번은 여전히 아까 거기, 수란시장 한참 전에서 어정거리는 중이었다.

“7번 말이야, 거기 삼거리에 사고 났대. 접촉 사고. 수란마트 봉고차가 일시 정지 안 하고 냅다 우회전하다 빨간불 바뀌고 횡단보도 건너는 할머니 리어카를 사알짝 갖다 박았대요. 그 왜, 폐지 주워 담는 리어카 있지? 차아아암 나, 이렇게 추운 날에는 자리에 내가 드린 핫팩이나 깔고 가만 계시라 해도 말을 안 들어. 아휴, 고집 대단해. 나까지 두 손 두 발 들었다면 말 다 했지, 뭐. 어디 크게 다친 건 아닌데 그만 이틀 치 모아 둔 폐지가 길바닥으로 다 쏟아졌대요, 글쎄. 그거 깨끗이 치우려면 좀 걸릴 거 같은데. 빨리 갈 일 있어요?”

“아니요….”

말이 나와 말인데 내가 빨리 갈 일은 없었다. 내 전 재산을 날려 먹은 콧구멍만 한 방구석에 빨리 들어가봤자 울화통만 터지지. 그보다는 거머리처럼 내게 바짝 붙어 선 아줌마가 더더욱 수상했다.

이 아줌만 아까부터 나와 여기 있는데 수란시장 삼거리에 지금 사고가 났는지, 그게 봉고차가 리어카와 낸 접촉 사고인지는 어떻게 알고, 하물며 그 리어카 끄는 할머니를 자기가 알고 있다고? 그 할머니한테도 핫팩을 드렸다니? 지금 나한테처럼?

나는 주머니 속 작은 태양처럼 발열 중인 핫팩을 만지작거렸다. 이거 신종 사이비 전도 수법인가 하는 의심이 불쑥 들었다. 하지만 도로 가지고 가라고 매몰차게 거절하기엔 핫팩의 온기가 너무 아쉽고… 아, 참, 이거 받은 인사를 했던가, 내가?

“참, 핫팩 감사합니다.”

설령 사이비 전도일지라도 호의에 최소한의 감사 표시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어쨌든 아줌마가 준 핫팩 덕분에 덜덜 떨리던 몸도 진정됐으니 말이다.

“으응, 별거 아냐. 잘 써요, 잃어버리지 말고. 잃어버리면 끝이야. 나도 한 사람한테 두 개까진 못 줘요. 개수가 다 정해져 있는 물건이라서.”

“아, 네.”

이까짓 핫팩 잃어버리면 편의점에서 하나 사면 되지, 되게 생색내시네. 감사한 마음이 폭삭 줄어들었다. 그 순간 아줌마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이거 시판 상품 아니야.”

아줌마는 끈질기게 대화를 잇고 싶은 기색이었다. 하는 수 없었다. 07번이 와서 대화를 끊고 올라타기 전까진 꼼짝없이 어울려 드려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아줌마가 던진 미끼를 열없이 물었다.

“아… 그럼 뭔데요?”

“학생, 영구기관이라고 알아?”

영구기관? 그, 연료를 넣지 않아도 혼자 무한히 돌아간다는 기관? 옛날 공상과학소설에나 나왔지. 그나마 이젠 유행도 다 지나가 어디서도 써먹지 않는다는 그 유치한 아이디어?

그러나 다행히 나는 내게 호의를 베푼 아줌마에게 그런 면박을 줄 만큼 못된 사람은 아니었다.

“아… 하하… 네….”

“이 핫팩이 영구기관이야. 편의점에서 파는 물건 같으면, 저 뭐야, 오래 가면 한 열댓 시간 간다고 그러죠? 식으면 막 흔들라 그러고, 그치? 내가 학생한테 준 거는 그런 거 아니야.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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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가 내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영원히 식지 않아요. 영구히 사용할 수 있지. 1년, 10년, 100년, 영원히, 가만 내버려두거나 말거나 언제나 70도. 날이 춥건 덥건, 비가 오건 눈이 오건. 학생이 사무치게 추울 때, 온기가 가장 필요할 때, 언제든 손에 가만 쥐어봐. 따뜻하지. 내가 학생에게 준 건 그런 물건이야.”

지금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공포가 나를 덜컥 엄습했다. 이거 사이비 전도가 아니라… 정신이 아프신 분 아니야?

“그렇게 엄청난 걸 왜 저한테 주시는데요?”

아줌마의 반짝이는 눈이 위험해 보였다. 태연해 보이고 싶었지만 대답하는 내 목소리는 염소처럼 떨려 나왔다.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유우우, 참. 다들 왜 그런 걸 물어보나 몰라 그래. 이 도시에 살면 다들 그런 습관이 드나 보죠, 선물을 받으면 이걸 나한테 왜 주냐는 의심부터 하는 습관이?”

“아주머니를 의심하는 게 아니고….”

나는 머리를 미친 듯이 굴렸다.

“너무 좋은 거니까 그렇죠. 영구기관이라니, 국토부에서 알면 환장할 것 같은데요?”

과학기술부라 했어야 하나? 아님 기획재정부? 외교부? 나는 평소엔 관심도 없던 정부 부처 이름을 기억해 내려 애썼다. 정말 영구기관 같은 게 존재한다면 나 같은 일개 사기꾼 피해자가 아니라 국가기관 전체가 혈안이 돼 독점하려 들었을 테니까.

“호호, 그야 그렇지. 우리가 그동안 열심히 정지(整地) 작업을 해 온 보람이 있어서 이젠 걔들도 신 포도인 양 못 본 척하지만 옛날엔 말야, 그러니까 이걸 지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줄 착각했던 시절에는 이거 뺏어가려고 난리도 아니었어. 심지어 변변히 뺏어 보기도 전에 지들끼리 내가 먼저 발견했으니 내 거니, 니가 먼저 찾았으니 니 거니 싸우고들 앉았더라니까. 먼저 보기만 하면 정당하게 빼앗을 권리가 생기는 것처럼 말이야. 웃기죠?”

“하하, 하.”

“그런데 난 안 웃겨. 우리 은하계가 말야, 그러다 죄 쑥대밭이 됐걸랑.”

우리 은하계라고 말하는 찰나에 아줌마의 동공이 세로로 길쭉해졌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마치 도마뱀 같은 눈… 내가 잘못 본 거겠지?

“그래서 우린 그런 게 이가 갈리도록 지긋지긋해. 진짜로.”

아줌마는 진짜로 뿌득뿌득 이를 갈았다.

“그래서 살아남은 우린 그걸 조각조각 쪼개기로 했어. 아주 많이, 잘게 잘게 쪼개서, 그 조각들을 필요한 이들에게 하나씩 다 줘버리기로 했어. 그리고 이 귀여운 행성계의 누구한테 핫팩을 줄지 결정하는 건 내 작은 소관이 됐죠. 그러니 학생은 그런 웃긴 걱정 안 해도 돼, 우리가 다 알아서 하니깐. 하여튼지 간에 허튼짓이라곤 생각도 못 하게 할 테니 애프터서비스까지 확실! 그러니 학생도 쓸데없는 생각일랑 하덜덜 말고 그저 살다가 너무 추울 때, 한기가 들어 견디기 힘들다 싶을 때 이 핫팩을 대. 손바닥, 배, 허리, 등, 어디든 춥고 시린 데. 그럼 몸에 온기가 돌지. 그리고 몸에 온기가 돌면 말이야….”

아줌마가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내 눈은 찌에 걸린 물고기처럼 아줌마의 손을 따라갔다. 집게손가락이 하늘을 찌를 듯 곧게 펴져 있었다. 그 끝 흐린 하늘에 태워 먹은 계란 노른자처럼 침침한 겨울 해가 보였다.

“기운이 나. 그러니 몸을 따뜻하게 하고 다녀요, 항상. 내가 가만 보니깐 여기 사람들은 몸을 따뜻이 할 필요가 아주 있어 보여.”

아줌마가 들어 올렸던 오른손을 왼쪽으로 벼락같이 내리뻗었다. 찌에 걸린 내 고개도 홱 돌아갔다. 도롯가로 진창을 왕창 튀기면서 07번 마을버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삐,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승합차의 문이 열렸다. 내가 고개를 다시 돌렸을 때 아줌마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멍하니 카드를 찍고 올라 자리에 앉았다. 습기로 흐려진 차창 너머 마을버스 정류장은 틀림없이 텅 빈 채였다. 그리고 내 코트 오른쪽 주머니에는 영구히 70도의 온기를 발산할지도 모르는 핫팩이 있었다. 너무 따뜻해서 맨살에 오래 대고 있으면 저온 화상의 위험이 있는 핫팩이. 어쩌면 내가 죽을 때까지, 그리고 이 우주가 열역학적 죽음에 다다를 아득한 미래에도 70도로 타오르고 있을 무시무시한 핫팩이.

“고맙습니다.”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왠지 모르게 아줌마가 다 듣고 있을 것 같아 허튼 생각은 절대 안 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핫팩의 정체는 지금으로부터 열다섯 시간이 지나면 명확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게 진짜 영구기관이라면 사기당한 좁은 방구석 난방비도 절약하고, 전세금 피해 보상을 촉구하는 일인 피켓 릴레이 시위 때 오들오들 떨다 쓰러지는 사태도 면하게 해주겠지.

마을버스는 수란시장 입구로 향한 커브를 돌았다. 나는 차가운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사기당한 방구석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정도 백일몽을 꾸지 말란 법은 없다. 차창 너머로 폐지가 가득 실린 리어카를 끄는 할머니가 스쳐 지나갔다.
  • 이경 | 소설가

    필자는 서울대 국문과에서 현대소설을 공부하고 신소설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소설 ‘한밤중 거실 한복판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나타난 건에 대하여’로 2022 문윤성SF문학상 중단편가작을 수상했다. 소설집 『오늘 밤 황새가 당신을 찾아갑니다』를 출간했다.
    plumkyung2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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