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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목적

기업목적 = 이윤의 극대화? 그래도 이젠 ‘진짜 이윤’ 이 뭔가 물을 때

신승환 | 169호 (2015년 1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흔히 기업의 목적을 이윤 추구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대 경영학은 이윤을어떻게극대화할 것인지, 그 수단과 방법에 대해서만 말하지무엇이이윤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기업의 목적은 단순한 돈벌이나 이윤 추구로 제한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기업의 활동과 기능을 통해 우리 삶을 풍족하고 풍요롭게 하는 데 있다. 즉 기업의 목적은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속한 사회와 공동체의 존립으로 확장된다.

 

기업 목적은 이윤 극대화로 한정되나

현대 경영학은 기업의 목적에 대해 이윤을 극대화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기업은이윤 추구의 동기에 의해서 운영되는 경제·기술·사회시스템으로서의 생산경제 조직체이다.(김석회, <21세기 교양 경영학>). 기업이 추구하는 이윤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다만 자본의 증식을 의미하는 것일까. 경영학은어떻게이윤을 극대화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질문하지만무엇이이익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적인 논의는 무성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또는 어떤 목적과 가치를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쏟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수단적 논의에 잠겨든 경영학은 한계비용과 한계수익이 일치하면 그것을 곧 이윤으로 파악하며 이를 극대화하기 위한 경쟁과 효율성, 기능의 측면에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데 기업가나 기업에 속한 사람들이 기업 활동을 통해 추구하는 본래적 목적으로서의 이익이 이렇게 얘기되는 경영상의 이윤과 같은 것일까. 과연 기업은 다만 자본의 이윤만 추구하는 수단적 조직체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기업의 목적을 생각하면서 정작 물어야 할 것은 기업이 추구하는 이익이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향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과연 기업이 목적으로 하는 이익이 극대화되면 기업에 속한 사람들이나 기업 종사자, 나아가 기업이 자리한 사회와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주어지는 것일까. 이런 질문은 기업이 살아가는 사회와 공동체 내에서 유지하고 키워내야 할 본래적 목적에 대한 문제로 이어진다. 과연 기업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과 이익은 기업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가치와 의미가 있을까. 그것이 구체적이며 실존적 삶을 살아가는 너와 내게 건네는 말은 무엇일까.

 

이 질문이 실제로 기업을 이끌어가는 이들에게는 불필요하거나 의미 없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기억해야 할 것은 기업과 기업 활동을 통한 경제적 행위 모두는 결국 인간의 삶과 존재를 위한 수단적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이다. 왜 기업을 이끌어가고 경제활동을 하는가. 그것은 결국 나와 나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나의 삶과 존재에 연결돼 의미를 지녀야 비로소 인간의 활동으로서 가치를 지닐 수 있게 된다. 그와 함께 기업 활동은 개인적 영역을 넘어 공동체적 영역으로 확대되며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 그 공동체 없이는 결코 존속할 수 없다는 사실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기업 활동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공동의 존재로 더불어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의 공동체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연결된 관계망과 그들이 함께 이루는 사회 및 공동체 없이는 기업 활동은 물론 경제 행위도 결코 가능하지 않다.

 

물론 정상적인 기업이라면 그 누구도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비윤리적이며 반인륜적 활동을 저질러도 좋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기업의 목적을 말하고 기업 운영을 논의하는 어떤 곳에서도 이런 논의를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을 뿐이다. 현대 경영학에서도 이런 문제는 외면받고 있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기업윤리, 경영윤리 등의 논의가 조금씩 이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기업 경영이라는 측면에서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수단적 관점에서만 다뤄지는 한계를 보인다. 이런 침묵과 외면이 우리 사회에서 반기업적 정서를 부추기거나 기업이 몰가치적이며 가치중립적인 조직으로서 이익만 극대화한다는 인식을 초래한다. 심지어 천박한 재벌, 천민자본주의 등의 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한다.

 

과연 기업은이익만 극대화하면 되는 것일까. 기업에 공동체 윤리나 사회적 책임을 묻는 질문은 과도한 것일까. 치열한 세계적 경쟁에서, 이른바글로벌 생존 경기에서 기업이 이런 윤리와 공동체적 가치에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일까. 기업과 경제 세계를 모르는 백면서생들의 배부른 소리는 아닐까.

 

그럼에도 이런 침묵과 매도가 기업만이 아닌 개인과 사회 전반에 확대될 때 그 결과는 기업에조차 치명적인 결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런 사회와 그 기업은, 그리고 그 공동체는 마침내 죽은 공동체, 죽은 사회가 되고 결국 기업이 자리할 가장 근본적인 토대조차 사라질 것이다.

 

 

 

기업의 본래적 목적은 선()의 추구다

엄밀하게 말하면 목적은 기능과 구분된다. 목적은 그 자체에 깃든 본성을 달성하는 데 있으며 기능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활동과 그를 위해 필요한 체제를 의미한다. 그래서 기능은 목적에 종속될 때만 의미를 지니며 기능이 목적을 훼손하지 않는지, 또는 목적을 상실한 채 기능 자체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작업이 필요해 진다. 그런 작업 없이 기능 자체의 원활함만 바라보면 곧 기능은 목적을 삼키고, 나아가 목적 자체를 배반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수단과 목적을 혼동해 수단이 목적이 되는 역기능을 목격하게 된다. 하나의 체제가 그 자체로는 번성했지만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경우는 모두 이러한 혼돈과 역기능이 쌓여 재앙적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기업 역시 예외는 아니다. 목적과 기능을 구분하지 못하면 기업은 외형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부서지며 무너지고 말 것이다. 여기에 성공의 역설이 자리한다.

 

거듭 기업의 본래적 목적이 무엇인지 되돌아봐야 한다. 기업의 목적은 과연 경영상 이윤추구에만 있는 것일까. 혹시라도 기업의 목적은 이윤추구가 아니라 그를 통해 가능해지는 사람의 삶과 존재를 위한 무엇, 또는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적 가치에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기업의 역기능과 이에 대한 반사회적 정서는 기능과 목적을 착각하고 궁극적 목적을 배반하는 기능 만능의 사고에 잠겨든 결과일 것이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Platon)에 의하면 목적은 그 존재에 좋은 것, 즉 선함()이다. 선함이란 흔히 말하는 착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 존재의 본래 목적에 타당하며 그에 상응하는 어떤 상태를 의미한다. 한 개체의 목적은 자신의 존재에 좋음을 달성하는 데 있으며 그럴 때 그 존재의 의미가 충족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목적을 말하기 위해서는 그 개체의 존재 이유에 대해 말해야 하며 그에 대한 이해가 선행적으로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기업의 목적은 우리들의 삶을 풍족하게 하는 데 있다. 경제활동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고 그 이윤이 결국 우리 삶을 풍족하게 하기 때문이다. 가난과 빈곤을 벗어나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물질적 풍요를 창출하는 데 기업 활동의 궁극적 목적이 자리한다. 이런 삶은 개인적이면서도 또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와 더불어 이끌어가는 삶이다. 사람은 개인적이면서 공동체적이며, 또한 공동체적이면서 개인적이다. 분리된 개체로 살아가기 때문에 흔히 사람을 단독자인 개인으로만 이해하지만 철학적 통찰에 따르면 인간은 결코 다른 사람 없이, 다른 사람과 함께 이루는 사회 없이는 존재하지 못한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 철학자 하이데거(M. Heidegger)는 인간을 실존적이면서 동시에 공동의 존재(共存在)라고 말한다.

 

현대의 진화생물학에서는 이기성과 이타성을 중심으로 인간의 본성을 논의해왔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는 인간은 미시적 차원에서는 경쟁하며 이기적인 듯 행동하지만 거시적 차원에서는 상호협조와 상호관계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는 이타성이라는 기준을 제외한 채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고도 말한다. 이기성과 이타성이란 잘못 짜여진 인간 이해의 패러다임일 뿐인 셈이다. 타자 없이, 공동체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개인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개념이다. 경쟁과 이기심이란 결국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나의 삶에 대한 미시적 관찰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거시적 차원에서의 상호협조와 공()존재성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공동체를 파멸시키는 개인은 결국 그 자신도 그렇게 파멸될 뿐이다.

 

현실적으로 살펴봐도 기업은 기업이 자리한 사회와 그 공동체를 벗어나서는 결코 제대로 존립할 수가 없다. 기업 활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기업 운영자뿐 아니라 기업을 움직이는 기본적 기능을 담당하는 개별 노동자가 필요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들 개인은 기업이 존립하는 데 가장 중요한 개체이며 동반자다. 노동하는 개인이 무너지면 기업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단선적으로 노동을 배제하고 억압할 때 그 기업은 본래의 목적은 물론 기능면에서도 올바르게 움직일 수 없다. 기업의 목적은 자본의 이윤이지만 그 이윤은 기업에 속한 사람들과 기업이 속한 공동체의 사람들을 위한 이윤이다. 기업이 지향하는 이윤 추구의 목적은 인간의 삶을 위한 것이다. 그 이윤은 자본의 잉여가 아니라 가치의 잉여이며 삶의 풍요로움과 유용함을 위한 이익이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애플의 공동 창업자 잡스(Ste-ve Jobs)는 기업을 운영한다는 것은 자신의 철학을 생활로 꽃피운다는 뜻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기업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는가. 기업의 철학은 무엇일까. 그 철학은 분명 단기적 이윤을 넘어서는 기업의 궁극적 목적과 연관된 것이리라. 경제란 말은 유럽어 ‘economy’를 동아시아 문화권 안으로 옮겨놓으면서 유가의 가르침을 대표하던 말경세제민(經世濟民)’에서 따온 번역어다. 이 말은 원래 세상의 이치를 살펴 백성의 어려움을 헤치고 나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끈다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유가의 가르침은 실상 유럽어의 본래 뜻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영어 ‘economy’는 그리스 말 ‘oikos’에서 유래했으니 이 말의 본래 뜻은 살림살이였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세간에 관계되는 것이 경제란 말의 원래 뜻이다. 즉 경제는 장사나 상거래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관계되는 살림살이의 문제였다. 이렇게 보면 기업의 목적 또한 단순히 돈벌이나 이윤 추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한 삶의 문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업의 궁극적 목적은 기업의 활동과 기능을 통해 경제의 본래 목적을 달성하는 것, 이윤을 획득함으로써 우리 삶을 풍족하고 풍요롭게 하는 데 있다. 그 삶은 바로 나와 너의 삶이며, 우리가 만들어가는 사회와 공동체의 존립과 풍요로움을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기업이 기업의 궁극적 목적을 배반한 채 단기적 기능의 측면만 바라보고 움직인다면 그 기업은 단기적으로 이윤을 극대화하고 일시적으로는 살아남겠지만 결코 지속적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 기업이 공유하는 가치, 그것이 기업의 목적이며 그 목적을 달성할 때 기업이 비로소 살아남을 수 있다. 기업은 경영상 여러 활동을 위해 매순간 선택하고 때로는 중대한 결단을 내리기도 하는데 이런 활동과 선택, 결단은 궁극적으로 기업의 본래 목적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 구체적 행위는 본래 목적에 종속될 때만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구체적 경영활동은 물론 경영세습이나 시장에서의 활동, 노동문제를 포함한다. 특히 사람에 관계되는 문제는 그 본래 목적과 가치를 따를 때만이 의미를 지닌다.

 

독일 철학자 칸트(I. Kant)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활동은 궁극적 목적에 종속될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개별 행위는 그보다 상위의 규범을 따르지 못할 때 결코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한 사회가 수용하는 보편적인 규범을 나 자신의 개별적 행위 규범으로 삼을 수 있을 때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 칸트는 이러한 궁극적 규범을 인간의 존재 자체라고 말한다.

 

최근 사회적으로 논란이 된 이른바 땅콩 회항은 사회적으로 오도된 측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는 모습을 보였다는 데 있다. 어떤 기업의 소유주가 이런 분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는 인간다움의 기본 가치와 품위를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자체로 존엄성을 지닌 인간을 수단적 가치로 보면 그 기업은 결코 정당한 기업으로, 지속가능한 기업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

 

본래의 목적 외면하면 지속적인 성장도 어렵다

LG인화원의 이병남 원장은 최근 출간한 책 <경영은 사람이다>에서 기업의 존재 이유를 기업과 사람이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 있다고 말한다. 그는 기업이 추구하는 유일한 가치가 이윤에만 있는지 묻는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옹호한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에 맡겨진 책임을주주 이익의 극대화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와 토론을 벌였던 매키(John Mackey)사람이 먹기 위해서만 사는 것이 아니듯 기업도 이익만 내려고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반박한다. 매키는 결코 기업 윤리만 주장하는 도덕군자가 아니다. 그 자신이 미국에서 가장 큰 유기농 체인인 홀푸드마켓을 창업한, 성공한 기업가다. 매키는 기업이 고객이나 직원의 만족과 행복을 무시하거나 지역사회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다만 이윤만을 극대화하려고 할 때 그 기업은 결코 지속적인 성장을 이뤄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가 오랫동안 기업을 경영하는 가운데 실제 경험한 사실에 의해 자연스럽게 하게 된 생각이다.

 

그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는 현대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되지만 많은 부분에서 사회적으로 역기능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어쩌면사회의 필요악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체제는해체가 아닌 개선의 대상이며 기업 역시 그런 맥락에서 그 역할과 목적을 끊임없이 되돌아보고 새롭게 수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2차 대전 중 페니실린을 대량 생산해 엄청난 이익을 창출했던 제약회사 머크(Merck)를 창립한 머크 역시의약품은 환자를 위한 것이지 결코 이윤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기업이 추구하는 이윤은 오히려 그 목적이 환자를 돌보고 배려할 때 증가한다는 얘기다. 이병남 원장은 이런 예를 들면서 기업이 이윤만을 추구할 때 결코 지속가능한 충만함을 보지 못하며 분명한 기업 철학을 바탕으로 사람과 사회에 유익함을 제공할 때 번성하고 오래 지속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에서 경영자들은 과연 사회적 신뢰를 얻고 있는가. 현실은 결코 그렇지 못하다. ‘경영자가 사회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는가라는 최근의 한 설문 조사에서 한국은 OECD 34개 회원국 중 최하위인 31위를 차지했다. 심지어 IMD(Institute of Management Development) 60개 국가를 대상으로 실시한 기업 신뢰도 조사에서는 52위를 차지했다. 이는 그리스보다 아래 순위로 OECD 국가 중에는 폴란드, 헝가리, 슬로베니아만이 우리보다 아래 있는 결과다. 이는땅콩 회항 사건이전의 조사 결과로, 올해 다시 이런 조사를 한다면 우리나라는 어쩌면 꼴찌를 차지할지도 모른다.

 

 

우리나라는 국민총소득(GNI) 중에서 기업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이 OECD 국가 중 가장 급격하게 증가한 곳이다. 그에 비해 가계소득 비중은 가장 급격하게 하락한 국가에 속한다. 국민총소득 중 가계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락한 것은 기업이익이 소득이나 그외 다른 경로를 통해 가계로 환류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업이 번 돈은 고스란히 기업에만 남아 있다. 경제가 성장했는데도 가계 살림이 좋아지지 않는 것은 기업이 성장의 결과를 개인과 공동체에 나누지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지표와 청년 실업률 등 한국 사회의 현 주소는 어려운 경제 사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물론 이것을 모두 기업만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수많은 기업의 도산과 어려운 경영 여건에서 이런 이야기는 한가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기업이 기업 경영의 궁극적 목적인 인간 삶의 풍요로움과 공동체의 안녕에 기여하지 못할 때 그 책임은 기업에 향할 수밖에 없다.

 

한국인이 기업에 가진 이중적 인식은 어디에 기인하는 것일까. 이 땅의 경제 성장을 이룩한 주역으로 칭송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재벌이라는 말에서 거부감부터 느끼는 인식은 어디서 생긴 것일까. 기업이 단기적 이윤 추구를 넘어 인간 삶을 위한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때 기업은 기업으로 존립할 수 있으며 지속가능한 성장 역시 분명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 선택은 전적으로 기업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으며 그에 따라 기업의 미래도 달라질 것이다.

 

신승환 가톨릭대 철학과 교수 sehanul@catholic.ac.kr

필자는 독일 뮌헨과 레겐스부르크대에서 현대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철학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성찰> <지금 여기의 인문학> <철학 인간을 답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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