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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itary vs. Business Strategy

무적전투기 日 제로센 약점 있고 둔중한 할리데이비슨도 강점 있다

김경원 | 158호 (2014년 8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전략

교훈

적의 약점에 내 강점을 들이밀어라

전쟁 사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제로센의 월등한 기동성에 고전을 면치 못했던 연합군은 당시 주력기인와일드캣의 후속 모델인헬캣개발 시 중무장 및 빠른 상승/하강속도가 가능하도록 개발 방향을 선회. 조종석 주위에 방탄판도 없고, 연료통 보호장치도 없으며, 하강속도 역시 취약한 제로센의 약점을 공략할 수 있는 신형 전투기 설계로 제로센을 제압

경영 사례

1970년대 미국 오토바이 시장에 진출한 일본 업체들은 할리데이비슨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성능과 품질, 가격으로 1980년대 시장을 장악. 위기에 빠진 할리데이비슨은 가장미국적인 것에 호소하며 1950∼1960년대식 복고풍을 강화해 소비자들에게 어필, 회생에 성공 

 

 

편집자주

전략은 원래 전쟁에서 생겨난 말입니다. 전략의 이론은 중국의 <손자병법>부터 시작해서 19세기 독일의 클라우제비츠에 이어 20세기 영국의 리델 하트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에 걸쳐 정립되고, 또 실전에서 적용돼 왔습니다. 그만큼 경영전략은 실제 전쟁사례에서 교훈을 얻을 점이 많습니다. 현장형 경영전략 전문가인 김경원 박사가 전쟁 사례로부터 얻은 전략적 교훈이 어떻게 실제 경영사례에 적용될 수 있는지를 소개합니다. 역사 속에 존재하는 전쟁 사례를 통해 의미 있는 경영 전략의 지혜를 얻어가시기 바랍니다.

 

기업 전략을 수립할 때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있다. 획기적인 신제품 출시 등 경쟁사의 공세를 대응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경쟁사가 강점을 가진 부문에 자사가 경쟁력을 갖추진 못한 부문으로 대응하면서 낭패를 보는 경우다. 예를 들자면 특정 기술에 강한 경쟁사의 신제품에 빨리 맞대응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자사의 취약한 기술력은 생각지도 않은 채 비슷한 제품을 시장에 내놓는 식이다. 차별화되지 않는 유사 제품에 기술력까지 열악하니 경쟁에서 이길 리 만무하다. 경쟁사와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적의 강점에 내 약점으로 대응하는 대신 적의 약점에 나의 강점을 들이밀어야 한다. 바로 <손자병법>에 나오는 피실격허(避實擊虛). 적을 공격할 때 방비가 견고한 곳을 피하고 방비가 허술한 곳을 치라는 뜻이다. 실제 전쟁에서 이와 같은 원칙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그리고 이런 원칙이 경영 현장에선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실제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전쟁 사례

제로센을 이긴 헬캣

1941년 말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약 반 년의 기간 동안 미군은 바다뿐 아니라 공중에서도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의 신예기인제로센(零式)’에 아군의 주력기인 ‘F4F 와일드캣이 열세를 면치 못했다. 당시 전투기 간 공중전의 승패를 좌우하는 요인은 기동성(maneuverability)’이었다. 전투기끼리 뒤엉켜 싸우는 공중전에서 기동성이 더 좋은 비행기가 결국에는 적기의 꼬리를 잡아 후방에서 기관총을 사격하면 결판이 나는 식이었다. 제로센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기동성을 자랑했다. 와일드캣은 제로센보다 더 튼튼하기는 했으나 기동성은 제로센보다 많이 떨어져 고전을 면치 못했다.미군은 개전 후 한참 만에야 존 새치(John S. Thach) 소령이 고안한새치 위브(Thach Weave)’라는 전법(와일드캣 두 기가 제로센 한 기를 상대하는 것)을 써서 간신히 호각을 맞출 수 있었다.

 

그러던 중 1942 6월의 어느 날 미 해군의 정찰기가 알래스카 남쪽 알루샨 열도의 한 무인도에서 제로센이 온전하게 해안가에 처박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공습 도중 대공포에 맞아 불시착한 기체로 조종사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미군의 정보국은 야음을 틈타 이를 실어 내왔다. 미군은 간단한 수리를 거쳐 제로센을 날려봤다. 그리고 해군 항공대뿐 아니라 육군 항공대의 모든 전투기종과 모의 공중전을 붙였다. 결과는 제로센의 전승이었다. 이 무렵 자사가 만들었던 와일드캣이 제로센의 적수가 될 수 없음을 파악하고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새 기종을 개발하던 그루먼(Grumman)사의 엔지니어들도 망연자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새 기종도 기동성이 제로센보다 현저히 떨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기동성을 단 시일 내에 제로센 수준으로 올리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이에 엔지니어들은 발상의 전환에 나선다. 뛰어난 기동성이라는 제로센의 강점을 따라잡기보다는 약점을 파악해 이를 공략하는 방법으로 개발 방향을 바꿨다. 제로센은 일본의 낙후된 엔진기술의 결과인 작은 마력의 엔진에 맞춰 최대한의 경량화를 통해 기동성의 극대화를 추구한 비행기였다. 이러다 보니 조종석 주위의 방탄판은 물론 연료통 보호장치도 생략됐다. 그 결과 중기관총에 한 발만 맞아도 격추로 이어졌다. 또한 기체의 강도가 약해 급격한 하강 시 기체가 손상될 우려가 있어 하강 속도가 늦었다. 약한 기체에 중무장도 할 수 없어 7.7㎜ 경기관총 2문이 주된 무장이었다. 또한 작은 마력의 엔진 때문에 최고 속도도 그리 빠르지 않았다.

 

그루먼 엔지니어들은 이에 대한 대응책이 적기에 꼬리를 물려 공격을 당하더라도 이를 견딜 수 있는 강인한 기체 및 조종사 보호장치라 판단했다. 또 단 한 발로도 적기를 떨어뜨릴 수 있는 중무장과 함께 근접전을 피하면서 치고 빠지는 전법을 구사할 수 있는 빠른 상승 및 하강 속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보다 강력한 엔진이었다. 당시 미국 내에서 항공기용 엔진 중 가장 강력한 엔진은 2000마력까지 끌어낼 수 있었다. 제로센 엔진(950마력) 2배를 넘는 수준이었다.

 

일본의 신예기제로센(零式)’

 

그루먼 엔지니어들은 큰 엔진을 장착하기 위해 개발 중이던 기체를 재설계했다. 불과 한 달여 만에 재설계와 시제품 제작을 해치워 1942 7월 말 시험비행을 실시했다. 강력한 마력 덕택에 신형기헬캣은 강인한 기체와 함께 조종석을 욕조처럼 감싸는 방탄판과 6문의 중기관총 등 중무장을 갖추게 됐다. 최고 속도는 제로센보다 무려 100㎞가량 빨랐으며 상승 및 하강 속도도 훨씬 더 빨랐다. 그루먼은 1942 103일 첫 양산품을 해군에 인도했다.

 

이후 헬캣은 1943년 상반기 동안 상당수의 항공모함에 배치됐고 1943 831일 첫 전투를 치른 이후 제로센을 포함한 수많은 일본 전투기를 격추시켰다. 조종사들은 강인한 기체와 강력한 방탄판을 믿고 제로센을 향해 담대하게 돌진해 근거리에서 강한 화력을 적기에 쏟아붓거나 고공에서 하강해 적기를 기습하고 도망가는히트 앤 런전법을 즐겨 썼다. 설사 적기에 꼬리를 잡힐 경우에도 뛰어난 상승 및 하강 속도를 이용해 쉽게 곤경에서 벗어나곤 했다. 또한 헬캣의 강인한 기체 덕에 수많은 총알을 맞고도 항공모함으로 무사히 귀환한 사례가 무수히 보고됐다. 이에 비해 한 발만 맞아도 폭발하기 일쑤였던 제로센의 조종사들은 공중전에서 헬캣에 걸려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결국 헬캣은 종전까지 191의 격추비를 자랑하며 일본기 총 5156대를 격추해 미군의 승전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는 미군이 태평양전쟁에서 공중전을 통해 떨어뜨린 9282기의 56%에 해당한다. 만약 그루먼의 엔지니어들이 적의 강점인 기동성을 따라잡는 데에만 집착했다면 이런 성과는 없었을 것이다.

 

 

미군의 신형기헬캣

 

경영 사례

일본 오토바이를 물리친 할리데이비슨

2차 세계대전 후 미국 오토바이 시장에서 할리데이비슨(Harley Davidson)은 압도적인 시장점유율을 자랑하며 사실상 독점 체제를 구축했다. 20세기 초반 한때 150여 개에 달하던 미국 내 오토바이 제조업체가 1948년경에는 이 회사를 빼놓고 모두 정리됐기 때문이다. 1950년대 들어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난 유럽, 일본 등으로부터 저가 오토바이의 수입이 늘어나기는 했으나 이 오토바이들은 작은 엔진을 장착한 소형 모델이어서 배기량 750㏄ 이상의 대형 오토바이만을 생산해온 할리데이비슨은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 상황은 1960년대 후반까지 크게 변하지 않아 이 회사의 번영은 지속됐다.

 

그런데 1969년 라켓부터 온갖 스포츠 용품을 만드는 AMF(American Machinery and Foundry)라는 대기업이 이 회사를 비싼 값에 인수했다. 그 당시 대기업 사이에 유행하던 소위비관련 다각화를 행한 것이었다. 그런데 AMF의 경영진은 오토바이 사업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1970년대 들어 일본이 대형 오토바이 시장에도 본격적으로 진출, 할리데이비슨의 텃밭을 심각하게 위협하기 시작했다. AMF의 경영진은 비용 절감을 위해 생산공정의 단순화와 함께 인력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그러자 노사분쟁의 심화와 함께 제품의 질이 크게 나빠지는 등 부작용이 훨씬 크게 나타났다. 1970년대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의 별명은 ‘Hardly Drivable’ ‘Hardly Ableson’1 등 부정적인 것 일색이었다.제품 불량이 많고, 크고 작은 고장이 잦은 오토바이라는 이미지가 만연했다. 여기에다 유명 영화배우 말론 브란도 주연의난폭자(The Wild One)’처럼 당시의 폭주족을 그린 할리우드 영화들의 영향으로범죄자, 불량배나 타는 오토바이라는 제품 이미지까지 가세했다. 품질 악화에 소비자들이 반응하면서 1970년대를 거치면서 이 회사의 매출, 시장점유율, 수익성은 모두 나빠졌다. 예컨대 1972 1000㏄ 이상의 오토바이 시장에서 100%를 자랑하던 시장점유율은 1982 15% 밑으로 떨어졌다. 결국 모회사인 AMF는 이 회사를 팔고 오토바이 사업에서 철수하려고 했지만 좀처럼 원매자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1981년 할리데이비슨의 최고경영자였던 본 빌스(Vaughn Veals)는 최고경영진 13명과 함께 이 회사의 경영권을 모회사로부터 8000만 달러에 사들였다. 회사를 회생시킬 아이디어를 내놓아도 모회사가 번번히 퇴짜를 놓자 회사를 아예 인수할 생각을 한 것이다. 독립 후 경영진은 위기 탈출을 위한 근본적인 전략을 다시 세웠다. 먼저 자사의 오토바이를 일본의 경쟁사들 제품과 비교해 봤다. 성능, 기계적 신뢰성, 가격의 모든 부문에서 할리데이비슨의 오토바이는 일본 제품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또한 단시일 내에 이 문제들을 해결할 역량도 없었다.

할리데이비슨(Harley Davidson) 오토바이

 

하지만 그들은 오직 할리데이비슨만이 가진 특징에 주목했다. 1907년 창사 이래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미군과 함께 전장을 누비는 등 20세기 미국 역사와 함께 해온 유일한 미국제 오토바이라는 이미지는 일본 회사들은 결코 가질 수 없었다. 품질, 성능, 가격 면에서 일본 오토바이들과 경쟁하기보다는 그들에게 없는미국적인 것을 팔자는 쪽으로 결론이 모아졌다. 마침 새로 집권한 레이건 대통령 역시 소련의 군사적 야심에 대응해강한 미국재건을 외치면서 국민들의 애국심에 호소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미국 내에서는미국적인 것에 대한 향수 및 선호의 경향이 크게 유행했다. 이 회사의 새 전략과 주위 상황이 맞아떨어진 것이다.또한 보호무역주의를 표방한 레이건 행정부는 이 회사의 요구를 받아들여 1983년 배기량 700㏄ 이상의 대형 수입 오토바이에 대해 5년 기한으로 45%의 관세를 부과했다.

 

이렇듯 호전된 경영환경이 제공하는 기회를 경영진은 놓치지 않았다. 우선 오토바이 디자인은 미국의 전성기였던 1950∼1960년대식 복고풍을 강화해 소비자들에게 어필했다. 또한 딜러 수를 3분의 1로 줄였다. 그동안 품질도 나쁘고 주위에 흔히 있던 오토바이가 이제는 구입신청서를 내고 몇 달이고 기다려야만 하는 인기상품이 됐다. 게다가 미국의 아이콘으로 여겨지는 이 제품을 오래 소장하고 있으면 가격이 더 오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심리가 소비자들 사이에 퍼지면서 소비자들의 구매욕구를 더 자극했다. 이 회사의 경영진은 딜러 수 감소로 인해 자연스레 줄어든 판매량 문제에 대응해 고가 정책으로 수익성을 확보해 나갔다. 동시에 생산량을 줄이면서 이를 품질 향상의 기회로 삼았다.

 

품질, 성능, 가격 면에서 일본 오토바이들과 경쟁하기보다는 그들에게 없는미국적인 것을 팔자는 것으로 모아졌다.

 

여기에 이 회사를 도와주는 경영환경의 호전이 또 하나 가세했다. 이른바여피(yuppie)의 등장이다. 이들은 전후 세대로서 풍요 속에서 자라나 미국 경제의 고도화에 따라 생겨난 고소득 전문직 계층이었다. 소비 성향이 큰 이들에게 고가 제품이면서 자신들이 자란 1950∼1960년대의 풍요를 상징하는 할리데이비슨은 딱 구입하고 싶은 제품이었다. 1950∼1960년대 폭주족이 입던 가죽 재킷 등도 이들에게는 멋있는 패션이 됐다. 경영진은 이런 트렌드도 마케팅에 활용했다. 1983년 이 회사는 자사 오토바이 소유자들을 대상으로 ‘H.O.G(Harley Owner Group)’라는 일종의 팬 클럽을 만들었다. 둔중하게 생긴 자사 오토바이의 별명 HOG(돼지)를 차용한 것이다. 회사가 지원하는 이 클럽을 통해 소비자들의 충성도도 높이고 가죽 재킷, 부츠, 벨트 등의 제품을 팔아 부가 매출을 올릴 의도였다. 이 클럽은 여피들의 열광적인 호응 속에 미국 내에서만 100만 명 이상의 회원을 확보하며 회사 매출에 큰 기여를 해왔다. 이후에도 할리데이비슨 경영진은 자사의 V자형 2기통(V-twin) 엔진이 내는 독특한 소리를 상표로 등록하려고 했다.2 이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제품의 소리까지 판매하려 했던 이 시도는 경영진의 전략 방향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즉 단순한 오토바이라는 제품을 넘어서미국이라는 문화와 감성을 판매한 것이다.

 

할리데이비슨은 1980년대 이후 큰 흑자를 내며 주가도 크게 뛰었고 미국 내 대형 오토바이 시장에서 지금도 부동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성과 역시 회사 경영진이 일본 오토바이의 강점을 따라잡기보다는 자신만의 강점을 강화시키는 회생 전략을 취한 덕택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김경원디큐브시티 대표 alexkkim7@gmail.com

필자는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 주립대(매디슨)에서 경영학 석사, 컬럼비아대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금융연구실 실장, 글로벌연구실 실장, IMF T/F 팀장을, 삼성증권에서 리서치센터장을 각각 역임했다. 2009 CJ그룹 전략기획 총괄 부사장으로 부임해 전사 전략 및 M&A 전략 수립을 주도했다.

  • 김경원 김경원 | -(현) 디큐브시티 대표이사 겸 대성산업 수석 이코노미스트
    -(전) 삼성경제연구소 금융연구실장, 리서치센터 센터장
    -(전) 삼성경제연구소 전무, CJ그룹 전략기획총괄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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