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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나 자신을 뛰어넘을 사람은 나뿐이다? 아집이 가져온 천재의 몰락

임용한 | 152호 (2014년 5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1815년 워털루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프로이센, 영국, 네덜란드 연합군에 의해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절대 없는천재라 칭송받던 나폴레옹이 패전한 이유는 뭘까. 1805년 아우스터리츠에서 승리한 이후 나폴레옹은 창의적인 부하를 싫어하기 시작한다. 특히 참모들 중에서도 선견지명 있고 예리한 사람을 싫어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뛰어난 장군들이 전사했지만 그들을 이을 인재가 나타나지 않았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의 상황판단은 정확했지만 그의 부하들은 하나같이 그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사고를 쳤다. 나폴레옹이 저지른 또 하나의 실수는 자신을 천재로 만든 상황과 배경을 잊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성공을 거두거나 뛰어난 업적을 남기면 그 능력이 자기 자신에게 내재해 있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건 그런 성공을 이끈 환경적 요인이다. 세기의 천재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그의 측근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그런 천재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런 천재가 왜 몰락했고 비운의 삶을 마쳐야 했을까? 나폴레옹의 최후의 전투, 워털루전투로 가보자.

 

나폴레옹 최후의 전투

워털루전투가 벌어진 장소는 워털루가 아니고 벨기에의 라 벨르 알리앙스라는 곳이다. 세계의 유명한 전장은 실제 명칭과 지역이 다른 경우가 종종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전쟁이 평원, 산골짜기, 바다에서 벌어지다 보니 정확한 지명을 지적하기가 어려운 게 그중 하나다. 워털루는 웰링턴의 사령부가 있던 지명을 딴 것인데 영국, 독일, 네덜란드, 프로이센의 연합군이었기 때문에 웰링턴이 승리의 주역으로 자신과 영국군을 과시하고 싶어서 붙인 이름일 수도 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72000, 웰링턴 공작이 지휘하는 영국-독일-네델란드 연합군이 68000명이었다. 블뤼허가 지휘하는 프로이센군 45000명도 워털루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들이 연합군에 합류하면 나폴레옹은 이길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오기 전에 전투를 끝내야 했다. 각개격파가 나폴레옹의 전술이었고 프로이센군의 합류를 방해하기 위해 프랑스의 그루시 원수가 군사 3만을 이끌고 프로이센군을 추격 중이었다.

 

정면승부에서는 분명히 나폴레옹이 우위였다. 대규모 병력을 운용하면서 이동시간, 전투상황, 보급, 적군의 대응과 아군의 기동, 이런 것들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짜 맞추는 능력은 나폴레옹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286컴퓨터와 586컴퓨터 간 대결이라고나 할까? 웰링턴의 작전은 프로이센군이 도달할 때까지 버티는 것이었다. 양쪽 다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웰링턴은 반달형의 구릉에 굳건한 방어진을 펼쳤다. 그리고 전방에 두 개의 전초기지를 설치했다. 우구몽과 라에이상트라는 요새형 저택이었다. 두 기지는 시간을 끌기 위한 미끼였다. 나폴레옹군이 정면공격을 하든, 우회를 하든 이 요새를 무시하고 통과하기는 껄끄러웠다. 그들은 먼저 요새를 공략할 것이고 시간을 허비할 것이다.

 

1815 618일 오전 8. 공격을 개시할 시간인데 나폴레옹이 머뭇거렸다. 시간을 다투는 전투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나폴레옹의 장기는 포병 전술인데 전날 비가 내려서 땅이 진창이 되는 바람에 포들이 땅에 고착되지 않아 땅이 굳기를 기다렸다는 설과 나폴레옹의 지병인 극심한 위경련이 도졌다는 설이다. 아무튼 전투는 11시가 넘어서 네(Ney) 원수의 독단으로 개시된다.

 

엉뚱한 유인책, 무모한 정면 공격, 명령을 무시한 진군

네 원수는 먼저 우구몽을 공격했다. 그는 구릉에 있는 영국군을 우구몽으로 끌어내려는 속셈이었지만 웰링턴이 꿈쩍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영국군을 유인한다고 병력을 찔끔찔끔 보내는 바람에 시간만 끌고 함락시키지 못했다. 뒤늦게야 영국군 중앙에 대한 집중공격을 시행한다. 포병의 집중사격으로 밀집대형으로 있는 보병을 학살하고 방어진이 무너지면 보병을 투입해 진을 돌파하는 게 프랑스군의 장기였다. 그러나 웰링턴은 보병대를 하나의 가는 줄로 횡대로 배치하고 포격이 시작되면 산등성이로 대피시키면서 포격의 피해를 줄인다. 참다못한 프랑스군 보병 사단이 공격을 개시하지만 큰 피해를 입고 좌절됐다.

 

엉뚱한 유인책, 무모한 정면공격 등 한번 어그러진 프랑스군은 계속 헛된 수를 펼친다. 오후 1시경 네는 2만의 기병대를 일거에 풀어 영국군 보병진을 습격한다. 근대 전쟁에서 보기 드문 공격으로 모든 영화와 그림에서 이 장면은 워털루의 백미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 장면을 좋아하는 사람은 영화감독과 화가들뿐이다. 나폴레옹은 이 사실을 알고 노발대발했다. 기병의 단독 돌격은 이미 100년 전부터 금기사항이었다. 잘 훈련된 장창보병대, 스위스의 파이크병이 창안한 방진은 모든 종류의 기병돌격을 막아냈다. 지금은 총과 대포가 활약하는 전쟁이다. 기병은 포탄과 총에 맞을 확률이 보병보다 5배는 많았다. 오히려 기병의 근접공격으로 프랑스군의 포격이 중단됐다.

 

영국군은 방진을 구성하고 창과 총검의 숲으로 기병의 돌입을 저지하면서 사격을 가했다. 프랑스 기병은 소리만 지르며 돌다가 제풀에 무너지고 말았다. 뒤늦게 네는 실수를 깨닫고 보병과 기병의 연합공격으로 전환했다. 이 공격은 성공해서 영국군 전위를 무너뜨렸다. 마침내 승기를 잡은 네는 최정예인 황제 근위대의 투입을 요청한다. 그러나 황제 근위대는 없었다. 우측에 프로이센군이 등장하는 바람에 긴급히 전선의 오른쪽으로 투입된 것이다.

 

나폴레옹은 전투의 승부처가 워털루라고 보고 프로이센군을 추격해간 그루쉬에게 전령을 보냈다. 추격을 그만하고 돌아오라고. 그러나 그루쉬는 명령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진군했다. 문제는 프로이센군은 이미 그루쉬와 엇갈려 워털루로 진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백일천하의 종말

오후 6시경 나폴레옹은 후퇴할 것인지, 프로이센 본대가 오기 전에 승부를 결정할 것인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나폴레옹은 후자를 택했다. 최정예인 황제 근위대를 다시 편성해 중앙으로 내보냈다. 그들은 전장에서 물러선 적이 없다고 알려진 불패의 부대였다.

 

이때는 웰링턴도 곤경에 처해 있었다. 집요한 프랑스군의 포격으로 수비대가 상당히 물려져 있었다. 그때 프로이센의 원군 일부가 웰링턴의 중앙에 도착했고 이때 프랑스 근위대가 공격해 왔다. 웰링턴은 이곳이 승부처라고 보고 대담한 결정을 내린다. 나폴레옹에게 가려지기는 했지만 웰링턴의 이 결정은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대담한 결정이었다.

 

이때의 전투는 총의 성능이 떨어져 총격으로 승부가 나지 않는다. 총격 후 백병돌격으로 완성된다. 그러므로 수비대형을 두껍게 배치한다. 웰링턴은 과감하게 백병전을 포기하고 병력을 한 줄로 늘였다. 프랑스 근위대가 능선에 거의 도달했을 때 웰링턴이 길게 늘여 놓은 수비대가 일제히 일어서 사격을 가했다. 그것도 일직선이 아니라 삼면으로 감아선 형태였다. 정면으로 사격하는 것과 십자 교차사격은 명중률에서 엄청난 차이가 난다. 단 한 번의 일제사격에 프랑스군 30%가 피탄당했다. 보통 10∼15% 정도인 것에 비하면 상당한 타격이었다. 그래도 근위대가 돌격하면 영국군 방어진은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엄청난 사격과 삼면을 감아선 영국군 병력에 천하의 근위대가 놀라 공격을 포기하고 후퇴했다. 마침내 프로이센군 본대가 등장하자 프랑스군은 무너지고 말았다. 이 패전으로 나폴레옹의 백일천하도 끝난다.

 

패전 원인

워털루전투는 전사 중에서 가장 많이 연구된 전투다. 그만큼 패전의 결정적 원인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다. 나폴레옹도 자신이 분명히 이긴 전투였는데 패전한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나중에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를 가서도 나폴레옹은 자신의 충직한 참모장과 함께 워털루 전투를 복기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전투의 패인은 쉽게 설명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큰 전투일수록 변수도 많고 우연도 많다. 그런 하나하가 승부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보면 사실상 정답이 없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근원적인 한계는 지적할 수 있다. 워털루는 그 상처가 곪아터진 하나의 증세였을 뿐이다.

 

나폴레옹은 천재였다. 역사에서 증명된 천재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하나 있다. 자기 업적에 대한 불만족, 새로운 시도에 대한 욕구, 항상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욕망이다.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위해서는 미지의 영역이 주는 불확실성과 불안감을 이겨내야 한다. 천재들은 보통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확신으로 이 불안을 이겨내곤 한다. 그런데 이런 자부심은 간혹 이런 명제로 발전하곤 한다. “나 자신을 뛰어넘을 사람은 나 자신뿐이다.”

 

이런 자부심도 자신을 다그치기 위한 것이라면 괜찮다. 주머니 속의 송곳(囊中之錐)이라고, 탁월한 사람은 아무리 겸손하고 조심해도 평범한 사람과 똑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나폴레옹에게 이것은 독이었다. 1805년 아우스터리츠의 승리(DBR 149천재 나폴레옹, 아우스터리츠에서 빛나다참조.) 이후 나폴레옹은 잘난 부하, 창의적인 부하를 싫어하기 시작한다. 특히 참모들 중에서도 선견지명 있고 예리한 사람을 싫어하게 된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용맹한 장군, 뛰어난 장군들이 먼저 전사한다. 그들을 이을 인재가 나타나지 않는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고 유럽을 제패하면서 그의 군대는 거대해지지만 주변의 인재는 늘어나지 않고 오히려 줄어든다.

 

워털루에서 실수를 거듭했던 네 원수는 충직하고 노련한 장군이었다. 그러나 한계가 분명했다. 나폴레옹 스스로네는 군단장으로서는 더 없이 유능하지만 그 이상은…”이라고 평가했다. 그런 네가 워털루같이 거대한 전투를 올바르게 지휘할 수 있었을까?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의 상황판단 능력은 정확했지만 그의 부하들은 하나같이 그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사고를 쳤다. 천하의 나폴레옹도 사방에서 붕괴하는 둑을 홀로 막을 수는 없었다.

 

나폴레옹이 저지른 또 하나의 실수는 자신을 천재로 만든 상황과 배경을 잊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성공을 거두거나 뛰어난 업적을 남기면 그 능력이 자기 자신에게 내재해 있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아니다. 사실은 그런 성공을 이끈 환경적 요인이 더 중요하다. 세기의 천재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천재도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나폴레옹의 뛰어난 능력은 인간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이다. 아직 심리학도, 여론조사도, 인간행동에 대한 연구나 경영학도 없던 시절에 나폴레옹은 오직 개인의 역량으로 경지에 올랐다. 그런데 젊은 시절의 나폴레옹은 외톨이에 가난뱅이, 이방인이었다. 그를 동정했던 사람들도 그가 불운한 천재였기 때문이 아니라 말 그대로 워낙 불쌍해서 동정을 베풀었던 것이었다. 그런 역경과 고독함이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사람들을 예리하게 관찰할 수 있게 해줬을지도 모른다. 통령이 되고, 황제가 된 후에도 그의 예리한 지성은 그대로였지만 환경이 바뀌었고, 그는 예전처럼 소외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관찰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그의 측근과 부하들에 대한 예측도 빗나갔다. 나폴레옹은 20대에 사령관이 됐고, 30대에 통령이 됐다. 그의 장군들도 대개가 젊었다. 젊은 사람은 예측하기가 쉽다. 단순해서가 아니라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작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지위가 올라가면 삶의 변수가 다양해진다. 아무리 천재라도 그 많은 변수를 헤아릴 수도 없고 다 파악할 수도 없다. 그래서 천재에게 한계가 닥친다. 나폴레옹은 최후의 순간까지 천재성을 잃지 않았지만 자신이 천재도 감당할 수 없는 영역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놓쳤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yhkmyy@hanmail.net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 임용한 임용한 |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yhkmy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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