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CIS(Naval Criminal Investigative Service)는 미국 해군 범죄수사국 소속 특수요원들의 활약상을 다룬 수사물이다. 2003년부터 시작된 장수 시리즈지만 아직도 전미 시청률 1위를 놓치지 않는 미국 안방극장의 제왕이다. 최첨단 범죄 수사의 특성상 NCIS 요원들은 정보기술(IT)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그런데 정작 NCIS의 주인공이자 개성 강한 요원들을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으로 이끄는 르로이 제스로 깁스는 컴맹이자 기계치다. 62세의 장년 배우 마크 하몬이 분한 깁스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잘 쓸 줄 모르고 관심도 없다. 하지만 수십 년간 현장 요원으로 활동하며 얻은 뛰어난 직관과 감으로 어려운 사건을 척척 풀어낸다.
깁스의 특징이 유감없이 발휘된 장면은 시즌 7의 8회에 등장한다. 한 인터넷 보안업체에 괴한들이 침입해 총격전이 발생하고 이 과정에서 여성 해군 중위 1명이 피살된다. 경찰과 대치하던 범인들은 도주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워싱턴 전역의 정전을 유도한다. 손전등과 폴라로이드 카메라, 등사기 등 아날로그식 기계로만 범인을 밝혀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등사기를 사용할 줄 모르는 젊은 팀원들은 우왕좌왕하며 쩔쩔맨다. 하지만 깁스는 범인의 몽타주를 복사하고 수기로 지문을 조회하는 등 능수능란하게 대처한다. 무사히 범인을 잡고 정전 문제를 해결하자 팀원들은 컴퓨터와 휴대폰으로 밀린 e메일을 체크하며 좋아하는데 정작 깁스는 컴퓨터를 꺼버리고 사무실을 나선다.
이는 최근 인기를 끈 드라마 ‘직장의 신’에 등장하는 28년 차 노장 고정도 과장의 모습과 유사하다. 디지털 시대에 뒤처진 고 과장은 하루의 대부분을 회사에서 잠을 자거나 과자를 먹으며 보내 ‘능력 없는 짐짝’ ‘고장 난 시계’로 불린다. 어느 날 중요한 프로젝트를 앞두고 수기 계약서를 요구하는 거래처 대표 앞에서 모두 어쩔 줄 모르는 가운데 그는 만년필을 꺼내들고 능숙하게 계약서를 작성하며 위기에 빠진 회사 전체를 구한다. 고 과장은 “회사 생활은 시계야. 작은 바늘과 큰 바늘이 다 같이 가니까 나 같은 고물도 돌아가는 거야”라는 명언을 남겼다.
깁스와 고정도 과장의 일화는 외환위기 이후 한국 기업문화에 알게 모르게 파고 든 소위 ‘젊은 나이도 스펙’이라는 논리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은 2011년 한 인터뷰에서 다음의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재정경제부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외환위기 당시 해외 은행 인수합병(M&A) 사례를 연구하기 위해 스웨덴으로 갔을 때다. 그는 현지 은행 임원에게 “M&A할 때 인력 구조조정이 제일 어렵지 않냐”고 질문했다. 돌아온 답변은 “전혀 어렵지 않다. 경력이 짧은 순서대로 자르면 된다. 두 가지 이유다. 금융은 네트워크 비즈니스이므로 실리적 이유에서 네트워크가 풍부한 경력 많은 직원을 살려야 한다. 인간적인 이유에서도 재취업이 쉬운 젊은이가 우선 구조조정 대상이 되는 게 옳다”였다. 최 전 장관은 ‘이게 바로 선진국이구나! 한국은 나이 든 사람을 노쇠한 퇴물로 취급하는데 스웨덴은 이들의 축적된 경험과 지식을 인정해 선진국이 됐구나’라는 생각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광고 카피가 유행한 지 10여 년이 지났건만 현실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젊음’을 선호하는 경향은 오히려 더 강해지는 추세다. 초고령화 사회가 이미 도래한 상황에 예전과 달리 젊은 편에 속하는 중장년층을 무작정 집에서 쉬라고 하는 것이나 조직 전체의 짐짝이나 민폐로 취급하는 게 사회 전체의 활력이나 생산성에 도움을 주는지 의문이다. 알맹이 없다는 평가가 많은 천편일률적 정년 연장 제도 대신 어떻게 하면 중장년층의 경험과 지식을 살려 이들의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을지 기업과 사회 전체가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하정민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dew@donga.com
필자는 고려대를 졸업하고 한국정책대학원(KDI)에서 MBA 학위를 받았다. 2005∼2007년 여기자 최초로 뉴욕특파원을 지냈다. 저서로 스포츠와 기업 경영의 공통점을 분석한 <건곤일척: 모든 것을 걸어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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