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망 기술
기술의 발전은 실생활에 선행한다. 그러나 진화된 기술은 완만한 수용곡선을 따라 사회에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일반적인 소비자들이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기술의 변화를 느끼는 일은 드물다. 현실에서 우리는 변화의 추이에 민감하지 않다. 요즘 우리가 손바닥 위나 호주머니 속에 가지고 다니는 스마트폰은 1969년 미국 항공우주국이 인간을 달에 보낼 때 사용했던 정도의 컴퓨팅 파워를 갖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온 것처럼 태연히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처럼 시간의 트랩에 빠진 사람이 10년이나 20년을 앞질러 미래에 도착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시간의 단절로 인해 모든 것이 급격하게 변화돼 있음을 느끼고 기술이 만들어 낸 여러 가지 변화를 경이롭게 바라봐야 할 것이다.
사회학자 게르하르트 슐체는 미래의 새로운 모습들은 과거에 있었던 것들의 재조합일 뿐이라고 ‘가장 좋은 세상’에서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재조합의 양상과 다양성은 상상의 크기만큼이나 거대하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경제 산업 구조와 라이프스타일에도 많은 변화들이 생긴다. 증기기관의 발명이 농경사회를 산업사회로 견인했고, 트랜지스터의 발명이 정보사회로, 인터넷의 탄생이 그 다음 지식기반의 사회로 끊임없는 변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지식기반의 사회가 앞으로 어떤 식으로 구체화되고 변모될지 예측해보는 일은 커다란 담론을 끌어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우선 미래 변화의 동인(動因)이 될 ‘메가트렌드’가 무엇인지 짚어보자. 그리고 트렌드에 따라 지금과는 전혀 다른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 2020년에는 어떤 기술들이 우리의 하루를 지배할지 예측해본다.
2020 메가 트렌드
1. 저출산과 고령화가 유발하는 인구 구조의 변화
2. 대기온난화와 같은 기후문제와 환경문제
3. 화석연료의 고갈, 식량과 물 부족, 신재생에너지 같은 자원의 가치변동
4. 신자유주의가 쇠퇴하고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야기되는 국제 정세와 체제의 변화
5. 소셜네트워크와 모바일을 통해 분출되는 사회적 욕망이 만들어 내는 네트워크 사회의 진화
이상의 다섯 가지는 현재 사회의 변화 양상에서 추측해볼 수 있는 2020년의 트렌드다. 인구 구조의 변화와 사회적 욕망의 진화는 인간의 삶을 연장하고 가치를 극대화하고 싶은 의지로 이어진다. 이는 바이오/의료 분야와 여러 가지 융합기술의 발전을 가속시킬 것이다. 또한 환경문제와 자원의 가치 변동이 함께 부각되면서 에너지와 환경 관련 분야에 큰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 또 IT 서비스와 콘텐츠가 서로 연결돼 가치가 극대화되는 방향으로 온·오프라인의 공간융합이 진행되고 그 위에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데이터들이 본격적으로 결합될 것이다.
이런 트렌드들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혁신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2020년을 지배할 유망기술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물론 셀 수없이 많은 기술들이 어우러져 다양한 변화를 만들어 내겠지만 여기에서는 특별히 우리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기술들을 골라 소개한다. 특히 개인화, 융합, 스마트이라는 키워드를 지향하는 10가지 유망기술들을 선정했다.
1.오직 나만의 것들이 만들어지는 세상: 3D 프린팅
2020년 어느 날. 필자는 집에서 쓸 거실 등을 만들기 위해 앱스토어에서 몇 가지 부품과 케이스 도면을 다운로드받는다. 이를 시뮬레이터에 넣고 가상으로 조립을 하고 이리저리 돌려보고 동작도 시켜본다. 부품의 사이즈가 맞지 않아 정확하게 원하는 크기로 바로 수정한 다음 프린트 버튼을 누른다. 10분 후, 3D 프린터에서는 실제 3D 프로토타입이 완성된다. 맘에 드는 문구도 추가해 친구들에게 전송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앱스토어에도 등록한다. 3D프린터가 가정마다 한 대씩 보급돼 있고 컬러 레진 카트리지의 가격이 많이 저렴해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제는 사람들이 마트에서 공산품을 구매하는 대신 나만의 제품들을 직접 출력해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업들도 이런 추세를 따라가고 있다. 블록 장난감 회사인 레고(Lego)는 일반형 레고 블록의 오프라인 매장 판매량보다 개인화된 주문형 레고 판매량이 앞선 이후 아예 인터넷에 오픈마켓을 연다. 그곳에서 사용자들이 직접 디자인하고 업로드하는 수만 종류의 레고 블록을 사용자 7: 회사 3의 수익모델로 판매하기 시작한다. 환경문제에 대한 의식도 높아서 합성수지 계열의 레진 대신 친환경 레진이나 재활용 레진 카트리지 제품들이 대세를 이룬다.
이스라엘의 한 회사에서는 도전성 배선을 함께 프린팅할 수 있는 고급형 3D프린터의 발매를 개시했다. 내부에 전기가 흐를 수 있게 설계돼 불이 들어오거나 전기적 동작이 가능한 복잡한 형태의 프로토타입도 쉽게 프린팅할 수 있다. 초소형 마이크로 프로토타입을 출력할 수 있는 초정밀 3D 프린터가 출시돼 고가지만 정밀제품이 필요한 기업들이 구비하기 시작했다. 또 3D프린터로 작품활동을 하는 예술가들이 출현했다. 이들은 인터넷에서 한정수량만 출력할 수 있는 다운로드형 작품을 판매한다.
가상의 시나리오이지만 이렇듯 3D프린터의 보급은 대량 생산 체계의 산업사회가 가진 가치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개성과 다양성이 극대화되는 신경제의 도래를 요구하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이제 소유보다는 ‘다름’과 ‘공감’에 방점이 찍힌다. 언제든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게 되면서 역설적으로 꼭 원하는 것만 가지게 되는 선택적 풍족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3D 프린팅은 아직은 초기단계지만 시장 규모가 향후 3년 동안 2배로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소비재나 자동차부품, 시제품 제작 등에 주로 응용이 되겠지만 장기, 혈관, 뼈, 임플란트, 보청기와 같은 의료목적으로도 이용될 것이다. 이와 더불어 CAD 설계툴, 시뮬레이터, 렌더링 툴 등의 지원 산업도 동반 성장할 것이다. 현재 이 산업에는 Stratasys(Objet합병), Delabots, Adafruit, ThingLab, Makerbot Industries 등 많은 기업들이 시장을 선도하기 위해 다양한 3D 프린팅 방식을 개발해 경쟁하고 있다.
한국도 캐리마, 로킷 등 몇몇 중소기업이 이 분야에 진출해 있기는 하나 국가 전반적으로 원천기술이나 소재응용 쪽에 투자와 연구개발이 미약한 편이라 경쟁력이 부족하다. 따라서 대기업과 정부의 투자, 기술 중심 대학원 랩들의 경쟁력 확보가 필요하다. 한편으로는 총기 제작이나 지적재산권 보호를 위해 범국가적인 협의와 준비도 필요하다. 통제받지 않는 소규모 제조가 가능해지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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