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Scenario
편집자주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 한 대통령 후보가 출마 선언문에서 낭독한 이 말은 미국의 공상과학(SF·Science Fiction) 소설가인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으로부터 빌렸습니다. SF 작가들은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기술과 소비/사회 현상을 과학자나 사회학자보다도 먼저 예측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곤 합니다. 일례로 아서 C. 클라크(Arthur C. Clarke)는 1968년 쓴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뉴스패드’라는 이름으로 아이패드 형태의 터치스크린 전자신문을 정확히 묘사했습니다. 탱크(H.G. 웰즈가 1903년 쓴 소설에 묘사됨. 실제 발명은 1916년), 큐비클 형태의 사무실(E.M. 포스터의 1909년 소설에서 처음 묘사. 실제로 기업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전파 레이더(휴고 건즈백이 1911년 쓴 소설에 등장. 실제 발명은 1933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스페셜 리포트에서는 동아일보 장강명 기자가 SF 단편소설의 형태를 빌려 2020년 서울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장강명 기자는 장편소설 <표백>(2011년 한겨레문학상)과 <뤼미에르 피플>(2012)을 펴낸 소설가이자 SF 애호가이기도 합니다. SF의 통찰력을 통해 미래의 가능성을 엿보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2020년 10월10일, 오전9시22분, 송도인천타워 부근
“‘주요 20개 국+2단체(G20+2)’ 송도 시민들이 만듭니다.”
슬로건 참 지지리도 못 만들었네. 최은호 대통령은 리무진 안에서 회의장인 송도인천타워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연도가 2020년이고 참석하는 나라가 20개이며 국가는 아니지만 국가급으로 대접받는 초국적 단체 2개, 그리고 한국에서 2번째로 열리는 주요 20개 국 정상회의이니까 ‘2’라는 숫자를 강조하면서 재밌는 슬로건을 만들 수 있을 텐데…. 저 슬로건은 혹시 일부러 ‘사실 우린 관심 없소’라는 뜻을 드러내려고 지은 것 아닐까?
시위대 때문에 차가 막히는 바람에 쓸데없는 잡념이 길어졌다. 하긴, 맥 빠지는 슬로건 문구 못지않게 시위대의 열기도 밋밋하다. G20 정상회의가 서울에서 처음 열렸던 10년 전 2010년(그때 최 대통령은 국회의원이었다)의 시위대에 비하면 장난 수준이다. 오늘 시위대 숫자는 얼핏 보기에도 1000명이 안 돼 보인다. 인천타워가 있는 블록을 간신히 한 바퀴 두른 수준이다.
숫자도 예전에 비해서 확실히 줄었지만 시위 양식도 좋게 말해 ‘법 지키는 시위대’가 됐고 비꼬아 얘기하자면 야성(野性)이 사라졌다. 통신기술이 발달하면서 점점 외출을 꺼리는 풍토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최 대통령이 생각하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건 대량 보급된 경찰용 드론(drone)이다. 과거 군용으로나 쓰던 무인항공기 드론은 잠자리 크기로 소형화되면서 가격이 크게 떨어졌다. 초소형 카메라가 하나 달려 있고 시속 40㎞의 속도로 상하좌우로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보급형 모델이 고작 탕수육 두 그릇 가격이다. 카메라가 3개 달리고 속도가 조금 더 빠르며 360도로 회전이 가능한 경찰용 제품도 그리 비싸지 않다.
지금 저 건물 주변에 드론이 몇 대나 떠 있을까? 1000대? 2000대? 요즘 만들어지는 경찰용 드론은 곤충 떼처럼 군집지능이 있다. 500대 이상이 한자리에 있으면 서로 정보를 교환하면서 시위대의 움직임을 상당한 수준으로 예측하고 한발 앞서 좋은 ‘목’에 떠 있다가 증거 영상을 채집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조금이라도 불법 행위를 저지르면 바로 사진 수백 장이 찍힌다. 여러 각도에서 찍힌 사진 때문에 얼굴 윤곽선이 3차원으로 그려지고 한두 시간이면 신원이 파악된다. 마스크나 두건을 쓰고 있어도 소용없다. 이 드론들은 비가시광선 영역도 촬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그가 원내대표 시절이었을 때 드론 금지법안이 국회 상임위에 올라왔다가 제대로 논의되지도 않은 채 폐기됐다. 너무 늦게 올라온 법안이었다. 경찰과 경찰 출신 의원들이 “드론이 없으면 도시 뒷골목은 다시 1990년대 수준으로 무방비 상태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섰고, 아이들의 안전을 걱정하는 학부모들이 상당수 동조했다. 게다가 ‘파파라치형 셀카’를 찍으려는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개인용 드론이 유행해 수십만 대가 시중에 팔린 상태였다. 그것을 일일이 회수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으며 또 허가를 받아야만 드론을 살 수 있게끔 하는 법안에 찬성하는 유권자는 많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드론 금지법안은 처리되지 못했지만 스마트 콘택트렌즈 금지법안은 그 회기에 통과됐다는 점이다. 카메라가 달린 렌즈와 저장장치가 달린 본체가 분리돼 있고 눈에 보이는 영상을 그대로 5시간 동안 초고화질로 저장할 수 있는 그놈의 콘택트렌즈가 널리 유포됐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야말로 사생활의 종말이다. 이 렌즈는 한국에서 제일 처음 개발됐고, 한국에서 제일 먼저 금지됐다. 다른 나라에서도 바로 금지법이 생겼다. 가산디지털미디어단지의 중소기업에 불과했던 스마트 콘택트렌즈 개발업체는 그 후 군수업체가 됐다.
최 대통령은 눈길을 다시 차 안으로 돌렸다. 앞좌석 등받이와 그의 눈 사이에는 ‘가상 화면’ 홀로그램이 떠 있었다. 실체 없는 허상이지만 깜빡거리는 램프 표시에 손을 댈 때에는 그럴듯한 촉감도 느껴졌다. 정전기를 이용한 촉감 기술이다.
홍보수석실에서 보내 온 보고서가 펼쳐졌다. 인도 정부 대표단이 오늘 아침에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회의에 임하는 미국의 태도에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는 내용이었다. ‘세계 각국이 서비스 부문 인력시장을 더 개방하고 관련 비자제도를 갖춰야 한다’는 인도의 요구는 간단하고 또 예상된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번 회의에 참석하는 정상들이 발표할 공동 성명서(코뮈니케)에 포함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요구를 들어줬다간 미국에서 구직자들의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G20+2 회의장인 송도인천타워 1층에서 마지막 보안검색이 있었다. 엑스레이 검사대도, 폭발물 탐지견도, 보안검색 요원도 없었는데, 심지어 그는 대통령인데도, 괜히 가슴이 뛰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나노 로봇이 옷과 가방을 뚫고 들어와 그 안을 이 잡듯 살핀다는 게 영 꺼림칙했다.
송도 자유경제지구에 있는 병원에서는 신체검사를 할 때 나노 로봇들을 환자의 몸속에 넣는 검진법을 택할 수 있게 한다고 들었다. 대장내시경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보다 나노 로봇이 몸 안에 들어오는 게 더 불쾌한 일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오전10시38분, 송도인천타워 국제회의장
“뭐, 우리 사이에 이견은 없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최 대통령님?”
독일 총리가 친근한 표정으로 말했다. 입 모양과 실제 말소리가 다른 것이 아주 조금 거슬린다. 어렸을 때 TV에서 하던 토요명화 같은 더빙 외화를 보는 느낌이랄까. ‘그렇지 않아요, 최 대통령님?’이라는 말은 아마 영어의 ‘Isn’t it?’에 해당할 텐데 저렇게 번역하는 게 옳은 걸까 하는 쓸데없는 궁금증도 머리를 스친다. 귀에 꽂은 실시간 통역기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진다.
오전의 환영 리셉션 행사는 실제로는 정상들이 회의장 구석에서 삼삼오오 비공식 모임을 가지라고 멍석을 마련해주는 자리다. 정상들끼리 ‘진짜 대화를 할 수 있는 때’라고 부르는 시간이다. 특히나 올해 G20+2 의장국인 한국의 대통령은 이 시간이 아니면 다른 정상들을 긴밀히 만날 기회가 없다. 최 대통령은 방금 독일 총리에게 한국의 지나친 무역흑자를 조정할 테니 조금만 참아 달라고 부탁한 참이었다.
‘위스퍼링(whispering) 통역’이라고도 하는 근접통역사가 최 대통령과 독일 총리에게서 두 걸음 정도 물러난 위치에서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구글이 개발한 실시간 통역기가 갑자기 고장 난다거나 혹은 기계로는 번역할 수 없는 미묘한 뉘앙스 문제가 발생할 때 돕기 위해 배치된 요원들이다. 최 대통령은 취임한 후 수십 번의 정상회담에 참석했지만 근접통역사를 한 번도 부른 적이 없다. 저 근접통역사가 가장 최근에 대기 상태에서 벗어나 실제 일을 한 적이 언제일까.
국제회의장 안에는 같은 처지의 근접통역사가 국가 정상과 단체 수장들의 2배수만큼, 그러니까 모두 44명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없어도 되는 사람들이다. ‘어떻게 보면 저들이야말로 지금 한국 고용 문제의 상징이다’라고 최 대통령은 생각했다.
제조업으로 커 온 한국에는 그런 ‘잉여 고용’이 많았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생산직 중 최소 15%가 잉여 고용이라는 보고서도 읽어봤다. 이미 모든 공정이 자동화됐고 심지어 최근의 기계들은 고장이 나도 스스로 알아서 고장을 수리할 수준의 인공지능을 갖추고 있다. 노조와 일부 경영학자들은 생산 라인에서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며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이 있다고, 또 만의 하나 비상사태를 대비해 인간 근로자가 라인에 배치돼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 대통령 자신과 그가 속한 정당도 그런 주장을 적극적으로 찬성한다. 그러나 그것은 표를 얻기 위해서일 뿐 실제로는 사람이 없어도 공장이 돌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최 대통령은 안다. 군인의 수도 절반 이상 줄였는데 국방에는 별 문제가 없지 않은가.
“최 대통령님도 점심 때 창덕궁에 가시나요?”
독일 총리의 질문에 최 대통령은 정신을 차렸다.
“그럼요, 진짜 권력자들이 모이는 자리인데. 우리 같은 정상들이 가서 눈도장 찍어야죠.”
‘진짜 권력자들’이라는 최 대통령의 대답에 독일 총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G20+2 기간에 열리는 비즈니스서밋(B20)을 위해 참석한 세계 주요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오늘 창덕궁에서 오찬을 갖는다. 최 대통령은 CEO들이 진짜 권력자이고 국가 정상들은 그냥 임시직일 뿐 아니냐는 농담을 던진 셈이었다. 그러나 그 농담에는 상당한 진실이 담겨 있기도 했다.
스마트 도로를 통해 간다고 해도 송도에서 서울 시내에 있는 창덕궁까지는 30분 가까이 걸릴 것이었다. 출발시간에 쫓겨 최 대통령은 끝내 중국 국가주석이나 미국 대통령과는 긴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G2 수반 두 명이 대화를 너무 오래 했다. 몇 년 전에 휴대용 핵폭탄 공격을 받은 미국은 중국에 테러조직에 대한 공동 대응을 요청했을 것이고, ‘중국붕괴론’으로 고민하고 있는 중국은 기업관련법 세계화의 속도 조절을 대가로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국적기업들이 투자 대상 국가에 법제도 개혁 압력을 넣고, 점점 각국의 기업 관련법들이 미국의 상거래제도를 닮아가는 현상에 대해 정작 미국 정부가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그런 물음에 대해 생각해볼 때마다 최 대통령은 ‘진짜 권력자는 국가 정상이 아니라 기업 총수들’이라는 농담이 단순한 농담이 아님을 느꼈다.
회원 가입만 해도, DBR 월정액 서비스 첫 달 무료!
15,000여 건의 DBR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이용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