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1894년 조선에서는 두 가지 전쟁이 벌어진다.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다. 동학군이 봉기하자 조선은 청나라에 원군을 청했다. 조선을 침공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일본은 조선에 문제가 생기면 동시파병을 하기로 한 톈진조약(天津條約)을 구실로 제멋대로 조선에 군대를 투입했다. 조선은 즉각 항의했지만 다른 나라 군대가 유유히 상륙해서 내륙으로 전진해도 저지할 군사력이 없었다.
1894년 조선에서 벌어진 청일전쟁
일본은 명치유신 이래 비축해 온 근대화 정책의 힘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청나라도 만만치 않았다. 17세기만 해도 청나라의 팔기군은 세계 최고의 군대였다. 아편전쟁으로 충격을 받은 청은 만주족과 한족이 손을 잡고 서양의 군수산업을 수입해 중흥정책을 추진했다. 그것이 양무운동이다. 과거 우리는 양무운동을 지나치게 무시했다. 양무운동은 부정부패로 실패했고 청일전쟁에서 청군은 구식무기로, 일본군은 신식무기로 무장해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청일 양국은 아직 독자적인 브랜드의 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모두 유럽산 무기를 수입하거나 라이선스 생산을 하고 있었다. 양무운동이 부패로 얼룩지긴 했지만 청나라의 GDP는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청군은 일본군과 최소한 동격이거나 더 좋은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청군은 산둥반도를 출발해 아산으로 들어온 부대와 만주에서 출발해서 북부지방으로 들어 온 2개 부대가 있었다. 일본군은 서울에 여단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청군의 주력은 만주군이었다. 우세한 병력으로 서울의 일본군을 축출할 예정이었다. 여단 규모인 아산의 청군은 그때 남북에서 협공할 예정이었다.
계획은 좋았지만 청군은 느렸고 일본군은 빨랐다. 만주군의 병력과 상황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도 오사마 장군은 과감하게 서울의 병력을 빼서 아산의 청군을 공격했다. 일본군의 병력은 보병 13개 중대, 공병 1개 중대, 기병 1개 중대, 포병 1개 대대로 약 2500명이었다. 청군은 3500명 정도였다.
7월 28일, 천안의 성환(成歡)에서 청군이 일본군을 가로 막았다. 아산군은 여유가 있었다. 시간은 청군의 편이었다. 만주군이 내려오면 일본군은 꼼짝없이 갇힌다. 지휘관 섭지초는 수비전을 택했다. 성환은 적격지였다. 청군은 구릉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구릉 앞을 흐르는 안성천은 이곳에서 Y자로 갈라져 일본군은 하천을 2개나 건너야 한다. 게다가 이 주변은 엄폐물이 하나도 없는 농경지였다. 일본군이 돌격해 오면 그들은 사냥하듯이 평지의 일본군을 저격할 수 있었다.
평택에서 내려온 일본군은 좌우익으로 나뉘어 공격을 개시했다. 마츠사키 대위가 이끄는 우익은 2개의 안성천을 건너 안궁리, 복모리로 진격했다. 일본군은 복모리 부락에 매복하고 있던 청군에게서 공격을 받았다. 지휘관 마츠사키 대위는 용감하게 둑에 올라서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전사했다. 불리한 지형이었지만 지휘관의 용기에 고무돼서인지 일본군 병사들은 물러서지 않고 공격해서 청군을 소탕했다. 전투는 단 30분 만에 끝났다.
19세기 전투에 16세기의 화기전술을 답습한 청군
하천을 확보한 일본군은 구릉의 청군 본대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청군은 강력한 진지를 구축했지만 일본군의 포화가 집중되자 금세 동요했다. 청군의 대응포격은 포병의 실력이 형편없었던 탓에 거의 빗나갔다. 반면 일본군의 포격은 아주 정확했다. 일본군이 훈련도 잘돼 있었지만 청군이 진지에 빽빽하게 꽂아놓은 깃발이 포격 안내판 역할을 했다. 무선통신이 없던 옛날에는 통신수단이 깃발이었다. 동시에 이것은 지휘관의 권위와 위세를 나타내는 상징물이 됐다. 포가 정확해진 현대전에서 깃발은 사용하면 안 되는 것이지만 청군은 현대무기를 들었을 뿐 전술과 마인드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장교들의 책임감도 달랐다. 처음 일본군이 서울을 출발할 때 물자수송을 위해 인부와 우마를 징발해야 했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달아나 버렸고 소와 말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일본군 군수담당 장교가 자살해 버렸다. 자살이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지만 이들의 태도를 보여주는 사례다. 일본군 전사자의 10분의 1은 장교였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장교 사망률이 청군보다 월등히 높았다.
반면 청나라 지휘관은 제일 먼저 도망쳤다. 성환 전투만 해도 청군 사령관은 이미 병력 일부를 데리고 도주해 버렸고 남은 병사들이 전투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러니 사기가 높을 리가 없다.
청군이 혼란한 틈을 타 일본군이 좌우에서 산으로 돌격했다. 청군의 저항은 미미했고 위기가 닥치자 도주해버렸다. 청군은 500명이 사망하고 1000명 정도가 포로가 됐다. 일본군 사상자는 82명이었다.
다음에 벌어지는 평양(平壤) 전투와 중국 랴오닝성(遼東城)의 뤼순(旅順) 전투는 더 크고 위험한 전투였다. 평양은 한국의 모든 성 중에서 최고의 요새였다. 청군은 현대전에 맞게 보완시설을 했다. 뤼순은 점령한 일본군이 감탄했을 정도로 아예 유럽 기술자를 불러선 건축한 최고의 요새였다.
그러나 평양, 뤼순 전투도 성환 전투의 재판이었다. 청군은 이런 요새를 전혀 활용하지 못했다. 원인은 무기와 요새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청나라 팔기군은 세습에 세습을 거듭해 온 특권조직이었다. 세습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엄격한 교육과 내부경쟁, 책임의식이 수반된다면 말이다. 그러나 팔기군은 그런 것이 없었다. 없었을 뿐 아니라 거부했다. 전술과 혁신을 위한 노력도 당연히 없었다. 그들은 16세기에 만든 화기전술을 그대로 답습했다. 16세기의 화포는 부정확해서 80%는 위협용이었다. 그래서 무조건 적의 머리를 넘어 뒤쪽으로 날아가도록 조준해서 발사했다. 20세기 초 만주에서 마적활동을 했던 한 일본인이 중국인은 권총을 고를 때 성능은 무시하고 무조건 총성이 큰 것을 선호한다고 증언한 적이 있는데 이것이 16세기적 총포관이었다.
현대전에서는 적을 최대한 가까이 끌어들이고 정확하고 집중적으로 타격해야 한다. 그러나 청군 포병들은 일본군보다 더 좋은 포를 장비하고도 이런 포격을 전혀 할 줄 몰랐다.
일본군 장교단은 오랫동안 억눌렸던 사무라이의 후손이거나 명치유신 이후 성장한 근대 상공업자 출신이었다. 양자는 겹치는 경우도 많았다. 싸울 일이 없어진 사무라이들이 말단관료나 상공업자로 많이 전직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군대는 귀족층이 장악한 상류 사회로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덕분에 일본군 장교층은 누구보다도 성장욕과 출세욕이 넘치는 집단이자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이는 집단이 됐다.
나중에 일본군이 사무라이 정신과 자결 같은 선동적인 무용담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바람에 오히려 퇴색해 버렸지만 원래 일본 장교층의 장점은 열정과 책임감,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창의력이었다.
병사와 국민들은 동양의 특징인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집단의식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한일 양국 모두 전체주의에 대한 나쁜 기억 덕분에 오히려 반감이 더 많아졌지만 건전하게 활용한다면 조직과 집단에 대한 충성과 헌신은 아주 중요한 미덕이다. 그건 서구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해양도 해전
이 두 장점이 극명하게 드러난 전투가 9월14일 서해에서 벌어진 해양도(위치 미상, 압록강 하구에서 장산곶 사이로 추정) 해전이다. 양쪽의 군함은 유럽에서 수입한 중고 증기선으로 척수는 10척으로 동일했다. 그러나 장갑과 적재한 포의 위력, 크기는 청군이 우세했다. 고속 어뢰정도 6척이 더 있었다. 육군과 달리 청나라 해군은 훈련이 잘돼 있었다. 지휘관 정여창 제독은 청일전쟁에 참여한 중국 지휘관 중 제일 우수하고 뛰어난 인물이었다.
청군은 맞상대를 각오하고 배를 일렬로 정렬했다. 포함은 포가 측면에 배치되기 때문에 적군을 상대로 배의 측면을 노출시켜야 함포를 집중시킬 수 있다. 대신 피탄될 확률도 높아지지만 그래서 전투에는 용기와 자신감이 필요하다. 양군 포수의 실력이 엇비슷하다고 가정할 때 이렇게 서로 맞대결을 벌이면 장갑과 화력이 우세한 쪽이 유리하다.
그런데 이토 제독이 지휘하는 일본군은 전혀 새로운 기동을 선보였다. 3, 4척이 한 팀이 돼 일렬종대로 청나라 함대의 맨 바깥쪽 전함으로 돌진한 것이다. 이렇게 일자로 돌격하면 포격 전면이 좁아져서 적군이 맞추기 힘들어진다. 대신 공격 측도 앞쪽 대포만 사용해야 하므로 화력이 뚝 떨어진다. 그런데 일본 함대는 단순한 종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목표에 접근하면 제비가 수면을 치듯 급선회를 하면서 차례로 적함을 향해 측면함포를 갈기고 치고 빠진다.
청군을 횡대대형으로 묶어 놓기 위해 다른 분대는 양동으로 위장 공격을 감행해서 적을 정신없게 만들었다. 그동안 치고 빠진 분견대는 다시 선회해서 다른 전함을 공격한다. 별 것 아닌 전술 같지만 이런 선회전술은 지휘관의 판단과 병사들의 엄청난 숙련이 필요하다. 파도 위에서 하는 이동, 선회포격은 보기는 화려하지만 적함을 한발도 맞추지 못할 수도 있다. 양동을 위해서는 지휘선의 통제와 각 전함들 간의 팀워크가 중요했는데 무전이 없던 시절이라 이 모든 기동을 수십 개가 줄줄이 달린 깃발 신호로 해야 했다. 유럽 수병들이라면 이 신호를 외우기조차 버거웠을 것이다.
일본군 장교들은 냉철하고 용감했다. 수병들은 격렬한 포격 중에 몸을 노출시키며 이런 신호와 조작을 끝까지 해냈다. 견학 차 일본 함대에 탑승했던 유럽의 장교들은 처음 보는 일본군의 전술 수준을 보고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해전에서 일본군은 단 한 척도 손상을 입지 않은 반면 청군은 4척이 침몰했다.
청일전쟁은 타성과 나태함으로 찌든 공룡기업과 구성원 전체가 열정에 불타는 신흥기업과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극명했다. 아무리 우수한 자본력과 기술을 지니고 있어도 경쟁심과 책임감, 열정이 결여된 조직은 승리할 수 없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yhkmyy@hanmail.net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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