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petitive Strategy in Practice
필자의 지난 글(DBR 105호, 포터 교수도 못 본 글로벌 트렌드: 다중 가치사슬)에서 국제화가 어떻게 기업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성공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을 넓혀주는지를 보여줬다. 이번 글에서는 일본과 중국, 인도의 경제발전 사례를 살펴보고 이 국가들이 어떻게 국제화를 통해 경제성장을 빨리 이뤘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한국 국제화의 현 상태를 점검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일본: 페리 제독의 압력에 의한 문호개방
1853년 7월8일, 당시 에도(江戶)만이라고 불렸던 도쿄만의 우라가(浦賀)항에 짙은 검은색 연기를 내뿜는 4척의 배가 나타났다. 미국의 페리(Mathew Perry) 제독이 이끌고 있던 이런 종류의 배를 한번도 본적이 없는 일본 사람들은 이 배들이 연기를 내뿜는 용이라고 생각했고 많은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나중에 배들이 항구 가까이에 정박을 하자 일본 사람들은 배 위에 있는 대포를 보고 그 숫자와 크기에 또 한번 놀랐다.
현대인의 시선으로 봐서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당시 한국과 중국, 그리고 네덜란드만 알고 있던 일본인에게는 매우 큰 충격이었다. 증기선으로서 목재가 썩지 않게 콜타르로 검게 칠한 쿠로후네(?船)라고 불리는 흑선과 페리 제독 및 선원들을 일본인들은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맞이했다. 여러 자료를 통해 당시 일본인의 이러한 감정을 확인할 수 있다. 아래 <그림 1>의 좌측 초상화가 페리 제독의 원래 모습이다. 그런데 일본인 중 일부는 가운데 그림처럼 착하다 못해 어리숙하게 보이는 이미지로, 또 다른 사람들은 우측의 그림처럼 도깨비에 가까운 모습으로 페리 제독을 형상화하면서 페리 제독과 미국 선원들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국제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일본인들은 갈팡질팡하고 있었던 것이다.
페리 제독은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는 당시 미국 대통령인 필모어(Millard Fillmore)의 친서를 전달하고 미국과 일본 간의 통상을 개시하고 정치적 관계를 수립하는 조약을 맺으려 했으나 미국을 두려워한 일본은 처음에 이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자 페리 제독은 이듬해 2월 연기를 내뿜는 더 큰 배를 이끌고 되돌아왔고 1854년 3월31일 미국과 일본은 소위 가나가와(神奈川) 조약이라고 불리는 미일화친조약(美日和親條約)을 맺어 일본은 할 수 없이 미국에 문호를 열었다.
불평등 조약이었던 미일화친조약은 일본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세력과 서양을 배척해야 한다는 세력이 충돌했다. 이 과정에서 서양군대가 일본의 내전에 참여하게 됐고 대포와 성능이 뛰어난 총과 같은 신무기로 무장한 서양군대에 일본의 구식 군대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당시 세계를 주도했던 서양과 여러 면에서 상당한 격차를 느낀 일본에서는 이후 사회전반적으로 서양 문물과 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가 힘을 얻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메이지(明治) 유신이 일어났고 200년 이상의 쇄국정책에서 벗어나 ‘문명개화’의 시대에 들어서게 됐다.
이후 19세기 말까지 일본 내에서는 철저한 ‘서구화 열풍’이 일어나면서 정치적으로는 영국의 제도를 본뜬 입헌주의 체제를 성립했고 경제적으로는 서구의 자유경쟁 원칙을 따라 자본주의를 받아들였으며 사회·문화적으로는 영국과 독일의 교육제도를 본뜨는 등 서구화를 추진했다. 또한 정부 기관 내에 ‘번역국’을 설치하고 서양근대기술문명의 성과를 모두 번역해 국내에 보급하려 했다. 이와 같이 일본에서는 심지어 “우리에게는 역사가 없다. 우리의 역사는 지금부터 시작한다”고 말할 정도로 철저하게 서양을 모방했다.
이러한 국제화 과정에서 일본은 자신들의 것을 그대로 발전시키기보다는 일본의 ‘모방문화’를 잘 살려 구미 선진국의 여러 조직 및 정책을 벤치마킹하면서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빠른 기간 내에 세계적으로 힘을 겨루는 열강에 동참할 수 있었고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선진국이 될 수 있었다. 4척의 검은 배로 시작된 개항을 통해 일본은 산업전반적으로 큰 성공을 이뤘고 국제화를 기반으로 일본은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도저히 성공할 수 없는데…” 無에서有를 만들 수 있는 이유(DBR 103호)’에서 필자가 강조했던 ‘철저한 벤치마킹’과 ‘적극적인 국제화’를 통해서 일본은 빠른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을 통한 자발적인 국제화
“생산력의 향상 없이는 중국을 부강하게 만들지도, 인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지도 못합니다. 즉, 우리의 혁명은 단지 빈말일 뿐입니다. (…) 1960년대 초 중국은 선진국들에 비해 뒤처져 있었지만 그 차이는 별로 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사이, 약 10년 동안 그 차이는 더욱 커졌습니다. (…) 중국은 건국 이래 상당히 오랫동안 세계로부터 고립돼 있었습니다. (…) 1960년대 다른 나라와 협력할 기회가 많았음에도 중국은 스스로를 고립시켰지요. 결국 우리는 더 나은 국제 요소를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 4대 현대화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중국은 외국에 개방을 해야 하며 올바른 외국의 정책을 반드시 따라야만 합니다.1 중국은 기본적으로 중국인의 노력, 중국의 자원 및 기반을 활용해 4대 현대화를 이뤄야 하지만 외국과의 협력 없이 이러한 목표를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는 1979년 11월 덩샤오핑(鄧小平)이 미국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Encyclopedia Britannica)의 기브니(Frank Gibney)와 캐나다 맥길대(McGill University) 동아시아 연구원의 원장 린(Paul Lin)과 함께 나눈 대화의 일부이다. 여기서 덩샤오핑의 국가발전에 대한 혜안을 엿볼 수 있다. 중국 사인방(四人幇)2 의 “자본주의 제도 아래서 부유하기보다는 사회주의 제도 아래서 가난한 것이 더 낫다”는 국가발전의 목표가 잘못됐음을 그는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그는 국가 발전을 위한 목표와 방법론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최고의 복지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생산성이 최고인 국가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경영전략에 있어서 목표를 정확히 꿰뚫어보는 그의 시각은 당시 경제발전에 의한 빈부의 차이보다는 발전을 뒤로한 부의 평등을 기본으로 여겼던 사회주의 지도자들과 매우 달랐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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