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1940년 북아프리카전쟁에서 이탈리아군은 영국군의 반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당황한 무솔리니는 곧 히틀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사막의 여우’ 롬멜이 아프리카 전선에 투입된다. 그는 아프리카에 오자마자 정찰기를 타고 현지 정찰에 나섰다. 그리고 신사적 방법에 익숙한 영국군이 전혀 예상치 못한 시점에 기습을 감행, 적군의 간담을 서늘케 한다. 적보다 열세인 상황에서 병력을 분할하지 말라는 전술의 기본 원칙도 무시한 채 부대를 세 개로 나눠 진격했다. 그는 전황을 단숨에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시켰고 영국군의 최고 명장으로 꼽히는 오코너를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롬멜의 성공을 이끈 능력은 무엇보다 그의 남다른 상황 판단력이었다. 그는 모든 교리와 전술 원칙은 ‘목적’이 아니라 ‘도구’라는 사실을 숙지하고 있었다.
롬멜(Rommel)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사막의 여우다. 그러나 정작 롬멜은 사막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1940년 3월 아프리카 현지 시찰에 나선 롬멜은 상공에서 모래폭풍을 만났다. 조종사가 회항하려고 하자 롬멜은 목적지로 강행하라고 다그쳤다. 조종사는 사령관의 명령에 아랑곳하지 않고 공항으로 기수를 돌렸다. 나중에 모래폭풍의 실체를 경험한 롬멜은 마음속으로 조종사에게 용서를 빌었다. 아프리카에서 몇 년째 싸워온 이탈리아군 사령관들은 사막을 모르는 롬멜이 겁 없이 덤벼든다고 분노했다. 전사를 보면 현지 지형과 기후를 모르면서 현지인과 경험자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는 오만한 지휘관은 반드시 실패하는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롬멜은 달랐다.
1940년 북아프리카 전선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영국이 고립되자 리비아를 식민지로 장악하고 있던 이탈리아가 영국 식민지였던 이집트에 눈독을 들였다. 1940년 9월 이탈리아군이 이집트로 침공했다. 그러나 롬멜의 분석에 의하면 1차 대전 수준의 장비와 그보다 못한 지휘관, 전투의지가 별로 없는 병사로 구성된 이탈리아군은 영국군의 반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카푸초 전투에서 영국군은 이탈리아군 3만8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영국군 손실은 부상 500명이었다. 계속된 전투에서 영국군은 총 13만 명을 포로로 잡고 리비아 영내로 들어가 트리폴리(Tripoli) 앞까지 진격했다.
당황한 무솔리니는 히틀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러시아 침공을 준비하던 히틀러는 가용병력이 없었다. 이탈리아를 무시할 수도 없어서 영국군을 저지할 정도로 최소한의 병력을 파견하기로 한다. 그래도 병력이 너무 적었다. 나중에 아프리카 군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멸의 명성을 얻게 되는 독일군 파병부대는 겨우 1개 기갑사단에 1개 경장비 사단이었다.(나중에 2개 기갑사단과 1개 경장비 사단으로 증강된다.) 이탈리아군은 있으나 마나 했고 영연방군(영국군은 영국, 호주, 인도군의 혼합부대였다)은 4개 사단이었다. 제해권과 제공권도 영국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대담함과 천재적인 영감을 갖춘 지휘관이 필요했다. 히틀러의 머릿속에 적격인 인물이 떠올랐다. 1차 대전 때 1개 대대로 3일 만에 5개 연대를 궤멸시키고 프랑스 침공에서 1개 사단으로 보름 만에 10만의 포로를 잡은 지휘관, 바로 롬멜이었다.
기동과 공세적 방어
리비아에 도착한 롬멜은 당장 정찰기를 타고 현지 정찰을 시작했다. 최고 사령관이 무장도 안 된 정찰기를 타고 직접 전선을 순회하고 전황을 판단하는 방식은 이후 대담한 지휘관들 사이에 큰 유행이 된다. 한국전쟁 때 8군 사령관이 된 워커(Walker)와 리지웨이(Ridgway)도 항공시찰을 선호했는데 롬멜과 ‘용기 경쟁’이라도 하듯이 각자 무모하고 대담한 일화를 남겼다. 그러나 이때는 미군이 제공권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롬멜은 제공권도 위태로운 상황에서 적진을 날아다녔다.
훌륭한 지휘관이 되기 위한 절대적인 조건이 지형 파악능력이다. 우수한 지휘관들은 예외 없이 이 부분에서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그러나 그런 장군들의 눈으로 보아도 롬멜의 방향감각과 지형을 보는 눈은 신이 내린 수준이었다고 한다.
아프리카에 올 때부터 롬멜은 방어전으로 일관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항공정찰을 시작할 때부터 그는 방어지형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매의 눈처럼 적을 파고들 지점만을 찾았다. 이 점에 대해서 롬멜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지나치게 공격적이라거나 평생 1차 대전 때 경험한 돌격대 전술을 신봉했다고 비난한다. 심한 경우는 그의 전술을 과한 과시욕과 영웅주의, 타인과 독일의 전체 전쟁수행 전략을 고려하지 않는 이기심의 소산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롬멜이 탁월했던 이유는 현대전의 핵심이 기동전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간파했다는 데 있다. 그는 공격 지상론자가 아니다. 현대전에선 요새와 고정된 방어선에 집착하는 방어전은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일찌감치 알아차렸을 뿐이다. 이 진리는 놀랍게도 남북전쟁(1861∼1865)에서부터 노출됐다. 역설적으로 남북전쟁은 근대 콘크리트 건축술의 위력을 제대로 증명한 전쟁이었다. 요새화된 축성진지는 병사들에게는 말 그대로 ‘죽음의 신’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되자 기관총과 고성능 야포까지 장착한 죽음의 신은 10배의 제물을 거두어 갔다. 대부분의 지휘관들은 강철과 콘크리트의 신에게 매료됐고 프랑스군은 맹신도가 돼 마지노선을 건설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돌이켜 보면 남북전쟁이 배출한 최고의 지휘관인 로버트 리(Robert E Lee)와 잭슨(Jackson)은 강철과 콘크리트에 의존하지 않고 기동을 이용한 공세적 방어에 승부를 걸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진정한 천재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축성진지 안에 들어앉아서는 지킬 수도 이길 수도 없다는 사실을 간파했던 것이다.
오랜 역사 동안 수많은 전술가들이 고정거점에 의존하는 방어전에 대한 이상한 기대를 버리지 못해 왔다. 그것은 수많은 경영자들이 모험도 투자도 필요 없는, 현상유지만 해도 되는 안정적인 경영환경에 집착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패망에 도달하기까지의 시간을 연장시킬 뿐이다. 일단 미국 평원과 북아프리카 사막에는 우회로가 얼마든지 있다. 아무리 철통같이 지켜도 병사들은 언젠가는 졸고 철조망에는 녹이 슨다. 최악의 약점은 고정 거점에 의지하는 순간, 우리의 전술과 행동방식도 고정되고 적에게 예측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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