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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전쟁’의 땅에서 체득한 비시장 전략의 지혜

김동우 | 96호 (2012년 1월 Issue 1)


편집자주  DBR은 세계 톱 경영대학원의 생생한 현지 소식을 전하는 ‘MBA 통신’ 코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매사추세츠공대(MIT) 슬론 스쿨, 영국 런던비즈니스스쿨(LBS), 중국 유럽국제공상학원(CEIBS) 등에서 공부하는 젊고 유능한 DBR 통신원들이 따끈따끈한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통신원들은 세계적 석학이나 유명 기업인들의 명강연, 현지 산업계와 학교 소식을 전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바랍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 위치한 IE Business School은 37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영국 경제전문지 <파이낸셜타임스>에서 매년 발표하는 글로벌 MBA 랭킹에서 꾸준히 Top 10을 유지하고 있다. 다른 유럽 MBA 과정과 마찬가지로 IE 역시 13개월 만에 MBA 학위를 받을 수 있다. 매년 세계 80개 국에서 300명 정도의 학생이 입학하며 이 중 한국 학생들은 10명 내외다.


지난 1년간 이곳 IE Business School에서 가장 흥미롭게 들었던 수업은 ‘40인의 40세 이하 경영학 교수(The 40 Best Business Professors under the Age of 40)’에 뽑힌 데이비드 바흐(David Bach) 교수의 ‘Business, Government, and Society’라는 비시장 전략(Nonmarket strategy) 관련 강의다. ‘경영대학원에서 무슨 nonmarket strategy 강의인가’라는 필자의 의구심은 스페인 최대 에너지 회사인 Endesa를 차지하기 위한 스페인의 Gas Natural과 독일의 E.ON, 그리고 이탈리아의 Enel 간 치열한 입찰 경쟁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자연스레 해소됐다.
 
1990년대 후반 EU는 에너지 마켓에 대한 규제를 풀고 민영화를 유도하는 등 에너지 산업 경쟁력 강화를 추진했다. 소비자들에게 자신의 기호에 맞는 에너지 회사를 선택할 수 있게 함으로써 업체 간 경쟁을 통해 양질의 서비스를 보다 낮은 가격에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대표 에너지 기업인 Gas Natural은 2006년 당시 유럽 전체에 불고 있던 에너지 산업 글로벌화 바람 속에서 마드리드를 거점으로 하고 있던 Endesa를 인수하려 했다. Endesa는 스페인 전체 1위 사업자인데다 남미 시장까지 사업이 확장돼 있어 최적의 인수 대상이었다. 그러나 Endesa의 지분 30%를 보유한 최대주주 Caja Madrid의 반대에 부딪히면서 Gas Natural의 M&A 시도는 복잡한 양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반대의 주요 논리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지역감정’이었다. 스페인은 지역 간 지방색이 극명해 지역감정이 거센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마드리드로 대표되는 카스티야 지방과 바르셀로나로 대표되는 카탈루냐 지방 간의 지역감정은 프리메라리가 축구 등을 통해서도 널리 알려진 대로 상당히 뿌리 깊다. 마드리드 소재의 대형 저축은행인 Caja Madrid 입장에서는 카탈루냐 지방의 기업이 마드리드 기업을 인수한다는 것에 상당한 반감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Endesa와 Caja Madrid는 Gas Natural로부터 회사를 보호하기 위해 E.ON이라는 독일의 에너지 회사를 끌어들이게 된다. E.ON이 개입하면서 Endesa의 주가는 하루 만에 9% 이상 급등하기도 했다.
 
독일 회사 E.ON의 Endesa 인수합병 시도에 대해 스페인 총리인 호세 루이스 사파테로는 즉각 우려를 표명했다. 스페인 정부는 새로운 규정(Royal Decree, Funciona 14)을 만들어 외국 회사의 국내 기업 인수합병에 제동을 걸었다. E.ON도 이에 지지 않고 브뤼셀의 유럽위원회(European Commission)에 제소를 해 순식간에 법정 공방으로까지 번지게 됐다.
 
이 와중에 이 사건을 더욱 꼬이게 만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소식이 들려왔다. 스페인의 건설 회사인 Acciona가 Endesa의 주식 10%를 매입했다는 것이었다. 이 뉴스에 Endesa의 주가는 다시 15% 높아졌다. 이에 E.ON은 Endesa 인수합병에 대한 열망을 더욱 적극적으로 나타냈다. 하지만 새로운 규정으로 인해 E.ON이 할 수 있는 건 전혀 없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동안 Acciona는 조용히 Endesa의 지분을 지속적으로 매입해 결과적으로 2007년 1월에 이르러서는 지분율을 21%까지 올려 최대주주에 등극했다는 것이다. 이때 Endesa의 주가는 Gas Natural이 처음 인수 의사를 밝혔던 시점 대비 무려 80%가 오른 38유로에 이르렀다.
 
한편 사파테로 총리는 이후 이탈리아 수상인 로마노 프로디와 이비자 섬에서의 비밀 회동을 통해 이탈리아 최대 에너지 회사인 Enel이 Endesa 주식 9.99%를 매입하는 것을 허락한다. 결과적으로 치열했던 인수전은 Acciona-Enel 연합 컨소시엄이 Endesa를 인수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사례의 내용을 공유한 학생들은 이어진 토론 시간을 통해 여러 가지 소감과 의견들을 내놓았다. 네덜란드 출신의 한 학생은 “대형 글로벌 기업을 많이 보유한 국가는 인지도 상승이나 일자리 창출 면에서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치열한 인수 전쟁이 일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집트 출신의 다른 학생은 “특히 Endesa의 경우 국가 기반 산업인 에너지 사업자이기에 스페인 정부가 외국 기업에 이를 그냥 넘겨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의견을 보탰다. 영국에서 온 또 다른 학생은 “지금까지 시장의 자유화, 글로벌화, 통합에 따라 다국적 기업들의 수나 영향력이 확대된 반면 각 정부의 경제 장악 정도는 약화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사례는 국가가 시장 논리가 아닌 정치의 논리로 적극적으로 개입한 사례여서 매우 흥미롭다”고 의견을 개진했다.
 
모든 영역에서 글로벌화가 한창 진행되는 것처럼 보여도 한 국가의 이권이 직접적으로 걸려 있는 경우 해당 정부는 시장에 즉각 개입한다. 주요 기간 산업에 대한 개방과 자율화 속도가 좀처럼 빨라지지 못하는 이유다. 데이비드 바흐 교수가 수업을 마무리하면서 한 말이 좀처럼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명심하세요. E.ON은 규칙 안에서 게임을 했습니다. 결과는 패했습니다.”
 
 
김동우  IE Business School MBA Class of 2011 tkim.imba2011@student.ie.edu
필자는 서강대 컴퓨터학과를 졸업하고 모토로라 코리아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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