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라 죄송합니다(문송합니다).”
오랜 시간 취업 시장에서 잔인한 자조처럼 회자되던 이 한마디가 무색해졌습니다. AI 시대의 최전선에서 ‘철학의 반전’이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성형 AI ‘클로드’의 행동 원칙을 설계한 앤스로픽의 아만다 애스켈을 비롯해 오픈AI와 구글 딥마인드까지 잇달아 철학과 윤리 연구자를 핵심 인력으로 영입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기술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철학이 아이러니하게도 첨단 AI 기업들이 가장 절실히 찾는 역량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AI의 추론 능력과 윤리적 판단을 고도화하는 과정에서 철학자들의 역할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실제로 뉴욕 연방준비은행 통계에 따르면 미국 대학 졸업자 가운데 철학 전공자의 실업률은 컴퓨터공학 전공자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AI 연구소에서 철학자들이 하는 일은 역설적이게도 기술을 더 똑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AI가 어디까지 답해야 하는지, 어떤 가치와 원칙을 따라야 하는지, 언제 답을 멈춰야 하는지 등 행동의 기준과 방향을 설계하는 일입니다. 성능 경쟁을 넘어 AI가 신뢰받을 수 있는 판단의 원칙을 만드는 것이 이들의 역할입니다.
이러한 접근은 AI에 일관된 원칙을 부여하는, 이른바 ‘AI 헌법주의’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앤스로픽이 올해 초 전면 개정한 ‘클로드 헌법’은 개별 규칙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AI가 따라야 할 가치의 우선순위와 그 근거를 제시합니다. 사용자나 운영자의 요구가 사회 전체의 안전과 충돌할 때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 판단의 기준을 마련한 것입니다. 오픈AI와 구글 역시 각자 중시하는 철학 이론에 기반해 AI의 행동 원칙을 설계하고 있으며 기업마다 강조하는 가치와 접근 방식이 다르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변화는 국내에서도 감지됩니다. 며칠 전 효성그룹이 창사 이래 처음으로 문사철(문학·사학·철학) 등 인문계 전공자만을 대상으로 공개 채용을 실시하기로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지적 갈증은 서점가에서도 확인됩니다. 올 상반기 전자책 플랫폼 ‘밀리의 서재’에서 가장 많은 리뷰를 받은 책은 『우리에게는 매일 철학이 필요하다』였으며 가장 많은 하이라이트가 남겨진 책 역시 『니체의 초월자』였습니다. 정답이 넘쳐나는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중심을 잡기 위해 가장 근본적인 철학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셈입니다.
사람들이 다시 철학을 찾는 이유는 AI가 똑똑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진짜 위기는 ‘인지적 위임’에 익숙해진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는 데 있습니다. 영국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의 말처럼 고뇌를 거치지 않은 매끄러운 답은 생명 없는 ‘죽은 완벽함(Dead Perfection)’에 불과합니다. 사유의 힘은 가장 빠른 답이 아니라 더디더라도 질문을 붙잡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자라납니다.
매년 8월 1호를 여름 특집호로 펴내는 DBR이 올해 특집의 주제로 철학을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지식이 범람하는 기술의 시대일수록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무엇이 본질인지 되묻는 시간이 더욱 절실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취재진이 만난 107세의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기술이 과거의 지식을 정리할 수는 있어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삶의 방향까지 결정해 줄 수는 없다”며 인간 주체성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번 특집호가 독자 여러분께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자신만의 질문을 다시 시작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무더위 속에서도 건강하고 안전한 여름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