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대로 공시’, 이젠 설 땅 없다

24호 (2009년 1월 Issue 1)

최근 상장한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나 최고재무책임자(CFO)에게 기업을 운영하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인지를 물으면 “공시 규정을 준수하는 것”이란 대답을 자주 듣는다. 상장과 관련한 것 가운데 어느 부분이 가장 부담이 되는지에 대한 증권연구원의 설문조사에서도 ‘공시와 관련한 부분’이라는 응답이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상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기업의 경우 기업주가 “여러 규제와 간섭이 존재하는데 왜 우리가 상장했는지 모르겠다”는 푸념을 하기도 한다. 공시에 대한 부담은 최근 상장한 기업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일부 기업의 공시 담당자들은 “공시 규정이 너무 복잡하게 되어 있어 규정을 지키려고 해도 준수가 어렵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이들이 공시에 부담을 느끼는 것은 한편으로 일리가 있다. 실제로 현장에서는 수시 공시가 주요경영사항 수시공시, 공정공시, 자율공시, 조회공시 등으로 구분되어 있어 자사에서 일어난 일이 어떤 공시로 구분되는지에 대해 많은 혼선이 일어난다.
수시공시 항목은 수년간 지속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경영환경이 복잡다단해지면서 기존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사항이 반드시 공시에 포함돼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 변화 때문에 최근에는 금융감독원과 거래소에서 예시적으로 나열되어 있던 강제적인 공시 사항을 많이 정리·통합하고 이를 기업이 자율적인 공시 형태로 공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기존의 회계 기준은 규정 중심(rule based)이었지만 점차 기준이 국제회계기준 차원에서 원칙 중심(principle based)으로 전환하면서 기업의 회계 담당자들이 기준의 해석과 적용에 많은 자율권을 갖게 됐다.
 
공시에 주관성 개입되면 곤란
그런데 이런 해석권은 어디까지나 합리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기업이 받은 자율권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내용상 당연히 공시해야 할 대상이지만 공시 항목에 구체적으로 명기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기업들이 공시를 하지 않는 것도 분명 문제가 있다.
 
공시는 크게 수시공시와 정기공시로 구분할 수 있다. 정기공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재무제표다. 기업들은 재무제표 회계 처리와 관련해 의문이 있을 때는 회계기준원이나 감독기관에 질의한 뒤 회신을 받아 처리한다. 공시에 있어서는 거래소의 공시팀이 주관 부서로서 질의와 회신을 담당한다. 물론 기업을 감사하는 감사인이나 자문 회계법인의 전문가 의견을 받을 수도 있지만 이들의 자문은 그야말로 ‘자문’ 자체로 그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신력 있는 기관으로부터의 회신이 더 비중이 있음은 당연하다.
 
문제는 공시 규정과 관련해 주관적 해석과 판단이 개입될 경우에 생긴다. 일부 기업의 공시 담당자들이 해당 감독기관에 질의하는 것을 주저하고 법무법인의 유권해석에 의존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기업 공시 담당자 입장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특히 해당 공시 항목이 부정적 성격을 띤다면 어느 기업이나 이런 내용을 기꺼이 공시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런 부분에 대해 거래소의 공시 담당자에게 자문을 구하면 “일단 공시를 수행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답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정보가 해석되고 이해되는지는 정보 이용자의 몫이며, 기업 공시 담당자의 역할은 의사결정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시를 꺼리거나 공시 내용에 자의성을 개입시키려는 기업의 행태는 공시의 취지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공시의 목적은 기업의 내부정보를 공유하려는 것이지 기업이 선택하는 정보만을 공유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기업 속성상 좋은 내용의 정보는 좀 더 적극적으로 공시하고, 부정적 성격의 정보는 소극적으로 공시하려는 경향이 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상장기업은 규정에서 정한 정보를 모든 투자자와 공유하겠다는 약속을 준수해야 한다.
 
게다가 법무법인의 공시 규정에 대한 의견이 법률 전문가들의 전문가적 판단에 근거하긴 하지만, 그들이 자문료를 수임하는 한 편향된 해석과 판단이 개입할 위험이 있다.(필자가 철저하게 직업 윤리의식에 충실해 업무를 수행하는 법률 전문가들의 윤리성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부정적 사항 공시로 ‘투명 경영’ 평가 받을 수 있어
공시에 대해서 소극적인 기업은 공시와 관련된 정책을 좀 더 긍정적, 적극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기업이 부정적 정보를 숨기려 한다면 소문이나 풍문에 의해 부정적 정보가 증폭될 소지가 있다. 부정적 정보의 공시도 기업이 긍정적으로 수용한다면 오히려 경영이 투명한 기업으로, 시장에서 장기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우리에게는 ‘조급병’이 큰 문제다. 모든 것이 단기성과를 위주로 움직이므로 장기성과가 희생되는 경우가 생긴다. 스톡옵션이 좋은 제도임에도 이를 부여받은 임원들이 단기성과에 집착하게 되고, 금융기관의 집행 임원들도 임기가 1년이므로 단기적으로 급격한 성과를 올리려 하기 때문에 무리한 정책이 수행되기도 한다. 우리 경제에 큰 상처를 준 신용카드 사태를 보아도 수년 뒤에 지급 불능 사태가 온다 해도 당장은 카드 발급 건수로 경쟁하려는 체제 아래에서는 누구라도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최근 은행 집행임원 임기를 3년으로 연장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공시도 동일하다. 당장에 단기성과를 위해 확신도 없는 사실을 공시하고, 한 술 더 떠 경제 환경이 변화됐다고 공시를 변경하거나 번복하면 증시 안정성이 심각하게 훼손된다.
 
불성실 공시, 내부자 거래 등 모든 문제는 주식 투자자들로 하여금 주식시장을 외면하게 한다. 공시가 성실하게 수행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공시되어야 할 사항이 내부자에 의해 악용될 소지가 있음을 의미한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기업의 공시 담당자들은 공시의 건전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정기공시와 수시공시 간에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주주를 대신해 기업을 대리 운영하는 임원들이 주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들의 이해를 위해서만 공시하고 의사결정을 한다면 주식시장은 투자자로부터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DBR TIP] 공시 관련 규제 강화가 능사 아니다
 
최근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기업이 경제 환경의 변화 때문에 공시를 변경하거나 번복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고의성이 개입된 과장된 공시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조치해야 하지만 경제 환경의 변화 때문에 공시가 잘못되었는지, 고의성 때문인지를 구분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관련 규정인 유가증권시장공시규정 제32조(불성실 공시의 적용 예외)는 이와 관련해 ‘천재, 지변, 전시, 사변, 경제 사정의 급격한 변동 및 이 밖에 이에 준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경우’라고 기술하고 있다. 작금의 사태를 경제 사정의 급격한 변동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인지는 자율규제 기관으로서의 증권선물거래소가 고민할 사항이다.

다만 거래소는 과도한 규제가 없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국가를 떠난 거래소 간 경쟁 체제가 도입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회계제도와 관련된 사베인스옥슬리 법이 통과된 이후 미국시장에 상장하려던 많은 기업이 규제가 너무 강한 미국 시장을 떠나 영국 런던 증시에 상장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현재 많은 국내 기업이 외국 증시에 상장하고 있으며, 아직 초보 단계이기는 하지만 중국의 3개 기업도 우리나라 증시에 상장하고 있다.

따라서 규제는 너무 강한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적정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단 일부 경제 주체가 시장을 왜곡하지 않도록 철저하고 투명하게 시장이 운영되어야 한다.
 
편집자주 필자는 이 원고가 증권선물거래소의 공시 관련 공식 입장과는 무관하게 기고자의 개인적 생각을 정리한 것이라고 알려 왔습니다.
 
필자는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에서 경영학 석사, 노스웨스턴대에서 회계학 박사 학위를 각각 받았다. 뉴욕시립대 조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롯데쇼핑 사외이사 및 감사위원과 STX엔진 사외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회계기준원의 회계기준자문위원과 한국 CFO협회 운영위원도 맡고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283호 Future Food Business 2019년 10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