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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조총 논란과 고립주의

임용한 | 12호 (2008년 7월 Issue 1)
임진왜란(15921598)은 한 쪽의 항복 없이 일종의 정전협정을 맺고 종료됐다. 형식적으로는 승자도 패자도 없는 셈이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이 우리가 이긴 전쟁이냐 진 전쟁이냐는 논란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런 논란이 일 때마다 씁쓸하기 짝이 없다. 전쟁은 스포츠가 아니다. 승패가 무의미한 경우도 있다. 정확히 말해서 임진왜란은 일본 측 입장에서는 실패한 전쟁이고, 우리에게는 커다란 충격과 피해를 남긴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큰 피해를 보는 부분 중 하나는 바로 민족적 자존심이다. 특히 전쟁 초기 지상전의 양상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왜군은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해서 20일 만인 5월 2일 수도 한양에 입성했다. 당시 서울부산이 열흘 일정의 거리였던 점을 감안하면 전투를 벌이고, 수색과 정찰을 하면서 부대를 끌고 행군해야 하는 군대의 진격속도로는 경이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무참한 패배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서 고심했다. 당쟁, 위정자들의 국방에 대한 소홀, 군사제도의 해이와 군 동원체제(제승방략)의 오류, 조선군의 실전경험 부족 등 여러 이유가 제시됐다. 이 가운데 유력하게 제기된 요인 하나가 일본군의 신무기 조총(鳥銃) 때문이라는 설이다.
 
이 설은 근대 무기인 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활과 창으로 맞서니 상대가 될 수 있었겠느냐는 논리를 갖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이론이 나왔다. 국내 사학계에 ‘임진왜란 승전론’이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조총 역할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등장한 것이다. 필자가 기억하는 최초의 그리고 가장 어처구니없는 반론은 1970년대에 제기됐다. 일본군은 조총을 과신해서 무기가 조총 하나로 단순했지만, 우리는 무기가 다양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었다. 그리고 다양성의 사례로 다음과 같은 무기들을 열거했다. 창, 칼, 활, 몽둥이, 곡괭이, 돌멩이….
 
조총 회의론 제기
1980년대가 되자 좀 더 논리적인 반론이 나왔다. 조총의 발사 속도는 1분에 3발 정도다. 비가 오면 전혀 사격을 할 수 없고, 총신이 쉽게 가열돼 몇 발 사격한 뒤에는 쉬어야 한다. 무리해서 쏘면 고장도 고장이지만 성능이 뚝 떨어진다. 유효사거리도 겨우 2550m에 불과하다. 반면에 조선의 각궁은 10초에 한 발은 쏠 수 있으며 표준사거리가 140m, 원거리는 250m까지 미치기도 했다. 관통력도 조총보다 훨씬 강하다. 처음 전투에서 조선군이 보여 준 조총에 대한 두려움은 굉음과 불꽃, 연기가 주는 심리적 효과에 불과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조총은 전형적인 화승총이다. 요즘 총은 방아쇠를 당기면 공이치기가 총알의 후미를 때려 총알에 들어있는 화약을 폭발시켜 발사한다. 그러나 화승총은 화약과 총알을 따로따로 넣고, 공이치기에 긴 노끈을 끼워 놓은 것이다. 이 노끈 끝에 불을 붙이면 꼭 담뱃불 형태가 되는데, 방아쇠를 당기면 공이치기가 아래로 내려가 노끈의 불로 약실을 가열시켜 화약을 폭발시킨다.
 
일본에 조총이 도입된 시기는 전국시대의 항쟁이 정점이던 1543년이었다. 당시 일본 가고시마 앞바다에 위치한 섬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표류하던 포르투갈 배가 도착했다. 다네가시마의 영주는 이때 그들이 들고 있는 조총을 보고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몇 십억 원 되는 거금을 주고 사들였다. 그리고 1년 만에 다네가시마의 대장장이가 조총의 복제품을 생산하는데 성공한다. 이 일을 기념해서 현재 일본의 우주선 발사기지가 바로 이 다네가시마에 설치돼 있다.
 
이때부터 일본은 조총 자체 제작에 돌입한다. 당시 일본의 조총은 서구에서 사용하던 원형보다 성능이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도 임진왜란 발발 다음 해인 1593년에 노획한 조총을 이용, 자체 제작에 성공했기 때문에 일본의 기술 수준을 너무 부러워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조총의 역할은 과장된 것일까? 임진왜란의 패배가 전적으로 조총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나 조총의 위력은 결코 무시할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당시 총은 총구에 강선도 없고, 총알과 총구의 유격이 크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명중률이 형편없었다. 그러나 지금도 막상 실사를 해 보면 훈련된 병사들이 근거리 사격에서 의외로 놀라운 명중률을 기록한다. 위력이 약하다고는 하지만 당시의 낮은 의학 수준도 고려해야 한다. 화살은 화살촉이 박힌 위치를 정확히 알려 주지만, 살 속으로 파고든 탄환은 위치를 파악하기 어렵다. 위력이 같다고 가정해도 부상병이 사망하거나 불구가 될 확률은 총이 훨씬 높았다. 활의 위력은 개인차가 심하게 난다는 약점도 있다. 특별한 궁사가 아닌 일반 병사들이라면 근거리에서의 위력과 정확도, 살상력 등 모든 측면에서 조총이 훨씬 우월했다.
 
시간 흐를수록 조총역할 폄하
또 일본군이 조총으로만 무장하지도 않았지만, 조총도 한 종류가 아니었다. 조총 중 가장 큰 총은 사거리가 800m 가량 됐다. 이 총은 길고 무거워서 받침대를 사용해야 했으므로 성벽에 고정시켜 놓고, 수비용으로 사격하거나 저격용으로 사용했다. 왜군은 수성전에서 이 총으로 큰 효과를 봤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장수들은 저격병에게 많이 당했는데, 그것도 이 총에 의한 피해일 가능성이 높다.

조총의 위력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는 임진왜란 당시 국정 운영자들의 인식과 대응에서 찾을 수 있다. ‘조총에 의한 패배론’은 당시의 실록 기록에도 발견된다. 심지어 일본군이 믿는 것은 오직 조총이기 때문에 조총부대만 제압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기록도 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반증은 임진왜란 후 주력부대인 훈련도감이 총을 기본 화기로 하는 포수를 기간병으로 채용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초기에 패배를 조총 탓으로 돌리다가 시간이 흐르면 조총을 폄하하고 전통 무기인 활이 더 훌륭하다고 하는 인식은 조선시대에도 나타난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평화가 정착하자 다시 활이 조총보다 낫다는 인식이 나온 것이다. 심지어는 병자호란 이전에 청과의 갈등이 심해지자 임진왜란 이전의 전통무기와 전통전술을 복구하자는 주장까지 등장했다. 바로 여기에 임진왜란 초기의 패전 원인에 대한 단서가 있다. 사회 발전과 과학 기술 진보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결여다.
 
1617세기는 인류역사가 진보와 발전이라는 페달을 밟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때부터 지구는 ‘더 빠른 속도’로 돌기 시작해서 기술 발전이 가속화했고, 세계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은 바로 조총을 수용하고, 소총을 주력 화기로 하는 군제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총부대를 만드는 사람이나 다시 활과 15세기형 전술로 싸우자는 사람이나 이 사건의 진정한 원인, 즉 지구의 회전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총을 사용하자는 사람들도 “왜 우리가 활을 들고 있는 동안 저들의 활이 총으로 변했는가”라는 의문을 던지지 않았다. 17세기에 드디어 조선에도 네덜란드인 표류자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100년 전 일본에 온 포르투갈인보다 한 단계 진보한 머스킷 소총을 소유하고 있었다. 조선은 그 총이 기존 조총보다 발전한 무기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여전히 ‘기술 진보’의 개념은 깨닫지 못했다. 오히려 외래무기로 인해 존재가치가 위협을 받게 된 전통 무기에 대한 오롯한 애착만 높아졌다.
 
19세기 말까지도 조선군은 굳건하게 조총을 들고 나라를 지켰다. 그 사이에 일본군은 M1 소총보다 조금 못한 연발소총인 무라다 소총을 들고 다시 이 땅을 찾아왔다. 활과 조총은 어느 것이 더 위력적이냐는 논쟁이라도 가능하지만, 조총과 무라다 간에는 이런 논쟁 자체가 불가능하다.
 
자기 만족적 고립주의 벗어나야
이 모든 사건의 진정한 원인은 자기만족적 고립주의이다. 어떤 사회, 어떤 집단이든 자기만족에 빠지면 변화와 발전의 가치를 경시하게 된다. 그리고 조총과 임진왜란에 대한 논쟁에서 볼 수 있듯이 이 고질병은 어려울 때 잠시 잦아들다가 조금만 안정되면 다시 고개를 든다.
 
과거 경제성장기에 한국의 기업인들은 사소한 기술 하나를 배우기 위해 미국, 일본에 가서 별별 짓을 다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일부 진보주의자들은 이 행동을 비굴하다고 경시하고 반민족적, 식민지적 등등의 용어를 붙여 비난한다. 후진국과의 교류는 개방이라 하고, 선진국과의 교류는 종속이라고 한다. 감정적 애국주의와 국수주의가 결코 진보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모욕과 비굴함을 감수했던 기업인들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역시 이전 조총 사용론자들과 마찬가지 한계를 갖고 있었다. 1997년 외환 위기가 발생하기 전 한국 기업이나 조직의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인 운영방식을 지적하면 늘 “한국적 또는 우리식 가치와 특수성을 감안해야 한다”고 변명했다. 그들은 과거 조총 사용론자와 마찬가지로, 조총 기술 자체만 얻고자 했지 배후에 숨어있던, 조총을 만들어 낸 사회와 운영 원리는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시리즈로 연재합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경기도 문화재 전문위원도 맡고 있다.
  • 임용한 임용한 |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yhkmy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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