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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ive Minds

파리의 인상파도… 친구 고갱도… 천재 반 고흐를 완성시킨 ‘경쟁자’였다

이병주 | 159호 (2014년 8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전략,혁신

빈센트 반 고흐는 단지 엄청난 노력이나 대단한 천재성만으로 위대한 반열에 오른 게 아니다. 그는 자신의 화풍이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는 걸 깨달은 뒤 곧장 파리로 달려가 인상파 기법을 배우고 그것을 넘어서며 그들과 경쟁했다. 말년에는 고갱과 경쟁하고 협력하며 자신의 업적을 완성했다. 경쟁을 통해 스스로를 발전시킨 모범 사례인 셈이다.

경쟁은 빠른 발전과 개선을 가능케 하고, 여러 호르몬을 배출해 몸에 쾌락을 주고, 두뇌를 활성화시키며 혁신을 이끈다. 물론 경쟁자 수가 지나치게 많거나 경쟁의 강도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부작용도 생긴다. 자칫 제로섬 게임으로 치닫거나 파괴적 경쟁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기 쉬운 현대의 기업들은 고흐와 고갱의 건설적 경쟁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편집자주

창조와 혁신이 화두인 시대입니다. 예술가, 문학가, 학자, 엔지니어, 운동선수 등 창작가들의 노하우는 기업 경영자에게 보석 같은 지혜를 제공합니다. 이병주 생생경영연구소장이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본 창조의 노하우를 소개합니다.

 

1888 12월 말 프랑스 남부에 있는 작은 마을인 아를의 지역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1223일 일요일 밤 1130분경, 네덜란드 출신의 빈센트 반 고흐라는 화가가 윤락가 1번지에 나타나 라셸이라는 여인을 찾아서 그녀의 손에 다음과 같은 쪽지와 함께 그의 귀를 쥐어주었다. ‘이 물건을 소중이 간직하시오.’ 그러고는 사라졌다. ‘불행한 광인의 소행일 수밖에 없는 이 해프닝을 접한 경찰은 이튿날 아침 침대에서 간신히 목숨이 붙어 있던 그를 찾아냈다.”

 

이 사건은 미술사에서 아주 유명하다. 반 고흐가 아를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던 고갱과 다투다가 일어난 일이다. 그날 반 고흐는 자신이 마련한 집에 고갱이 온 지 두 달 된 기념으로 오랜만에 저녁식사를 같이하자고 청했다. 술이 한두 잔 들어가다 보니 의견 차이가 생겼고 그간 쌓였던 감정이 폭발해 커다란 싸움으로 변했다. 사실 고갱은 반 고흐만큼 공동 작업에 열의가 없었다. 순전히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미술상인 반 고흐의 동생 테오로부터 고정 수입을 약속 받고 아를에 왔던 것이다. 이성적인 고갱은 감정 기복이 심한 반 고흐와 성격적으로 맞지 않아 힘들었다. 결국 고갱이 떠나겠다고 하자 고갱과 함께 작업하는 것을 더 원했던 반 고흐는 폭발했다. 뛰쳐나가는 고갱을 따라가 자해하겠다고 위협했으나 고갱은 아랑곳하지 않고 반 고흐를 뿌리치고 집을 나갔다. 그 즉시 반 고흐는 집에 들어와 면도칼로 자신의 왼쪽 귀를 자르고 고갱을 찾아 나섰다. 아마도 고갱이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어야 했는데 그걸 하지 못한 귀를 탓한 것 같다.

 

반 고흐에게 고갱은 이 정도로 중요한 사람이었다. 반 고흐는 고갱을 초대해서 두 달 동안 지내면서 커다란 영감을 받았고 자신의 그림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사실 반 고흐에게 동료는 외로움을 잊거나 교우를 나누는 것 이상의 역할을 했다. 반 고흐는 친구들과 교류하고 경쟁하며 자신의 화풍을 발전시켰다.

 

고흐에게동료가 갖는 의미

1853년 네덜란드의 시골 마을 준데르트에서 태어난 반 고흐는 목사 아버지 아래 화목하고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20대 후반까지 그림을 그리지 않고 진로에 대해 고민하며 다양한 일을 경험했다. 대가족이었는데 삼촌 세 명이 모두 미술상이었다. 16세 때 반 고흐는 한 삼촌의 도움으로 미술품중개회사에서 견습사원으로 일하게 됐다. 헤이그와 런던에서 일하며 20세까지 능력을 발휘해 유망한 미술상으로 커나갔다. 하지만 우울증과 고독감으로 종교에 빠지면서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해 직장생활을 그만뒀다. 여러 곳에서 선교활동도 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전도사도 해봤지만 마음의 갈증은 풀리지 않았다. 그러자 미술상을 하고 있던 동생 테오의 권고에 따라 화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27세의 나이에 그림을 처음 시작한 반 고흐는 들어가는 미술학교마다 적성에 맞지 않아 금방 그만두고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다.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농부들의 삶을 스케치하며 그림 실력을 키워나갔다. 네덜란드에서 그림을 배우던 시절 네덜란드의 화가들과 교류하며 주로 농촌의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다. 이 무렵 반 고흐의 우상은 농부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던 밀레였다. 1885년 고흐가 그린 초기 대표작감자 먹는 사람들은 그림을 배운 지 4년밖에 안 된 화가가 그렸다고 하기에는 완성도가 매우 높은 작품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1885)

 

1886년 반 고흐는 동생의 권유로 파리로 옮겨 활동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인상주의 화풍을 배우며 후기 인상파 화가들인 베르나르, 로트레크, 쇠라, 시냐크 등과 교류한다. 이때부터 어두웠던 그림이 밝은 색으로 바뀐다. 인상파 동료들의 색감이나 기법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의식이 강했던 반 고흐는 이들의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 하는 건 뭔가 찜찜하다고 생각했다. 이러던 차에 고갱의 그림을 접하게 된다. 반 고흐는 고갱의 그림에서 인상파에게서 부족한 요소를 발견했다. 이때부터 고갱과 의식적으로 친하게 지내며 그와 교류하기 시작했다.

 

1888년 반 고흐는 인상파의 중심지인 파리를 떠나 남쪽의 아를로 갔다. 이곳에서 그는 마음에 맞는 동료들과 화가들의 공동체를 꾸리려고 했다. 우선 동생 테오에게 부탁해서 고갱을 아를로 오게 만들었다. 고갱은 반 고흐가 마련한 집에서 기거하며 일체의 비용으로 한 달에 한 점의 그림을 테오에게 보내는 조건이었다. 두 사람은 아를에서 똑같은 대상을 그리며 서로의 화풍을 발전시켰다. 반 고흐는 고갱에게 자극받으며 영감을 얻었다. 고갱은 그에게 꼭 필요한 스승이자 동료이며 경쟁자였다. 고갱과 헤어진 후 독특한 화풍을 완성한 반 고흐는 생 레미에 있는 정신병원과 파리 근교의 오베르쉬즈우아즈에서 매우 많은 그림을 그렸다. 점점 심해지는 정신병 발작으로 고통받다가 결국 1890 37세의 나이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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