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생도라지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이영호(KAIST 경영과학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심심산천에 백도라지/한두 뿌리만 캐어도/대바구니 철철철 다 넘는다….”
조선시대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는 민요인 ‘도라지 타령’에는 흥미로운 구절이 나온다. 한두 뿌리만으로 대바구니에 차고 넘칠 정도의 도라지라니 대체 얼마나 크다는 걸까? 우리가 나물 반찬으로 즐겨 먹는 도라지 크기로는 대바구니는커녕 바가지를 채우기도 힘들다.
도라지는 보통 2년에서 길어야 3년 정도밖에 살지 못한다. 그 이상이 지나면 저절로 뿌리가 썩어 죽어버린다. 그 때문에 일반 도라지가 크는 데는 일정 한계가 있다. 당연히 ‘도라지 타령’에 등장할 정도의 크기가 되기에는 어림도 없는 수준이다. 대바구니에 담아 철철 넘쳐 날 정도의 크기라면 수십 년은 족히 된 오래 묵은 도라지여야 한다.
도라지의 평균 수명을 생각할 때 이런 도라지가 존재하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그런데 이 도라지의 수명을 무려 20년 이상 연장시키는 재배법을 찾아내 특허까지 받아 사업화한 기업이 있다. 바로 ㈜장생도라지다.
회사명이자 등록상표이기도 한 장생도라지는 21년이라는 긴(長) 시간 동안 생장한(生) 도라지를 가리킨다. ㈜장생도라지는 기존에 흔한 나물로만 인식돼 온 도라지를 각종 약리 효능이 입증된 고급 건강식품으로 포지셔닝해 연평균 약 80억 원(2007∼2011년)의 매출액을 올리는 벤처기업으로 성장했다. DBR이 농산물의 고부가가치화를 실현한 ㈜장생도라지의 성공 요인을 분석했다.
집념과 우연이 알려 준 자연의 섭리
장생도라지는 다년생 도라지 재배법 및 약리 효능 파악에 한평생을 바친 이성호 옹(翁)의 집념으로 개발됐다. 이영춘 현 ㈜장생도라지 대표의 부친이기도 한 이성호 옹은 어릴 적 기관지 천식과 폐결핵을 앓던 동네 어른이 산에서 큰 도라지를 캐 먹고 병이 나은 걸 직접 목격한 후 연근(年根)이 오래 된 도라지 재배에 인생을 바쳤다. ‘오래 묵은 도라지는 산삼보다 낫다’는 옛말과 자신의 개인적 경험, 그리고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의로운 일 한 가지는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바탕으로 내린 결단이었다.
도라지를 오랜 기간 재배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심은 지 2∼3년 정도 지나면 저절로 뿌리가 썩어 없어지는 작물 자체의 특성 탓이었다. 갖은 농법과 비료를 써가며 수천 평의 밭에 각기 다른 방법, 다른 비료를 줘가며 애를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렇다 할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도라지를 심고 썩히는 일을 수년간 계속하다 보니 가세는 기울 대로 기울었다. 도라지 재배를 위해 여기저기서 얻어 쓴 빚도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급기야 빚쟁이들 등살에 더 이상 동네에서 도라지를 키우기가 힘들어졌다. 결국 이성호 옹은 가족들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야반도주를 했다. 도라지씨앗과 솥 단지 하나, 소금 한 자루만 달랑 들고 지리산 깊은 골짜기로 들어간 그는 움막을 짓고 가재와 개구리, 솔잎과 칡뿌리로 연명하며 도라지 재배를 이어갔다.
그렇게 지리산에서 도라지 재배에 미쳐 있은 지 5년째 되던 1970년의 어느 날, 그 어떤 식물도 자랄 수 없을 것 같은 시뻘건 황토에서 다른 도라지보다 훨씬 생기 있게 돋아난 도라지 순을 발견했다. 뿌리가 썩어가는 도라지를 그냥 버리기가 아까워 움막 옆 황토에 꽂아 넣듯이 심어 둔 썩은 도라지 뿌리에서 난 새순이었다. 척박한 황토에 심어 놨던 이 도라지의 뿌리를 살펴보니 마치 썩은 상처를 밀어내고 새살을 돋아내듯이 뿌리가 새로 생겨나고 있었다. 온갖 비료를 부어대며 정성을 다해 좋은 토양에서 기른 도라지는 뿌리가 썩어 다 죽어가는데도 척박한 황토에서는 오히려 시들시들하던 도라지까지 원기를 회복해가며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었던 것.
이성호 옹은 이를 보고 도라지는 거름기를 먹고 사는 식물이 아니라 땅의 기운을 흡수해 그 영양분을 뿌리에 저장하는 식물이라는 통찰을 얻게 됐다. 따라서 뿌리가 썩지 않도록 하려면 거름기 없는 척박한 땅에 심되 비료와 거름을 일절 줘서는 안 된다는 자연의 섭리를 깨닫게 됐다. 도라지에 매달려 산 지 15년 만에 다년생 도라지 재배법의 비밀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던 오래 묵은 도라지의 효능 입증
도라지는 땅속의 기(氣)와 영양분을 흡수해 자란다는 ‘생장의 비밀’을 알아낸 이성호 옹은 자신의 통찰을 바탕으로 실험 재배에 나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무리 척박한 땅에 심어 도라지를 튼튼하게 재배할 수 있다 하더라도 3년 정도 지나면 다시 거름기 없는 땅으로 옮겨 심어줘야 한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됐다. 주기적으로 척박한 황토에 옮겨심기를 해 줘야 원래 있던 뿌리 곁에 새 뿌리가 나오면서 도라지의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닐곱 번 정도 옮겨심기를 거쳐 21년 이상 장생에 성공한 도라지는 뿌리 몸통이 어린이 팔뚝만해지고 길이도 20㎝가 넘는 여러 개의 뿌리로 갈라진다.
1988년에 이르러 이성호 옹은 최고 22년 근을 포함해 10년 이상 된 도라지를 다량 보유하게 됐다. 다년생 도라지 재배의 비밀을 밝혀낸 후로도 근 20년을 도라지 재배에 투자한 것. 10년 넘은 약도라지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전국 각처에서 도라지를 사겠다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이성호 옹을 찾아왔다. 하지만 그는 섣불리 도라지를 팔지 않았다. 오래된 도라지가 왜 효과가 있고 어디에 도움이 되는지를 밝히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명확한 근거 없이 함부로 돈을 받고 도라지를 파는 건 옳지 않다고 판단한 이성호 옹은 도라지의 효능을 밝히기 위해 독학으로 한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연근(年根)별로 술에 담아놓은 도라지들을 관찰하다 한 가지 신기한 점을 발견했다.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담은 놓은 도라지 술이었는데 1년 된 도라지 술부터 20년 묵은 도라지 술은 모두 같은 색인 반면 유독 21년 근 도라지가 담긴 술만 훨씬 짙은 빛을 띠고 있었다.
이성호 옹은 이에 따라 1989년 21년 근 도라지를 들고 경상대 식품공학과에 성분 분석을 의뢰했다. 그 결과 3년 근 일반 도라지와는 확연히 다른 성분을 찾게 됐다. 심어진 지 20년을 경계로 도라지의 일부 성분이 획기적 변화를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분석 결과 도라지가 오래 생장할수록 이눌린의 과당 중합도가 낮아 혈당강화, 면역증가, 항암효과 등 약리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사업화와 함께 닥쳐온 위기
평생을 바쳐 재배한 다년생 도라지의 효능이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자 이성호 옹은 드디어 본격적인 사업화에 나섰다. 우선 1990년 27개 주요 일간지에 ‘21년생 도라지의 약리성분 분석결과’를 발표했다. 오래 된 도라지의 효능을 입소문으로 전해 들은 사람들이 일부 있긴 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여전히 도라지를 흔히 먹는 밥 반찬 정도로 생각했다. 따라서 이성호 옹은 사람들의 이 같은 인식을 바꾸기 위해선 ‘오래 묵은 도라지는 산삼보다 낫다’는 옛말이 전혀 근거 없는 소리가 아니며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라는 점을 홍보하는 게 가장 먼저라고 판단했다.
이듬해인 1991년엔 ‘다년생 도라지 재배방법’으로 특허를 획득했다. 산야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농작물, 그것도 서민들 밥상에 오르는 나물 재배법이 어떻게 특허가 될 수 있느냐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통상 3년이면 죽는 도라지의 수명을 인위적으로 늘리기 위해 노력한 이성호 옹의 집념과 열정, 평범한 도라지에서는 볼 수 없는 약리 특성 등이 인정돼 전통 작물의 재배법으로는 유례없던 특허를 얻게 됐다.
이어 이성호 옹은 1993년 진주전문대(현 한국국제대), 경상대, 조선대 등과 함께 산학협력을 맺고 다년생도라지의 성분 분석 및 효능 입증 관련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장생도라지에서 산삼이나 인삼에 많다는 사포닌 성분을 30종 이상 추가적으로 찾아냈다.
지적재산권(특허) 및 과학적 연구 결과(산학협력 연구)를 바탕으로 이성호 옹은 1995년 성호 다년생도라지 영농조합을 세우고 1996년 진주시 금산면에 가공공장을 설립했다. 그러나 곧바로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제대로 사업 한번 시작해 보지 못한 채 위기를 맞았다. 투자를 위해 은행 대출(17억 원)은 물론 악성 사채(11억 원)까지 끌어다 쓰다 보니 사업 첫해부터 부도 위기에 내몰렸다. 1997년 당시 자본금이 3억5000만 원이었던 조합의 총 부채는 28억 원에 달했고 월 금융비용만 7000만∼8000만 원이 들어갔다.
이성호 옹은 결국 자식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가족회의 끝에 장남인 이영춘 현 장생도라지 대표가 구원투수로 나섰다. 당시 삼성항공(현 삼성테크윈) 인사과장으로 재직 중이던 이영춘 대표는 안정적인 직장을 포기하고 가업을 택했다. 그의 결정을 두고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 모두가 만류했다. 이영춘 대표 스스로도 “당시 조합의 회생 가능성은 5%도 안 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고 털어놓을 정도다. 그는 그러나 “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일궈 온 사업을 자식 된 도리로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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