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회원가입|고객센터
Top
검색버튼 메뉴버튼

두리영농조합

“아픈 아들에게 먹일 채소를 가꾸고 싶었죠” 진정성, 친환경 농업의 전략이 되다

김선우 | 113호 (2012년 9월 Issue 2)

 

편집자주 ※이 기사의 작성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성진원(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햇빛이 너무 세 비닐하우스에 들어가지 못하는 한여름 낮에도 김상식 대표(48)는 가만히 앉아 쉴 틈이 없다. 두리영농조합에는 전국에서 유기농법을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방학 때는 농업고등학교 학생들이 9일간 머물다 가는 멘토링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2008년에 세운 한옥 교육장과 식당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그전에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사람들을 세워놓고 가르쳤다. 교육을 하면서 비닐하우스 30동에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하고 있는 각종 채소도 돌봐야 한다. 경작지 1만여 평에서 하루 생산되는 채소만 2.5∼3톤에 이른다. 친환경적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다른 농업인들에게 관련 농법을 가르치는 것은 김 대표의 오랜 숙원이었다. 그래서 그는 요즘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지만 무척 보람 있고 재미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과거 김 대표의 삶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밑바닥 인생도 경험해봤고 의욕을 잃고 방황한 적도 있었다. 김 대표가 이를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원동력은 힘들고 아픈 경험에서 교훈을 찾고 이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알로에와 백화점

김 대표는 고등학교 졸업 직후인 1982년 농사일을 시작했다. 원래부터 농사가 체질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벼농사부터 시작해서 토마토와 당시에는 생소했던 알로에 농사도 지어봤고 멧돼지와 소도 키워봤다. 흔히 말하는복합영농이었다.

 

여러 작물 중 김 대표가 주목한 것은 알로에였다. 생소한 작물이었지만 소비자들이 몸에 좋은 건강식품을 선호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판매였다. 당시 대부분의 농민들은 작물을 재배해 공판장으로 출하했다. 따라서 농사를 지으면서 판매와 유통을 걱정하는 농민은 드물었다. 하지만 알로에는 공판장 출하가 어려웠다. 알로에를 유통하는 여러 업체의 문을 두드렸지만알로에가 뭐냐는 냉담한 반응만 들어야 했다. 애써 수확한 알로에를 폐기 처분할 생각까지 했다. 김 대표는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백화점 문을 두드렸다. 전남 광주 가든백화점 등 백화점 채소 담당자들을 끈질기게 설득했고 일단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브랜드가 없기 때문에 매장에 알로에를 전시하는 것만으로는 판매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알로에 먹는 법과 마사지법을 숙지했고 직접 백화점 판매대에서 알로에를 잘라 고객에게 맛 보이고 마사지해주는 등 서비스와 교육을 결합하는 방법으로 시장을 공략했다. 농사꾼인 그는 일주일에 세 번씩 오후4∼6시면 어김 없이 백화점에서 장사꾼으로 변신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백화점 고객들이 광주 인근의 농장이 있는 담양군까지 찾아오기 시작했다. 김 대표는 찾아온 고객들에게 질이 떨어지는 B급 제품을 덤으로 줬고 고객들은 그 재미에 농장을 다시 찾곤 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두 가지 큰 깨달음을 얻었다. 우선, 시식을 해보고 마사지를 받아본 고객들이 제품을 다시 찾는 것을 보고 체험마케팅의 중요성을 배웠다. 우리 제품이 좋다고 100번 말로 떠드는 것보다 소비자가 직접 경험해보도록 유도하는 것이 훨씬 더 큰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또 생산자가 직접 소비자를 찾아가는 것은 하책(下策)이며 소비자가 생산자를 찾아오도록 만드는 것이 상책(上策)이라는 깨달음도 얻었다. 신뢰를 얻으면 고객들이 생산자를 찾게 되며 이것이 경영에 훨씬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여러 작물과 동물을 키우는 복합영농과 알로에 장사로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던 김 대표의 인생은 의외로 엉뚱한 곳에서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는 고등학교 동기들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우연히 월급을 비교하게 됐다. 공고 토목과 출신인 김 대표의 동기들은 당시 한 달에 30∼33만 원을 벌고 있었다. 김 대표는 한 달에 28만 원 정도를 벌었다. 열심히 농사 짓고 살았는데 무척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그의 도전 욕구도 자극했다. 김 대표는 농사일을 발전시켜서 돈을 더 벌 수 있는 일을 찾아봤다. 그러던 그의 눈에 알로에 대리점이 들어왔다. 알로에 장사에 재미도 붙인 터였다. 그는 1988년 아예 농사일을 그만 두고 광주에 나가 알로에 대리점을 차렸다.

 

처음에는 대리점을 내면 쉽게 고객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기대와 달랐다. 우선 일일 사원을 모집해서 방문판매를 할 수 있게 교육을 해야 했다. 교육비와 함께 이들에게 물품을 구매해서 주는 비용이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이들이 파산하면 빚은 고스란히 김 대표가 떠안았다. 생각보다 장사도 잘 안 됐다. 그동안 벌어 놓은 1800만 원과 농협에서 대출받은 600만 원을 합쳐 2400만 원을 전부 날리는 데는 고작 16개월이 걸렸다. 직접 기른 알로에를 백화점에서 팔아본 경험은 있지만 유통만 전문적으로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라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다만 생산자가 유통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양념통닭과 호두과자

알로에 대리점이 망할 즈음 김 대표는 부인 진민자 씨(47·두리영농조합 공동대표)와 결혼했다. 전 재산을 날린 김 대표는 아버지가 벼농사 지어서 번 돈 200만 원으로 광주에 있는 누나 집에서 셋방을 살았다. 밑바닥 인생은 이렇게 시작된다는 것을 절감했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일단 돈을 벌어야 했다.

 

다행히 그동안 부친의 땅에 심었던 알로에는 잘 자라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알로에 수요도 늘어났다. 알로에가 건강에 좋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백화점 등 과거 자신이 개척했던 유통채널을 통해 공급해야 할 물량이 증가했다. 나중에는 알로에가 유행을 타는 바람에 자신의 재배 물량만으로는 부족해서 거제도나 제주도에서 알로에를 사다가 공급했다. 이처럼 시장 수요가 증가하자 그의 유통망 개척 경험은 소중한 자산이 됐다. 그는 광주 인근에 새로 문을 연 중형 마트나 백화점을 공략했다. 결국 광주의 송원, 롯데, 신세계백화점 모두 김 대표의 알로에를 구매했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일찍부터 백화점을 드나든 것은 김 대표에게 큰 도움을 줬다. 당시에는 백화점을 판매처로 생각하는 농부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김 대표는 백화점을 드나들며 농산물의 트렌드나 소비자들의 소비성향에 대해서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유행하는 아이템이 바뀌는 것이 보였고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했다. 시장의 흐름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알로에만으로 생계를 이어가기는 힘들었다. 부인이 당시 유행하던 양념통닭집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빚을 내서 통닭집을 차렸다. 진 대표는 임신한 몸을 이끌고 열심히 일했다. 장사는 잘됐다. 첫째 아들이 태어났고 김 대표는 알로에 배송을 하며 부인의 통닭집 일을 도왔다.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았지만 불행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아들이 100일 정도 됐을 때 뇌성마비 판정을 받았다. 태어난 후부터 아들 몸이 별로 안 좋았지만 별 일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어야 했다.

 

아들을 데리고 병원에 다니면서 물리치료받게 하고 통닭 장사하면서 알로에 배송을 하는 바쁜 생활이 시작됐다. 하지만 병원 다니느라 가게를 자주 비우다 보니 장사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래도 아들의 건강이 더 중요했다. 전주의 한 병원이 뇌성마비를 잘 치료한다는 얘기를 듣고 전주까지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이틀에 한 번꼴로 전주에 다녀왔다. 그런데 하루는 닭을 튀기는 기름을 불에 올려 놓고는 불을 끄는 것을 깜빡 잊고 아들과 함께 전주에 가버렸다. 다녀오니 가게는 다 타고 없었다. 김 대표는 소방차가 출동해 불을 끄고 있는 장면만 기억이 난다고 한다. 그만큼 충격이 컸다.

 

하지만 아들은 병원을 계속 다녀야 했다. 고민 끝에 호두과자 장사를 시작했다. 호두과자 기계를 사서 차에 싣고 다니면서 현장에서 직접 만들어서 팔았다. 친척 중 한 명이 호두과자 기계를 만들어줬는데 서울에서는 차량에서 음식을 만들어 파는 모델이 알반화됐다는 말을 전해 듣고 실천한 것이다. 리어카 행상이 대세였던 당시 차 노점상은 흔치 않았다. 광주에서는 김 대표가 처음이었다. 그가 광주의 번화가인 충장로에 나가면 손님들이 줄을 서서 호두과자를 사먹었다. 두 시간이면 준비해간 반죽이 떨어질 정도였다. 1991년 당시 하루에 63만 원어치까지 팔아봤다. 그 자리에서 직접 만든 호두과자는 그만큼 특별했다. 그는 남들과 다른 차별화 전략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김 대표가 차를 가지고 나와서 호두과자를 판 지 1년이 다 돼가던 시점에서야 과자나 어묵을 차에 싣고 와서 파는 노점상이 나타났을 정도다. 인기가 꽤 있었던 덕분에 하루는 광주의패밀리랜드라는 놀이공원 직원이 공원 안에서 장사를 해보지 않겠냐고 제의를 해왔다. 낮에는 차를 끌고 들어가서 그 안에서 장사를 했다. 전기세만 내면 됐다. 밤에는 광주시내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했다. 김 대표는 그때를 회상하며힘든 시기였지만 내 인생에 무언가를 하나씩 채워나간다는 생각 때문인지 일이 너무 재밌었다. 밑바닥 인생이라 생각하니 무엇을 팔아도 부끄럽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고객의 습성에 대한 관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장사가 잘되는 놀이공원도 비만 오면 손님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비가 오는 날은 오히려 시내나 주택가가 매출이 좋았다. 고객에게 물건을 팔려면 이들의 습성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김 대표는 호두과자를 팔면서 알게 됐다.

 

호두과자 장사를 하면서 틈나는 대로 알로에를 파는 고된 하루하루가 계속됐다. 김 대표는 정말 열심히 살았던 시기라고 당시를 기억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구청의 노점상 단속반이 호두과자 장사를 막기 시작했다. 한두 번은 하라는 대로 차를 뺐지만 아들의 병원비와 생계가 걸린 상황에서 호두과자 장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장소를 달리하며 어떻게든 호두과자를 팔았고 단속반은 끝까지 쫓아왔다.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도둑질을 하는 것도 아니고 불량품을 파는 것도 아닌데 기가 죽을 순 없었다. 단속반과 멱살 잡고 싸우다가 구청에 3번이나 불려갔다. 김 대표는 구청에 아픈 아들을 데리고 가서당신들이 병원비 대 줄거냐며 울부짖었다. 그만큼 절박했다. 때는 1990년대 초반,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심했다.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으면 전셋집을 구하기도 힘들었던 때다.

 

그러던 중 하루는 알로에 배송하러 백화점에 가 보니 색다른 채소가 많이 들어와 있었다. 수도권의 한 농장에서 쌈채소를 재배해 백화점에 코너를 만든 것이었다. 100g 상추 한 묶음이 900, 1000원인데도 잘 팔렸다. 김 대표는 한두 달 유심히 살펴보다가 백화점 바이어들에게내가 저거 재배 할 테니 저 코너를 나에게 달라고 말했다. 알로에 배송 시절부터 알아온 바이어들은 흔쾌히 수락했다. 다시 귀농을 하고 싶었던 그에게 기회가 온 셈이었다. 김 대표는 1994년부터 준비해 이듬해부터 유기농으로 쌈채소 재배를 시작했다.

 

1990년대는 유기농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던 시절이다. 고향 마을에서는 황당해 했다. 뭣 하러 힘들게 유기농 재배를 하느냐며 그를 말렸다. 미쳤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러나 김 대표에게는 사실 다른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몸이 아픈 아들에게도 먹일 수 있는 건강한 먹거리를 재배하고 싶었다. 아들에게 알로에도 먹이고 케일즙도 먹여봤지만 농약이나 화학비료 걱정이 앞섰던 기억을 그는 갖고 있었다. 몸이 아픈 내 아이에게 먹일 믿을 만한 먹거리가 많지 않았던 시절, 김 대표는 자신의 아들뿐 아니라 고객 모두가 믿고 자식에게 먹일 수 있는 채소를 기르고 싶었다. 이런진정성에서 김 대표의 친환경 유기농 쌈채소 재배는 시작됐다.

 

김 대표의 철학은 이전에 경험한 숱한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알로에와 양념통닭, 호두과자를 파는 데는 물론 농사일에도 전략과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우선 이것저것 다양하게 하는 복합영농보다는 한 가지 작물에 집중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또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쌈채소는 여러모로 전략적인 장점이 있었다. 거의 1년 내내 생산이 가능하고 리스크 관리도 쉬운 편이다. 재배 기간이 비교적 짧은 덕분에 문제가 생겨 작황이 좋지 않더라도 금방 복구가 가능하다. 예를 들면 양념통닭을 팔 때처럼 불이 나더라도 금방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또 웰빙과 로하스(LOHAS) 등 건강에 대한 관심으로 채소에 대한 수요는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판단했다. 두리영농조합의 전신인 두리농원은 준비기간을 거쳐 1997 2000평으로 시작을 했다.

 

친환경농업과 진정성

일단 친환경농업을 하겠다고 나섰지만 사실 그의 유기농에 대한 지식이나 기술은 턱없이 부족했다. 마음은 유기농 재배로 충만했지만 벌레 먹은 채소들을 맞닥뜨리니 후회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삶의 밑바닥까지 겪어본 그에게 이 정도 어려움은 힘든 축에 끼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유기농협회와 유기농가 등을 찾아 다니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화학비료를 안 쓰고 천연재료를 써서 식물을 키우는 방법을 배우던 시절이 아직도 그에게 생생하다. 채소류 재배에 알맞은 온도, 각종 병충해 대비 방법, 수분을 유지시켜주는 장비에 대한 연구 정보를 지속적으로 수집하고 직접 테스트해 봤다. 하지만 파종부터 수확까지의 기간이 45∼60일로 비교적 짧은 상추 같은 작물을 키우면서 동시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유기농업에 대해 배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 유기농업 교육 체계를 갖춰야겠다는 생각이 싹튼 건 이때였다. 원스톱으로 유기농업에 대해 배울 수 있는 학교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유기농업은 지금의 유기농업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지금은 각종 장비들이 즐비하지만 그때는 병해충을 진공청소기를 들고 가서 하나하나 빨아들이는 수준이었다. 끈끈이나 유인물도 없었다. 비닐하우스에 나방이 하도 많이 들어와서 생각다 못해 소 축사에 전기로 벌레를 잡는 장치를 떼다가 하우스 한가운데에 달아놓았다. 다음날 아침에 와 보니 나방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 게 아닌가. 그는정말로오지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그게 바로 농사꾼의 모습인 것 같다고 전했다. 김 대표는 논에 물이 들어가는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는 농부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차츰 유기농 채소 재배에 재미를 붙여갔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유기농법에 접근했다. 마음가짐도 바꿨다. 유인식물을 심어서 대비하되 벌레가 먹으면 먹는 대로 안 먹으면 안 먹는 대로 마음을 편하게 갖기 시작했다. 심어놓으면 무조건 수확해야 된다는 생각이 없어졌다. 심어놓고나도 먹고 너(벌레)도 먹고, 모두 같이 먹자는 생각으로 마음가짐을 바꿔갔다. 대부분의 농가들이 가졌던 수확량 중시 사고와는 다른 방식이다.

 

사실 농약을 쓰면 벌레 먹지 않은 푸르고 상처 없는 채소를 손쉽게 수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 대표는 예쁘게 생긴 채소 대신 진짜 맛 좋고 향 좋은 채소를 소비자들에게 팔고 싶었다. 소비자들이 1000원을 내면 1000원 이상의 가치를 느끼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유기농 재배의 진정성을 전달할 수만 있으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채소류는 포장을 할 때 정성스럽고 질서정연하게 박스에 넣었다. 수확을 할 때도 낫으로 베지 않고 손으로 했다. 이는 인건비 상승요인이 되지만 김 대표에게는 진정성이 더 중요했다.

 

두리영농조합에 적용한 경영 혁신

김 대표는 알로에와 양념통닭, 호두과자를 팔면서 고생하며 깨닫고 배운 작은 혁신의 방식들을 두리영농조합의 경영에 적용했다.

Pull Strategy와 체험 마케팅 그는 알로에를 백화점에서 팔며 깨달은내게 오게 하는 영업방식을 그대로 적용했다. 마케팅 용어로는 제품을 밀어내면서 판매(Push Strategy)하기보다는 구매자가 제품을 사도록 유도하는 ‘Pull 전략을 사용한 것이다. 백화점 바이어나 풀무원 같은 인지도 있는 기업의 구매직원도 예외가 없었다. 구매 문의가 오면 일단 무조건 담양의 농원으로 오라고 했다. 그리고 찾아오면 농장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 직접 와서 정성스레 재배되는 작물을 보여주면 더 당당하게 가격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직접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재배하는 채소가 정말로 안전하고 깨끗하며 맛이나 향이 좋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 대표는 농원이 공장과 다르다는 점도 설명했다. 손가락 모양이 다르듯이 식물도 모양이 다 다르고 맛과 향도 기후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이 모든 것을 일정하게 하는 것은 공장에서 하는 일이지 농원이라는 자연에서 하는 일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시켰다. 예를 들어 자연 재해 때문에 병해충이 많이 왔을 때는 수확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이런 체험마케팅을 통해 친환경농법으로 재배한 채소를 살펴보고 현장에서 직접 맛을 본 구매자들은 쉽게 다른 곳으로 구매선을 바꾸지 못한다.

 

선계약 후재배- Just in Time 두리영농조합은재고가 없다. 계약을 하지 않으면 파종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매자가 언제까지 얼마가 필요하다고 하면 계약을 하고 그다음에 파종을 한다. 도요타의 ‘Just in Time’ 시스템을 연상케 하는 관리다. 입소문으로 쌈채소의 질이 좋다는 평이 돌면서 주문이 늘어난 덕분에 주문 들어온 만큼만 재배했다.

 

한때는 광주의 많은 식당들이 찾아와서 당장 상추 등의 야채를 사겠다고 했다. 하지만 김 대표는 계약 체결이 안 돼 있으면 한 박스도 주지 않았다. 일단 찾아와서 계약을 해야 재배를 해줬다.

 

계절별 가격 정찰제 김 대표는 안정적인 소득을 올리기 위해 고심했다. 다양한 장사를 해봤지만 벌이가 들쭉날쭉한 것이 항상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계절별 가격 정찰제다. 작황이 일률적이지 않고 자연재해 가능성이 있는 농산물에 공산품처럼 가격 정찰제는 도입하는 것은 이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다만 김 대표는 쌈채소가 계절별로 생산량이 다르다는 점에 착안해 계절별로 가격을 달리 받았다. 봄 가을에는 수확량이 많으니 조금 싸게 하고 여름이나 겨울은 조금 더 받는 식이다.

 

가격은 생산비에 비례해서 책정을 하되 다른 일반적인 채소들보다 20% 정도 비싸게 받았다. 단순히 유기농이고 무농약 재배니까 비싸게 받는 것이 아니고 화학비료나 농약을 안 쓰니 수확량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를 보전하기 위해 그렇게 받는다는 설명이다. 김 대표로서는 자신 있게 내놓는 좋은 농산물인 만큼 가치에 맞게 판매하고 싶다는 점도 작용했다.

 

채널 마케팅 두리영농조합 농산물 구매자들은 백화점, 식당, 생협, 개인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학교 급식에도 들어간다. 김 대표는 급식을 시범적으로 실시할 때부터 학교에 유기농 쌈채소를 공급했다. 이는 어린이들부터 건강에 좋은 친환경 농산물로 키워야 한다는 김 대표의 철학 때문이다. 물론 어렸을 때부터 맛과 향이 좋은 유기농 채소를 맛본 어린이들이 커서도 유기농을 찾을 것이라는 기대도 한몫했다.

 

김 대표는 중간 상인에게는 절대로 물건을 팔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유통업자들이 중간에서 폭리를 취하는 걸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중간 상인을 없애는 마케팅 채널의 수직계열화를 추진한 셈이다. 이런탈중개화(disintermediation)’ 전략으로 김 대표는 가격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권을 유지할 수 있었고 유연하게 시장에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아 유기농 채소를 먹어야 하는 개인들에게는 직접 찾아오지 않아도 택배로 물건을 보내줬다. 개인 구매 고객의 90% 정도가 건강 때문에 꾸준히 유기농 채소를 사먹고 있다. 인터넷으로 주문을 받는 인터넷 쇼핑몰도 운영하고 있다.

 

 

브랜드화와 스토리텔링- ‘3℃ 숨쉬는 맑은 채소 김 대표는 ‘3℃ 숨쉬는 맑은 채소라는 이름으로 채소를 브랜드화하는 데도 성공했다. 이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그는 영농조합 농가들과 수차례 회의를 했다. 그러다가 면사무소나 농협 직원에게 두리농원의 채소 관련 브랜드를 만들어 주면 1년간 쌈채소를 무료로 제공한다는 당근도 내걸었다. 많게는 브랜드명을 30개씩 적어낸 사람도 있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영농조합 농가 회의에서 다시 논의한 결과 가장 신선도를 유지하는 온도가 섭씨 3도라는 데 착안해 조합 농가들이 함께 ‘3℃ 숨쉬는 맑은 채소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3℃라는 디테일과 함께 신선하고 숨쉬는 맑은 채소 이미지의 브랜드명이 지어진 것이다. 실제로 김 대표는 유통과정에서 사용되는 냉탑차나 판매장의 온도를 3℃로 유지하고 있다. 특히 이 브랜드명의 최대 강점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소비자들과 교감을 할 수 있는스토리텔링기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 채소는 유통 중에도 항상 3℃를 유지해 신선하고 깨끗하며 살아 있다는 걸 소비자들에게 인식시키는 작명인 셈이다.

 

 

지배구조와 농업학교 김 대표는 1997년 인근 14개 농가를 설득해서 두리영농조합을 설립했다. 그전의 명칭은 두리농원이었다. 처음 목표는 생산과 판매 및 유통을 모두 함께하는 공동체가 목표였다. 하지만 생산 공동체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농가는 기업과 달라서 의사 결정은 물론 의사 전달도 힘들었다. “어디에 얼마의 채소를 팔기로 계약을 했으니 언제까지는 파종을 하세요라고 김 대표가 말을 하더라도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조합은 한때 20개 농가까지 늘었지만 이제는 수가 줄었고 더 이상 생산을 공동으로 하지는 않는다. 반면 판매와 유통은 함께한다. 판매는 여러 농가가 함께하는 것에 장점이 많다. 생산은 열심히 하면 대부분 결과물이 나오지만 판매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판매망을 뚫고 유통망을 연결해야 했다.

 

김 대표는 궁극적으로 두리영농조합을 사회에 환원하고 싶다. 이 결심을 지키기 위해서 일부러 교육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얘기를 하기도 한다. 마음이 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는 하루빨리 조합을 재단법인으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다.

 

재단법인으로 전환이 되면 소수정예 친환경 농업학교를 세우는 것이 목표다. 이런 거대한 계획은 사실 2006년에 이미 시작됐다. 전남도에서 3억 원을 지원해 교육관을 지을 수 있게 된 것이 2006년이다. 원래부터 친환경농업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3억 원에 6억 원을 보태 모두 9억 원을 들여 한옥으로 교육관과 식당, 숙소를 지었다. 김 대표는유기농을 실천할 수 있는 소수 정예 멤버로 30∼40명 채워서 학교를 설립하는 게 큰 꿈이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제 생산을 체험할 수 있는 비닐하우스도 있고 교육을 할 수 있는 교육관도 생겼다. 김 대표는 친환경농법을 배우러 다니던 시절 원스톱 교육기관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마침내 실천했다.

 

김 대표가 이렇게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 중 하나는 무농약과 유기농에 대한 일반인들의 무지 때문이다. 7년 전 즈음에는 유기농보다 무농약 작물이 인기가 더 많았다. 유기농은 농약과 비료를 사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토양 관리부터 친환경적 방법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차이가 많다. 하지만 유기농에 대한 인식 수준은 낮았다. 그는 교육을 통해 이를 개선하고 싶었다.

 

직원에 대한 배려 혼자서 일을 하는 것이 익숙한 김 대표도 어쩔 수 없이 도움을 받아야 하는 부분이 수확이다. 수확하는 직원이 많을 때는 18명까지 늘었다(지금은 6명으로 줄었다). 모두 초창기 때부터 함께한 70대 할머니들이다. 이외에 외국인 근로자가 2, 그리고 포장 인력이 1명 있다.

 

수확을 할 때는 기계의 도움 없이 손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허리를 굽혀 따야 한다. 김 대표는 할머니들이 허리가 아프다고 하는 얘기를 듣고 비닐하우스 안의 고랑을 넓혔다. 되도록 많이 심어야 많이 팔 수 있지만 재배면적에 손해를 보더라도 할머니들이 쉽게 수확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김 대표에게는 더 중요했다. 하루 이틀 일하는 것도 아닌데 모두 어머니뻘의 할머니들이 고생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고 한다.

 

또 한 가지 김 대표가 생각해 낸 것이 허리에 차고 다니는 간이 방석 의자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작업을 할 때 할머니들이 쪼그려 앉아서 일하는 걸 바꿔 보려고 한 것이다. 가벼운 스티로폼 방석을 허리에 차고 다니면서 쪼그려 앉지 않고 방석 위에 앉아서 수확 작업을 할 수 있도록 고안했다. 두리영농조합이 방송에 소개가 되면서 이 간이 방석 의자는 누군가가 상품으로 개발해 팔고 있다.

 

김 대표는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MBA를 졸업한 학생들도 쓰기 쉽지 않은 효과적인 전략을 농업에 접목했다. 인생이 어려웠을 때 좌절하지 않았고 여기서 배운 교훈들을 적용해 성과를 냈다. 한때 12억 원까지 갔던 연 매출액은 김 대표가 친환경농업 교육에 집중하기 위해 무게중심을 농업에서 교육으로 옮기면서 6억 원대로 줄었다. 김 대표는 돈을 더 많이 버는 것보다는 친환경농업을 하는 농업인으로서 책임감을 더 중시한다. 그는 친환경농업의 전도사로서 농업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김선우 기자 sublime@donga.com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