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2차 세계대전 전사에서 아르덴의 삼림지대는 영원한 교훈이자 전설이다. 연합군은 두 번이나 아르덴을 통과해 온 독일 기갑부대의 대규모 기습과 돌파작전을 허용했다. 첫 번째 돌파로 프랑스가 6주 만에 떨어졌고 두 번째 기습인 발지전투에서 미군은 태평양전쟁에서 잃은 병력보다 더 많은 손실을 입었다.
독일군의 고민
유럽 전쟁에서 독일의 고민은 동쪽에 러시아, 서쪽에 프랑스와 영국이라는 강적이 있어서 전쟁을 개시하면 두 개의 전선을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쟁물자와 병력에서 열세인 독일이 한쪽 전선에서만 승리하려고 해도 물자와 병력을 집중 투입해서 단기승부를 내야 했다. 그래서 고안한 전술이 벨기에로 우회해서 프랑스로 침공하는 슐리펜 계획이었다.
하지만 1차대전 당시 독일군의 기습은 실패로 끝났고 슐리펜 계획의 장단점은 만천하에 드러났다. 1940년의 상황도 달라지지 않았다. 프랑스군의 병력, 전차, 포의 비율은 독일군 화력의 거의 2배였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기갑부대와 탱크가 독일의 상징이 돼버렸지만 개전 초에는 전차의 성능이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못했다. 독일 탱크의 장갑 두께는 영불 전차의 절반에 불과했다. 독일군 탱크포는 적군 전차를 파괴할 수 없었다. 항공전력도 생각처럼 우세하지 않았고 몇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독일군 총사령부는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검토해도 그들이 쓸 수 있는 전술은 슐리펜 계획밖에 없었다. 이를 성공시키려면 더 빠른 기동, 더 대담한 강타, 그리고 기만과 함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프랑스도 이를 알고 벨기에 국경을 단단히 봉쇄하고 있었다. 1차대전 때 4년 동안 1000만에 가까운 사상자를 내면서도 돌파하지 못했던 영불 국경에는 마지노선이라는 강철요새가 세워졌다. 이 상황에선 슐리펜 계획 자체가 프랑스군이 쳐 놓은 덫으로 뛰어드는 격이었다.
개전 직전 총사령부가 마련한 진공계획은 슐리펜 계획의 복사판이었다. 히틀러가 보기에도 그것은 무모하고 자멸적인 계획이었다. 대다수의 독일 장성들은 전쟁이 터지면 또 1000만은 죽어야 한다는 우울한 트라우마에 휩싸여 있었다. 이때 A집단군 사령관 만슈타인 중장과 휘하 군단장 구데리안이 획기적이고 새로운 전술을 제안했다.
아르덴 돌파
1차대전 때 독일군은 도보로 진군했다. 기차와 엉성한 차량이 보급품을 수송했다. 그것이 속도와 집중력의 한계를 낳았다. 만슈타인은 새로운 무기인 탱크가 기동과 집중력을 겸비한 무기라는 사실에 착안했다. 당연한 얘기 같지만 1940년대에 탱크로부터 이런 가능성을 본 장군은 나라마다 10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탱크도 마지노선과 벨기에의 요새지대를 단숨에 돌파할 수는 없었다. 만슈타인은 중간에 빈 곳을 발견했다. 마지노선과 벨기에 사이에 펼쳐진 아르덴 삼림이었다. 프랑스는 이곳은 기갑부대의 돌파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적군의 침공에 대한 대비도 느슨했다. 만슈타인의 계획은 이곳을 돌파하는 것이었다. 돌파 후 기갑군을 둘로 갈라 한 부대는 대서양까지 그대로 직진해서 벨기에로 들어간 프랑스군과 프랑스의 연결로를 잘라버린다. 또 다른 부대는 좌회전해서 마지노선의 뒤로 내달려 역시 프랑스군을 역(逆)포위한다. 이렇게 하면 별다른 전투도 없이 단숨에 전 프랑스군을 궤멸시킬 수 있다.
작전도상으로는 환상적인 계획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장애가 너무 많았다. 사령부의 장군들은 무모한 계획이라고 반대했고 만슈타인의 계획서가 히틀러에게 전달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어찌어찌 히틀러의 귀에 이 계획이 들어갔고 히틀러와 만슈타인의 비밀회동이 주선됐다. 히틀러는 논리적 사고가 부족했지만 직관력과 상상력은 풍부했다. 그는 만슈타인의 계획에 매료됐다. 히틀러가 군사지식에 문외한인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됐다. 히틀러의 강력한 명령으로 만슈타인의 계획이 채택됐다.
1940년 5월10일 독일군이 프랑스를 향한 진격을 개시했다. 단 4일 만에 독일군은 프랑스 방어선을 완전히 통과했고 6월22일에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했다. 1000만의 전사자를 내고 6년은 족히 걸릴 것이라던 전쟁이 6주 만에 끝났다. 세계는 경악했다. 공격을 주도한 히틀러와 구데리안도 놀라서 “이건 기적이다”라고 말했다. 독일이 보여준 이 전격전은 현대전의 신화가 됐다.
승리의 비결
이 놀라운 승리의 비결은 무엇일까? 만슈타인의 파격적이고 대담한 발상이 성공의 비결은 아니었다. 그것은 성공을 위한 한 걸음일뿐이었다. 기갑부대가 아르덴을 통과할 수 없다는 말에는 탱크가 통과할 수 없다는 의미와 전격전을 성공시킬 만큼 대규모 기갑부대가 신속하게 통과하기란 불가능하다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독일군도 이 작전이 성공하려면 5일 안에 기갑군이 스당에서 마스강을 건너야 한다고 봤다. 그러나 아무리 빨라도 10일은 걸릴 것이라는 게 자체 평가였다.
만에 하나 프랑스군의 반격을 받으면 속수무책이라는 것도 무시무시한 한계였다. 프랑스군이 조금만 거세게 저항한다면 독일군은 좁은 도로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돌파에 성공한다고 해도 독일군이 프랑스군의 후방으로 진군하는 동안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측면으로 역습을 가해오거나 독일군의 보급로를 끊어버린다면 독일군은 프랑스군의 배후를 포위하기는커녕 적진 한복판에서 고립돼 버릴 것이다.
먼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공세와 기동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두 마리의 고양이가 서로 꼬리 또는 측면을 물려고 한다면 빠르고 대담한 쪽이 승리한다. 결국 승리의 관건은 속도의 문제, 첫 번째 질문으로 환원된다. 이는 아르덴의 좁은 산길과 방어선을 단숨에 돌파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것을 해결한 방법은 거대한 사명감이었다. 독일군 장교와 병사들에게 속도와 시간표에 조국의 운명이 걸려 있다는 사실이 각인되고 또 각인됐다. 수많은 장교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다하기 위한 아이디어와 방법을 모색했다. 기갑부대의 속도를 좌우하는 열쇠는 연료보급이었다. 처음에는 탱크에 연료 드럼통을 싣고 달리는 방법을 구상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러자 한 보급장교가 드럼통 보급이란 방법을 생각해 냈다. 100㎞마다 연료를 채운 드럼통을 준비해 둔다. 지나가는 탱크는 드럼통을 실어 연료를 보충하고 지정된 장소에 버린다. 그러면 중간 중간에 편성된 보급부대가 드럼통을 회수해서 연료를 채워 다시 지정된 장소에 배치한다. 매사에 철저한 독일군답게 연료소모량을 정확하게 계산해서 드럼통을 배치했다. 탱크의 기계 피로도를 계산해서 탱크를 쉬게 해야 할 곳에서 연료를 보충하게 했다. 이로써 급유시간을 소모하지 않고 전진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예측가능한 문제와 대응책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예측이 불가능한 수많은 돌발 상황으로 채워진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한 방법이 그 유명한 임무형 전술이다.
독일군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듯이 경직된 조직이 아니었다. 모든 장교들은 임무수행을 위한 판단력과 적절한 재량권을 보장받았다. 적의 벙커에 막히고 강력한 방어선에 부딪힐 때마다 현지 지휘관들의 즉각적인 판단에 의해 그들은 신속하게 대응했다. 오토바이 소대로 전차를 공격하거나 벙커로 돌격하는 교본에도 없는 무모한 공격을 하기도 하고 타부대의 전투 지경선을 침범해 우회하거나 보병의 엄호 없이 전차 중대가 단독으로 돌격하기도 했다. 이런 무모한 행동은 실패했을 경우 엄청난 비난을 각오해야 했다.
임무형 전술의 문제점은 임무와 임무가 충돌할 때다. 소대장의 돌발 행동이 중대의 계획에 차질을 줄 수 있고 대대의 행동이 사단 전체의 전략을 망칠 수도 있다. 실제로 이런 사례가 발생했다. 만에 하나 작전이 실패할 경우 독단적 행동을 한 하급 지휘관이 모든 책임을 모조리 뒤집어쓸 수 있다. 그래서 임무형 전술에 대해 이론적 접근을 할 때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임무와 재량의 한계, 책임소재를 어떻게 정하느냐는 것이다.
이 문제를 이론으로 접근해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다. 독일군은 세 가지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결코 시나리오대로 움직이지 않는 실제적 훈련, 장교들의 철저한 사명감, 임무형 전술의 효과에 대한 지휘관들의 확고한 신념이다. 이를 통해 그들은 창의적 해결능력과 유연한 사고, 갈등과 책임전가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배워나갔다.
아집과 독선
그러나 독일군의 이런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격전의 최고 공로자는 프랑스군 자신이었다. 프랑스군은 자신들이 세운 방어전술에 완고하게 집착한 나머지 아르덴 습격의 가능성에 대한 경고, 독일군이 아르덴에 집결하고 있다는 첩보를 모두 무시했다. 심지어는 공격 당일 독일군 기갑대열을 발견한 정찰기의 보고마저도 무시했다. 이때 공습을 가했다면 아르덴을 꽉 메운 독일군은 꼼짝없이 대량 학살을 당했을 것이다.
기동전에 대한 예행훈련이 없었던 것도 치명적이었다. 프랑스군은 독일군과 달리 전격전에 대해 이론적 접근만 했다. 기갑부대의 공세적 방어론에 코웃음을 치면서 측면이 무너지면 끝이라는 전술교리를 신봉했다. 이것은 엉뚱한 결과를 낳았는데 실제 전투가 벌어지자 프랑스군은 전선의 대열 유지에 집착한 나머지 누구도 대열에서 뛰쳐나가 신속하게 독일 기갑부대의 측면을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다. 반대로 독일군이 전선의 일부만 돌파해도 전 전선이 싸우지도 않고 물러섰다. 부분적으로 용감하게 저항하던 병사들도 그들의 뒤에서 독일 전차가 으르릉 거리면서 나타나면 소총을 집어던지고 마구 도망치기 일쑤였다. 현대전에서 보급로가 끊긴다는 게 병사들을 얼마나 공황상태로 몰아넣는지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반면 독일군들은 이런 상황을 충분히 숙지하고 대응방법을 훈련함으로써 측면 노출 및 고립공포증에서 자유로웠다.
1940년 독일군의 기적적인 승리는 천재의 혁신적 사고, 구성원의 철저한 사명감, 충분한 훈련을 통한 구성원의 창의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한 결과였다. 오늘날 많은 기업이 임무형 전술에 관심을 기울인다. 임무형 전술은 확고한 사명감, 상하 간의 상호 신뢰, 충분한 훈련과 경험의 공유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yhkmyy@hanmail.net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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