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째 베스트셀러 <수학의 정석> 홍성대 이사장

“쉼 없는 개혁이 4000만 권 신화 이뤘다”

35호 (2009년 6월 Issue 2)

한국 입시 제도의 가장 큰 특징은 ‘조변석개(朝變夕改)’다. 교육은 백년지계(百年之計)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제도가 바뀐다. 그러다 보니 전문가들조차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헷갈려 한다.
 
이렇게 급변하는 교육 시장에서 무려 43년 동안 번영을 구가한 제품이 있다. 게다가 이 제품은 제도가 수십 번 바뀌는 동안 단 한 번도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다. 환갑을 바라보는 장년층이 학창시절 끼고 다녔던 책을 빅뱅과 소녀시대에 열광하는 요즘 청소년들도 숙독하고 있다. 바로 <수학의 정석>이다.
 
<수학의 정석>은 출판의 역사를 여러 차례 새로 썼다. 1966년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누적 판매량이 4000만 권이나 된다. 4800만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중학생 이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이 1권씩 구매한 셈이다. <수학의 정석>은 지금도 매년 120만 권씩 팔린다. 오래된 책 한 권이 극심한 환경 변화와 경쟁자들의 거센 도전에도 ‘만년 1등’을 고수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동아비즈니스리뷰(DBR)는 2009년 5월 15, 서울 서초구 양재동 성지출판에서 <수학의 정석> 저자인 홍성대 이사장을 만났다. 

전체 틀은 고수하되, 문제는 부지런히 바꿔
대중들에게 <수학의 정석>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바뀐 게 없어 보인다. 투박한 디자인에 구성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전통을 고수한 게 장수의 비결일까? 하지만 홍 이사장은 전혀 다른 답변을 내놓았다.
 
“초판과 최신판을 비교하면 문제가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 딱 보일 겁니다. 정석 책을 대충 훑어본 사람들은 초판이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말하겠지요. 사실은 알게 모르게 꾸준히 개정을 해왔어요.”
 
우리나라 교육 과정은 보통 5∼7년에 한 번씩 대규모로 바뀐다. 홍 이사장은 그때마다 2년씩 시간을 들여 직접 개정 작업을 한다고 말했다. <수학의 정석>이 처음 나오고 5년까지는 매년 개정을 했고, 대대적인 개정은 지금까지 여섯 번 정도 했다는 설명이다.
 
“언제나 새로 쓰는 기분으로 하지요. 설명이 부족하다 싶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원고를 다시 씁니다. <수학의 정석>이라는 책의 전체적인 틀은 한결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크게 개정할 때마다 문제를 10% 정도 교체해요. 수학이라는 분야에서 이 정도면 엄청나게 많이 바꾸는 겁니다.
 
저는 평소에 떠오르는 좋은 문제들을 메모해뒀다가 개정판에 넣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척 고민스러운 일이지요. ‘선택의 어려움’에 부딪혀요. 준비해놓은 자료가 워낙 많다 보니 한자리에 새로 넣을 후보 문제들이 수십 개나 돼요. 이놈을 넣을까, 저놈을 넣을까 고민하는 게 가장 어렵습니다. 학생들한테 새로운 유형의 문제를 소개해주고 싶지만, 동시에 알토란 같은 기존 문제를 빼내야 하니까 아깝기도 하고요. 정말 주옥같은 문제들은 43년째 그대로 남겨뒀습니다.”
 
책 개정에 얽힌 일화가 하나 있다. 40여 년 전, 홍 이사장이 항상 손가방에 넣고 다니며 애지중지하던 메모장을 택시에 놓고 내렸다. 언제 어디서나 새로운 문제가 떠오를 때마다 적어놓던 메모장이었다. “정말 자식을 잃어버린 것만큼 아까웠지요.”
 
홍 이사장은 그 일이 있고 나서 과감히 자가용을 사버렸다. 당시만 해도 자가용은 사치품이었지만 그에게는 필수품이었다. 택시를 타고 다니다 메모를 잃어버리느니 승용차 유지비를 쓰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차 안 곳곳에 주머니를 달아놓고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메모해 넣어뒀다.
 
<수학의 정석>은 유니버설 디자인
이처럼 문제를 많이 교체했지만 정석 책의 큰 틀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바뀌지 않았다. 각 장에서 수학의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고, 이 개념을 익힐 수 있도록 상세한 풀이 과정을 넣은 ‘기본 문제’를 실은 뒤, ‘유제’와 ‘연습문제’로 단련하는 식이다. 원래는 문과생과 이과생이 모두 보는 ‘기본편’이나, 주로 이과생들이 보는 심화 단계의 ‘실력편’ 모두 주관식 문제뿐이었다. 그러다 입시에서 수학 과목이 5지선다형 위주로 바뀌면서부터 기본편의 25% 정도를 5지선다형으로 바꿨다. 수학 시험은 단연코 주관식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홍 이사장의 입장에서는 많이 양보한 셈이다.
 
“수학은 논리적 사고력을 기르는 학문이에요. 그러자면 답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논리적으로 잘 전개됐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5지선다형의 경우 가끔 5개의 보기를 각각 문제에 대입해보면 답이 나올 때도 있는데, 그것은 꾀로 푼 것이지 수학 실력을 키우는 데는 전혀 도움이 안 되지요.

최근의 출제 경향에 맞게 책의 형식을 싹 바꿀 생각은 안 해봤어요. 출제 형식이 주관식이든 객관식이든, 새롭게 시도되고 있는 문제 유형이 무엇이든 간에 수학은 기본기가 탄탄해야 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학의 정석>이 만들어진 목적 자체가 문제를 찍는 요령이 아니라 수학의 기본기를 가르치려는 것이므로 이 책에 나오는 대부분의 질문들은 ‘골라라’가 아니라 ‘풀어라’ ‘구하여라’ ‘증명하라’ 하는 식입니다. 지루하고 진부하다는 이유로 문제 푸는 ‘과정’을 생략할 수는 없습니다.
 
책 자체가 그렇게 기본에 충실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오지 않았나 싶어요. 입시 출제 경향이 어떻든 간에 일단 <수학의 정석>으로 자습을 하고서 나중에 다른 문제집을 보는 게 학생들의 수학 공부 패턴으로 굳어져버린 것이죠.”
 

쉬운 문제부터 어려운 문제까지 다양한 수준의 문제들로 구성돼 있으니, 수학을 잘하는 학생이나 못하는 학생이나 별 고민 없이 <수학의 정석>을 고른다. 한마디로 <수학의 정석>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제품, 즉 ‘유니버설 디자인’인 셈이다. 여기에 친절하게 해설이 돼 있어 일정 수준의 학생이면 혼자서도 충분히 공부할 수 있는 참고서라는 게 이 책의 성공 비결로 꼽힌다.
 
촌스러운 디자인을 고집하는 이유
서점의 참고서 코너에 가보면, 트렌디한 디자인으로 표지와 속지를 꾸민 화려한 참고서들 사이에서 투박하고 촌스러운 <수학의 정석>이 오히려 눈에 띈다. 정석 책의 표지는 지금까지 몇 번 바뀌긴 했지만 큰 변화가 없었다. 그나마 책 제목이 ‘數學의 定石’에서 한글인 ‘수학의 정석’으로 바뀐 정도다. 화려한 시각 디자인에 익숙한 요즘 청소년들의 취향에 맞춰 디자인을 확 바꿀 계획은 없을까.
 
“개정할 때마다 편집 담당자들이 그 얘기를 해요. 그런데 크게 불편하지 않다면 굳이 디자인을 바꿀 필요가 있느냐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학생들이 ‘아, 40여 년 전에 나온 책이라 표지가 이렇구나!’라고 생각하면 그것대로 또 재미있지 않습니까? 디자인이야 얼마든지 세련되고 좋게 바꿀 수 있지만, 내가 고집을 부려 옛날 분위기를 간직하는 거예요.”
 
그러다 지난해 편집 담당자들이 하도 성화를 하는 바람에 그는 새로운 표지 디자인을 의뢰했다. 단, 초판의 이미지를 크게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5가지 디자인을 내보라고 주문했다. 고유의 브랜드 정체성은 고수하되, 좀더 세련된 디자인을 모색해보기 위해서였다. 새로 나온 표지 후보 중 하나를 고르기 위해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상산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소비자 조사’까지 실시했다. 홍 이사장은 기자에게도 최신판을 보여주며 전보다 더 나은지 이것저것 캐물었다. 마치 꼬까옷 입혀놓은 손자를 자랑하는 듯 애정이 묻어났다.
 
마케팅은 없다, 근본으로 승부하라
홍 이사장은 <수학의 정석>이 나온 초창기 1, 2년 정도는 영업 사원 서너 명을 거느렸지만, 그 후로는 오직 ‘영업 사원 단 한 명’의 원칙을 지켜왔다. 지금도 서점으로 책을 공급하고 수금하는 일을 하는 영업 사원이 딱 한 명뿐이다.
 
마케팅을 어떻게 해왔냐는 질문에, 그는 “내 사전에 마케팅은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마케팅을 안 해도 책이 충분히 잘 팔리는데 굳이 마케팅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는 “나중에 책이 정 안 팔리면 그때 가서 마케팅을 하겠다”고 덧붙였다.
 
“책의 내용으로만 승부를 걸고 싶습니다. 다른 책으로는 이해가 안 되던 것이 정석을 보면 참 쉽게 이해가 된다거나 문제 하나하나가 알토란 같다 하는 반응이 40년 넘도록 구전되고 있으니, 따로 돈 들이지 않고도 저절로 마케팅이 되지요.”
 
<수학의 정석>은 출판사가 판촉을 하지 않아도 친구들 사이에, 스승과 제자 사이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 저절로 입소문이 퍼진다. 김상훈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는 “고객의 니즈에 맞춰 처음부터 제품 자체를 훌륭하게 만드는 것도 넓은 의미의 마케팅에 속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수학의 정석>은 입소문 마케팅에 필요한 2가지 조건을 확실히 갖췄기에 성공을 이어왔다”고 설명했다. 첫 번째 조건은 제품 자체가 훌륭하다는 것이며, 두 번째 조건은 제품 소비에 ‘체험’이 개입된다는 점이다. 참고서나 영화, 교육 서비스 등은 소비자가 직접 체험해보지 않고 겉으로만 봐서는 쉽게 구입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 때문에 대다수 소비자가 앞서 체험해본 사람들의 의견에 크게 의존한다.
 
미래를 위해 공저 체제로
2001년 개정판부터 <수학의 정석>에는 ‘도운이 이창형, 홍재현’이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다. 홍재현 씨는 홍 이사장의 딸로 서울대 수리과학부 교수이며, 성지출판 기획실장인 이창형 씨는 사위다. 두 사람은 서울대 수학과 동기생으로 만난 부부다. 

“몇 해 전에 목 디스크 수술을 받아 이제 건강에 신경을 써야겠다 싶어요. 나는 차츰 정석에서 손을 떼고, 딸 부부가 개정 작업에 조금씩 발을 들여놓도록 할 셈이에요. 훗날에는 완전히 그쪽으로 넘겨줄까 해요. 둘만으로는 부족하다 느끼면 좋은 필진을 더 구하면 되고요. 내가 늙었어도 정석 책을 찾는 학생들이 꾸준히 있으니 마음대로 절판도 못해요.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정석을 보살필 사람들이 필요하지요.”
 
올해 일흔두 살인 홍 이사장은 요즘에도 개정판 작업을 하느라 새벽 2, 3까지 잠 못 들기 일쑤다. “나이도 있고 하니까 지난 개편까지만 하고 손을 떼려 했어요. 그런데 또 지난해부터 조금씩 개편 작업에 발을 들여놓다 보니, 나도 모르게 계속 눌러앉아서 하게 돼버렸어요. 원고를 쓴다고 해도 밤 12시 전에는 자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런데 문제 풀다 보면 몰입해버려 나도 모르게 새벽이 온단 말이에요. 팔자보다 몇 년 덜 살더라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독자들에게 떳떳한 책을 내놓자고 계속 다짐합니다.”
 
홍성대(72) 이사장은 <수학의 정석>을 출판하는 성지출판의 회장이다. 학교법인 상산학원 이사장도 겸하고 있다. 홍 이사장은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종로학원 등에서 수학 강사를 하던 중 26세에 <수학의 정석>을 쓰기 시작해 29세 되던 1966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으로 젊은 나이에 상당한 돈을 벌었다. 이후 학생들 덕분에 번 돈을 학생들에게 좋은 교육으로 보답한다는 뜻으로 전북 전주에 상산고를 설립했다. 1981년 개교한 이 학교는 2003년 자립형 사립고로 바뀌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50호 Smart Worcation 2022년 08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