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ek is Chic’의 시대 집에 틀어박힌 괴짜가 트렌드세터다

Article at a Glance

 두꺼운 안경을 끼고, 운동은 잘하지 못하며 사교성도 없는 아이들. 오직 집에 틀어박혀 과학책을 읽고 실험을 하며, 비슷한 아이들끼리 모여 어려운 보드게임을 하던 학생들. 때로는 유치하게 보이는 공상과학 영화나 만화에 심취해 있던 젊은이들. 그들은 보통 ‘너드(nerd)’ 혹은 ‘긱(geek)’이라 불리며 놀림의 대상이 됐지만 바로 그들이 자라서 빌 게이츠가 됐고, 제리 양이 됐으며, 마크 저커버그가 됐다.

당연히 너드들이 오랜 시간 만들어온 문화와 취향은 그들의 성공으로 인해 ‘핫’한 트렌드가 돼 버렸다. 단순히 얼리어댑터로 인정받는 수준을 넘어서 그들의 무심한 패션과 독특한 취향마저도 이제는 ‘섹시하다’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트렌드’나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단어에서 뭔가 완벽하게 포장된 세련됨을 찾는다면 미래 시장을 선도할 수 없다. 차라리 지금 당장 미국과 유럽의 고등학교에 어떤 독특하고 새로운 집단이 등장하고 있는지부터 살펴보라.

편집자주

매해 연말이 되면 ‘20XX년 트렌드 예측’류의 책이 서점에 넘쳐납니다. 하지만 대부분 신문기사와 몇 가지 특정한 문화현상을 짜깁기한 것에 그쳐 실망을 줄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영자들은 사회와 문화의 변화,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 위치한 소비자들의 트렌드 변화를 알고 싶어 합니다. 글로벌 문화 전략가인 조승연 작가가 현재 세계적 ‘트렌드 리더’와 그들이 만들어내는 해외의 최신 문화 트렌드, 그리고 그것이 비즈니스에 미칠 영향에 대해 소개합니다.

스마트 워치가 최근 비즈니스계의 주요 화두다. 삼성이 먼저 갤럭시 기어를 출시하고 스마트 워치 시장을 열었다. 애플이 뒤를 이어 애플워치를 출시하며 삼성 기어에 대응하고 있다. 사실 스마트 워치 출시 초기, 특히 삼성의 갤럭시 기어 출시 초반에는 소비자들의 조롱이 이어졌다. 왜 그랬을까?

오랫동안 시계는 남자에게 유일하게 허용된 액세서리였다. 스마트 워치가 출시됐을 때 사실 세계적인 명품 시계 시장은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을 호가하는 명품 시계 소위 ‘오트 오를레제리(l’haute horlogerie)’1 1최고급 시계군을 의미하는 단어 닫기 시장은 성장세를 자랑했다. 2014년 스위스의 마케팅 리서치 회사 디지털 럭셔리 그룹은 2014년 리포트에서 오트 오를레제리 시장이 12%의 높은 시장성장률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중국 시장은 58%, 브라질은 7%, 러시아와 인도에서는 각각 14%와 20%의 성장률이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분석을 토대로 개발도상국에서도 럭셔리 시계에 대한 전망을 매우 긍정적으로 봤다. 스와치, PPR 등 명품 시계 그룹들은 공격적으로 고가 브랜드 시계 장인들이 있는 공장과 인력을 함께 사들여 옛 시계 장인의 이름을 단 새로운 브랜드들을 출시했다. 신사들 사이에서 ‘시계 차는 왼쪽 손목만은 디지털의 편리성에 내 줄 수 없는 고전적 섹시함의 보루 같은 곳’이라는 표현들이 흘러나왔다. 삼성이 세계 최초로 내 놓은 스마트 워치 ‘기어’가 미주 지역에서 광고로 소개되자 ‘스마트 워치를 섹시하게 포장하다니 말도 안 되는 짓”이라는 조롱부터 나온 이유다. 일반적으로 ‘기계는 섹시할 수 없다’라는 것이 미국인을 비롯한 서양인들의 고정관념이었다. 실리콘밸리의 IT 회사에서 일하는 필자의 미국인 친구마저 ‘3년 안에 쓰레기 통에 들어갈 디지털 시계를 1000달러에 팔겠다는 발상은 도대체 뭐지?’라고 말했다. 이처럼 단지 스마트 워치의 존재를 알리는 광고만으로 조롱을 당했던 것이 불과 3년 전 일이다.

하지만 2013년에 킥스타터가 ‘페블’이라는 스마트 워치를 시장에 내놓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 스마트 워치는 그해 상반기에 9만3000개가 팔렸고 27만5000개의 선주문을 받았다. 그리고 2015년 현재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스마트 워치를 만들어내면서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 미국의 유력 비즈니스 잡지 <비즈니스인사이더>는 2018년에는 약 9억1600만 대의 스마트워치가 팔려 96억 달러 규모의 시장이 형성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최근 중국의 한 젊은 푸얼타이(재벌 2세)가 자신이 기르는 강아지의 앞 두 다리에 애플워치를 채운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린 것이 세계적인 이슈가 될 정도로, 스마트 시계는 벌써 명품 시계 못지 않은 부의 상징으로 떠올랐다.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사회성은 없고 첨단 기술에는 천재적인 Nerd(너드)’라는 새로운 그룹이 ‘얼리어댑터’라는 단어와 함께 새로운 소비 트렌드 리더로 부상한 것이 가장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너드(Nerd)의 유래와 이미지

1990년대에 우리나라의 TV에서도 수입 방영됐던 미국 학원 시트콤 ‘베이사이드의 얄개들(Saved by the Bell)’은 당시 미국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의 가장 재미있는 캐릭터는 수학, 공학, 과학에는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지만 사회성이 너무 없고 패션 감각 제로인 ‘스크리치’였다. 스크리치는 매일 집에 틀어 박혀 과학 키트를 조립하거나 기발한 발명품을 만드는 것을 즐기면서 혼자 놀았다. 학교에 가서 그가 보여주는 수학이나 과학 실력은 담당 교사들이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대단했지만 친구들과 어울릴 줄 모르고, 운동은 전혀 못하며, 여자 친구가 마음에 들어 할 만한 말은 더더욱 못했다. 좋은 대학 입학에 ‘올인’해서 철저히 학점 관리를 하면서도 선생님 말씀에 순종하고 동시에 인기도 많은 금발머리 모범 여학생 ‘제시카’ 캐릭터와 정반대되는 인물이었다. 스크리치는 운동을 너무 못했다. 체육시간에 팔굽혀 펴기를 한 개도 못해 학우들에게 무시당하고 매를 맞기 일쑤였다. 좋아하는 여학생이 있어도 그 여학생이 기분 나빠할 말만 골라서 해 번번이 거절을 당하기도 했다. 게다가 다른 학생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옷차림과 번개 맞은 것 같은 독특한 헤어 스타일로 등교해 항상 놀림거리가 되거나 ‘왕따’를 당했다. 이 드라마에 등장한 스크리치 캐릭터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미국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새로운 청소년 또래 집단 중 하나인 너드(Nerd) 또는 긱(Geek)을 상징했다.

1969년 7월 미국의 우주선 아폴로 11호가 달 착륙에 성공하자 미국 정부는 범국가적으로 청소년 과학 기술 교육에 주력했다. 유명 과학자들이 시골 학교까지 파견돼 현지 학생들에게 신기한 모형 로켓을 직접 보여주고 과학 원리를 설명하거나, 각종 과학 실험을 직접 해보도록 도와주면서 미국의 모든 어린이들의 과학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당시는 냉전시대로 특히 신무기 개발과 관련 있는 우주항공 분야와 그 기반인 천체물리학 분야 연구가 장려됐다. 이 시기에 우주의 신비를 과학적으로 밝힌 책 <코스모스>를 출간한 저자 칼 세이건(Carl Sagan)은 저술활동뿐만 아니라 우주의 신비를 영상으로 보여주는 멋진 다큐멘터리, 과학 문외한들과 어린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텔레비전 강연쇼, 다양한 TV 프로그램 등을 통해 미국의 과학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그 영향으로 칼 세이건처럼 과학자가 되고 싶은 학생들이 늘었고 그들이 자라 지금의 얼리어댑터들이 됐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과학에만 푹 빠져 사는 학생들은 다른 이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며 따돌림과 놀림을 당하곤 했다.

하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과학에만 푹 빠져 사는 학생들은 다른 이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며 따돌림과 놀림을 당하곤 했다. 미국은 개척자의 나라답게 전통적으로 운동 잘하고, 성격 활달하고, 공격적인 남자들을 선호해 왔다. 학교에서도 운동 잘하고 잘 노는 학생들이 공부만 잘하는 애들보다 인기가 많았다. 종일 혼자 집에 틀어 박혀 책 읽고 엉뚱한 과학실험이나 즐기는 약골들은 학교에서 소외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잘나가는’ 친구들이 즐겨 화제에 올리는 스포츠, 연예인 얘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서로 대화가 안 통하기도 했다.하지만 점차 과학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늘어났고, 비슷한 성향의 아이들끼리 뭉쳐 새로운 문화가 형성된다.

그들이 바로 너드(혹은 긱)들이다. 이들은 중고등학교 때부터 높은 수학적 사고를 요구하는 ‘던전앤 드래곤’이라는 보드게임을 즐겼다. 자신들이 발명하는 기술로 바뀔 미래 세계를 상상하게 해주는 공상 과학물을 즐겨 봤다. 인간이 광속의 우주선을 만들어 타고 우주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세상을 그린 <스타트랙> 시리즈가 나오자 열광했다. 인간의 상상력을 제한 받지 않고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코믹북(만화책)에도 관심이 많아 마블(Marvel)의 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등교했다가 어린아이라며 놀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너드들에게 고전은 유럽 문학이 아니라 알더스 헉슬리나 아더 C 클락 같은 작가들의 공상 과학물이었고, 클래식 영화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류였다. 수준 높은 과학을 이해할 수 있는 너드(혹은 긱)들만이 이 영화의 엔딩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는 말도 있다. 이들은 일본 문화를 동경했고 스포츠에는 관심이 없지만 경쟁심은 높아 해커 문화를 만들어 다른 사람의 컴퓨터 보안 시스템을 해킹하고, 그것을 막기 위한 프로그램을 짜며 과학적 능력을 겨루는 경쟁을 즐겼다.

하지만 과학에 대체로 무관심하던 미국 여학생들은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 사는 남학생들인 긱(혹은 너드)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운동도 못하고, 몸에 근육도 없으며, 말솜씨도 한참 떨어지니 여학생들이 좋아하기는 힘들었다. 오죽하면 어떤 사람의 취향에 대해 ‘Nerdy(너디)’라는 말하는 것은 ‘전혀 섹시하지 않는 4차원이다’라는 의미의 욕이었을까. 그런데 너드들이 많아지면서 이들이 학교에서 당한 설움과 아픔들이 할리우드 영화의 단골 소재가 됐다. 오늘날 ‘Revenge of the Nerds’ 나 ‘National Lampoon’ 시리즈 같은 미국 학원물을 즐겨 보는 사람들은 당시 미국의 주류 학생들이 너드들을 대하는 잔혹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너드, 놀림의 대상에서 시대의 선도자로

시간이 흐르면서 너드들의 위상이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전유물이자 장난감이던 개인용 컴퓨터(PC)가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집과 사무실에서 사용되는 중요한 기계가 되면서부터일 것이다. 이때부터 너드들이 어릴 때부터 해커 커뮤니티에서 갈고 닦은 코딩 기술이 지구에서 가장 큰돈을 만드는 신생 사업의 핵심 노하우가 된다. 라이코스, 웹 크롤러, AOL 같은 인터넷이나 컴퓨터 소프트웨어 관련 기업들은 나타나더니 금세 상장하거나 대기업에 수조 원에 팔렸다. 두꺼운 안경을 끼고 이상한 옷을 걸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던 너드들이 미디어 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고등학교에서 왕따나 당하던 너드들은 이제 MIT나 Cal Tech 같은 세계적인 수준의 과학 대학에 입학하더니 졸업 전에 수억대 연봉을 받는 섹시하고 부러운 젊은이들이 돼 나타났다. 이들 중 일부는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제리 양, 마크 저커버그처럼 정체의 늪에 빠졌던 미국 경제를 구하고 다시 미국을 세계 최고의 반열에 세워준 위대한 영웅으로 포장되기도 했다.

필자가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1995∼1999년 무렵부터 너드들은 이상한 (weird) 것이 아니라 너무 비범하고 똑똑해서 일반인들과 섞이기 어려운 천재들이라는 인식의 싹이 트고 있었다. 이미 이 시기에 인터넷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사회는 이들을 Dot-Com Millionaire(닷컴 백만장자)라고 불렀다. 남들이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고생을 해도 평범한 중산층의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 데 비해 이들은 카페에서 ‘라테’ 한 잔 시켜 놓고 여유 있게 들이키면서 노트북으로 코드 몇 줄을 써서 큰돈을 벌었고, 여유와 성공 둘 다 누리는 인터넷 백만장자가 됐다. 당연히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전까지 미국에서 말끔한 양복을 차려 입고 금발머리의 아름다운 아내와 똘똘하게 생긴 두 자녀의 인사를 받으며 출근하는 성공한 남자의 상징을 찍어 누르고 새로운 아메리칸 드림의 표상으로 떠올랐다.

마크 저커버그는 항상 똑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 인터뷰에서 그 이유를 밝혔다. 두뇌 과학에서 인간이 하루에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건 수가 정해져 있다는 점을 밝혀냈기 때문에 옷을 바꿔 입으려는 결정을 줄여 업무에 투자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저커버그의 이와 같은 합리적인 사고방식에 박수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사실 저커버그의 이 말은 대단히 참신한 발언은 아니다. 필자가 미국에서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학교에서 ‘긱’이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하던 말과 비슷하다. 그땐 비웃음의 대상인 말이었지만 지금은 박수를 받으니 말 그대로 격세지감이다.

기술이 세상을 지배하는 2015년에는 세상이 또 변했다. 너드 같은 여성이 섹시하다는 의미의 ‘Geek is Chic’이라는 표현도 생겼다. 컴퓨터 게임 잘하는 여성이 ‘섹시녀’의 상징이 됐다. 텔레비전 쇼에서도 너드를 표현하는 방법이 이렇게 달라진 것이다. 1990년대의 미국 TV 쇼 ‘Family Matters’에는 두꺼운 안경을 끼고 이상한 콧소리로 말하며 몸치, 길치, 박치, 음치인 너드 캐릭터가 나와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줬지만 2010년대 미국 TV 쇼 ‘빅뱅이론’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소 애매하지만 지혜가 섞인 냉소적인 말을 내뱉는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그녀는 섹시하다는 평을 받는다. 이 두 캐릭터를 비교해보면 시간에 따라 너드 혹은 긱의 이미지가 얼마나 크게 달라졌는지를 금세 알 수 있다. 공상과학 영화에서만 보던 일들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늘면서 너드와 긱을 두고 사람들은 더 이상 과학만 좋아하는 사람을 특이하다거나 별난 취미를 가진 바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남이 볼 줄 모르는 미래를 볼 줄 아는 선구자다. 이런 트렌드 변화에 따라 할리우드는 과학 영화 ‘Matrix’ 시리즈부터 ‘인터스텔라’ ‘마션’으로 이어지는 과학 영화로 범지구적 흥행을 거두고 있다. 예전에는 놀림감이던 너드들이 성인이 되고 성공의 표상으로 부각되면서 이들은 엄청난 구매력을 갖게 됐다. 그로 인해 이들을 위한 전자 게임, 코믹물 시장이 전 세계적으로 수십조 규모를 자랑하게 됐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Guardians of Galaxy)라는 마블 코믹 시리즈는 영화로 만들어져 세계적으로 7억7200만 달러의 티켓 매출을 기록했고, 너드 문화의 상징이던 트랜스포머(Transformer : Age of Extinction) 한 편은 10억 달러 매출을 뛰어넘었다. 너드 문화가 주류를 장악하면서 X-Men, 캡틴 아메리카, 혹성탈출 시리즈 같은 너드 문화의 전유물이 세계적인 문화상품으로 재포장돼 호황을 누리고 있다. 미국의 만화유통사인 다이아몬드 코믹스는 2012년에서 2013년 사이에 매출이 9% 신장해 5억1760만 달러에 이르렀다고 발표했다. 너드 문화의 원형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글로벌 문화시장에 끼어들기가 곤란할 정도가 된 셈이다.

결론

2015년 11월,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의 자매지인 >에는 긱처럼 옷을 입고 싶어 하는 패셔니스타의 비애를 그린 해학적인 기사가 실려 주목을 받았다.

간단한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긱 스타일이 세상을 이끌고 있다는 소문을 접한 한 여성이 1980년대의 긱들의 상징인 치아 보정기와 알이 두껍고 테가 큰 안경을 낀 뒤 유행 지난 교복 비슷한 옷차림으로 외출을 한다. 그녀는 긱 스타일 패션 덕분에 멋진 IT 업계의 남자를 만난다. 그러나 그 남자가 스타워즈와 과학을 다룬 코믹을 주제로 대화를 하자 너무 난해해서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무식하다는 데 대한 심한 수치심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 ‘어쩔 수 없이 다시 스키니진으로 갈아입는다’는 것으로 이 풍자 기사는 끝난다.

아마 ‘명품 시계의 품위’가 절대로 애플워치에 자리를 내주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 치던 사람들도 ‘Geek is Chic’이라는 지금의 트렌드를 사전에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1980년대나 1990년대 자신들 고등학교 시절의 ‘왕따’ 모습만으로 너드들을 기억하며 스마트 워치를 차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Nerdy!’라고 외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드들은 새로운 소비 트렌드의 리더로 부상한 이후로 자신들을 흉내내고 싶어 하는, 즉 ‘워너비’ 그룹들을 끌고 다닌다. 바로 우리가 ‘얼리어댑터’라고 부르는 새로운 그룹이다.

그렇다면 긱과 너드 문화의 부상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첫째, 트렌드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꼭 SNS 팔로어가 많은 재벌 2세나 연예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이들은 트렌드 메이커라기보다는 게이트키퍼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지금도 ‘트렌드’나 ‘라이프 스타일’ 같은 단어에서 완벽하게 포장된 세련된 모습을 연상한다. 특히 유행을 선도하는 세련된 연예인이나 패션 모델, 또는 미국 사교계의 가십에 오르내리는 유명 재벌 2세들의 생활 모습을 연상한다. 그래서 많은 패션 회사들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SNS를 통해 여러 가지 분석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진짜 새로운 트렌드의 원형들이 끓어 오르는 실험실은 할리우드, 실리콘밸리, 메디슨 에비뉴처럼 일반인들이 동경하는 그런 곳이 아니다. 오히려 평범한 고등학교 교실이다. 왜냐하면 혜성처럼 나타나는 새로운 트렌드 리더 그룹도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소비 문화를 주도하는 너드 혹은 긱들처럼 학창 시절부터 그 형체를 만들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둘째, 주류 ‘인문학’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출을 많이 하는 기업가들은 소비자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서구 인문학을 배워왔다. 하지만 각 트렌드 리더 그룹은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며,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 철학의 기반이 되는 인문학은 취향 그룹에 따라 다르다. 너드들에게는 ‘스페이스 오디세이’나 ‘스타트랙’ 같은 그들만의 고전이 있고, REM이나 Kiss 같은 그들만의 클래식이 있다. ‘미국 문화’ ‘유럽 문화’ 같은 막연한 캔버스로 이해할 수 없다.

셋째, 우리는 새로운 트렌드 리더들이 부상할 때마다 그들의 사고방식과 삶의 스타일의 기본이 된 문화 상품을 꾸준히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10년 전만 해도 코믹스나, 일렉트로 음악, SF 판타지 같은 것은 ‘니치’ 시장 전략을 추구하는 기업만 관심을 가지는 비주류였다. 하지만 오늘은 이런 문화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롤모델이고, 그들의 문화 생활이 세련됨의 기준을 좌우한다. 다음 트렌드 리더들 역시, 또 전혀 다른 음악, 문학, 문화적 취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트렌드 리더가 바뀔 때마다 ‘주류 취향’은 180도 바뀔 수 있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트렌드 리더를 포착하고 그들이 만들어낸 문화 환경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기업은 글로벌 마케팅에 성공할 확률을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조승연 문화전략가 scho@gurupartners.kr

필자는 고교 시절 미국 ‘전국라틴어경시대회’에서 우수상(Magna Cum Laude)을 받았으며 미국 고등학생 문예지에 시와 단편소설을 싣기도 했다. 뉴욕대 스턴 경영대학원(NYU Stern School)을 졸업한 뒤 프랑스 최고 미술사 학교인 에콜 드 루브르에서 2년간 수학했다. 영국계 컨설팅회사 UnfrZenMind에서 외부 상임이사를 지냈으며 한국무역협회 등에서 주관한 국제 마케팅 리서치에 참여했다. <피리 부는 마케터> <이야기 인문학> <비즈니스 인문학>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