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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정조를 통해 본 리더십

영조와 상극인 어사 박문수 독설 퍼붓고도 총애 받았다

노혜경 | 163호 (2014년 10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HR, 인문학

영조와 박문수의 관계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불가사의한 관계였다. 영조는 결코 호락호락하거나 관용적인 왕이 아니었다. 그런 영조에게 박문수는 독설에 가까운 직언은 물론 거침없는 막말도 서슴지 않고 해댔다. 그런데도 영조는 박문수를 총애했다. 영조가 박문수를 귀히 여긴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박문수의 성품이 영조와 상극이었기 때문이다. 영조는 자신과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박문수야말로 진정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아줄 수 있는 참모라고 생각했다. 오늘날보검의 손잡이역할을 할 참모를 찾고자 하는 리더들이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대목이다.  

 

편집자주

영조와 정조가 다스리던 18세기는 조선 중흥의 시대라 불립니다. 하지만 이런 타이틀은 결코 쉽게 얻어진 게 아닙니다. 노론과 소론 간 권력 투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에 즉위한 두 왕은 군왕의 소임이란 특정 당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도탄에 빠져 있는 조선과 백성을 위해 있는 자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당시로선 너무나 혁명적인 선언인 탓에 수많은 방해와 반대에 직면했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들의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지혜와 용기, 끈기로 무장해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어 낸 두 임금, 영조와 정조의 기록을 통해 진정한 리더의 자질에 대한 통찰을 얻어 가시기 바랍니다.

 

어사 박문수는암행어사 출두야!” 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다. 암행어사의 이미지는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탐관오리를 처벌해 약한 자를 돕고 억울한 사람을 구해주는, 한마디로조선시대판 슈퍼 히어로. 변장을 하고 보통 사람처럼 지내다가 갑자기 히어로로 변신하는 점도 비슷하다.

 

역사 속 실존인물인 박문수는 사실 암행어사를 한 적이 없다. 다만 영남안집어사, 영남감진어사, 북도진휼사, 관동영남균세사 등 일반어사 임무를 띠고 파견된 적은 있다. 일반어사의 임무는 암행어사의 임무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탐관오리를 조사하고 처벌하는 게 아니라 국왕이 지정한 임무를 시행하는 것인데, 거의 흉년이 들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는 것을 감독하는 임무였다.

 

암행어사 박문수의 이야기는 일제 때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소설에서 유래됐다. 저자는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작자미상의 저자는 왜 자신의 작품의 히어로로 암행어사를 한 적도 없는 박문수를 선택했을까? 이름 모를 저자는 역사에 대해, 혹은 박문수에 대해 상당한 지식이 있었던 것 같다. 박문수는 암행어사 경력은 없었지만, 슈퍼 암행어사에게 꼭 필요한 특별한 자질과 성격을 소유하고 있었다.

 

직언을 넘어 독설도 서슴지 않았던 박문수

박문수는 영조 때의 인물이다. 영조가 왕세제로 책봉됐을 때 세자시강원 설서로 임명되면서 영조를 보필하게 됐다. 세자시강원은 세자를 교육하는 기관이고, 설서는 세자의 교육과 관리를 담당하는 가정교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박문수는 당시 보통의 관료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아주 특별한 개성과 성격의 소유자였다. 일단 겁이 없고 당당했다. 왕명도 틀렸다고 여러 번 거부하다가자신은 길들일 수 없는 산짐승과 같다라고 말하며 사직서를 내고 낙향하기도 했고 파직된 적도 있다. 영조가 박문수의 고집을 꺾는 데 실패하자경의 고집은 정말 큰 병이다라고 탄식했다는 일화도 있다. 한번은 박문수가 고집을 꺾자경도 고집을 꺾을 때가 있는가?”라고 말하며 영조가 말렸다고 한다.

 

말하는 태도도 거침이 없었다. 영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도 영조 앞에서 고개를 쳐들고 말하는 유일한 신하였다. 원래 조선은 왕을 하늘처럼 받드는 나라였다. 신하가 왕 앞에서 얘기할 때에는 왕을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얼굴을 땅에 대고 얘기했다. 심지어 왕을 가르치는 경연 자리에서도 코를 마루에 대고 사서삼경을 강론해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 박문수는 영조 앞에서 꼿꼿하게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고개를 쳐드는 정도가 아니었다. 요즘도 높은 분들 앞에서 이야기할 때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박문수는 왕에게 말할 때도이건 경종과 전하가 당파 사람들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꼴입니다” “대신이 무식해서 그렇습니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거침이 없었다. 사관이 말을 기록하고 있는 상황에서 왕이 손바닥 안에서 놀아났다거나 누가 무식하다는 표현은 조선시대에 탄핵감이었다. 실제로 탄핵도 여러 번 당했다. 이 정도가 아니었다. 영조에게 듣기 싫은 소리도 마구 했고 농담에 우스갯소리까지 겁 없이 해댔다. 심지어 영조와 서로 상기된 얼굴빛으로 목소리를 높여가며 언쟁을 벌이거나 비아냥거리기까지 하는 막장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국왕과 신하의 대화 장면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박문수를 보며 주변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영조는 결코 호락호락하거나 관용적인 왕이 아니었다. 영조가 탕평군주로 알려져 있고 조선시대의 명군 중의 한 명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영조는 당연히 인자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조는 예의범절을 굉장히 따졌던 인물이며 의식이 조금만 틀리거나 자세가 조금만 잘못된 것을 발견하면 즉시 처벌하고 심지어 파면하기도 했다. 대화에도 상당히 예민했다. 머리가 비상해서 사소한 말에도 트집을 잡아 신하들을 처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영조에게 박문수가 거침없이 말을 해대자 다른 사람들이 박문수를 보고 미쳤다고까지 했다. 박문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른 관료들과 논쟁을 벌일 때도 왕이 보는 앞에서 언성을 높였고 삿대질까지 하고 흥분하며 거친 말도 쏟아냈다.

 

영조에게 평생의 숙원사업은 탕평책이었다. 탕평의 방법은 관직마다 당파를 골고루 분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사를 할 때 지역, 학맥, 당파 이런 것들을 완벽하게 분배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뭔가 편중된 인사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약간의 불균형을 발견하기만 해도 박문수는이것은 가짜 탕평이다라며 영조에게 쏘아대곤 했다.

 

영조는 박문수를보검(寶劍)의 손잡이라고 평가했다. 여기서 보검은 영조 자신을 가리킨다. 보검이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즉 국왕이 올바른 정책을 시행하고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박문수가 꼭 필요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어쨌든 박문수는 영조의 세자 시절 스승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특별대우를 받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과거의 은사라고 해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바로 자신의 정책에 반기를 드는 경우다. 최고지도자에게 정책이란 자신의 자부심이자 권위 그 자체다. 군주가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자신의 평생 숙원사업이라고 간주하는 정책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자신의 심복, 최측근이 이런 정책에 반대할 때는 다른 사람이 반대하는 것보다 더욱 치명적이 된다. 그래서 권력자와 가깝고 최측근 인사일수록 영조의 탕평책과 같은 정책에 간언이나 충고를 하기가 더욱 힘들다. 자칫 군주가 더 크게 분노하고 실망하기도 쉽기 때문이다.

 

영조의 입장에서는 탕평책에 관해 세자 시절부터 자신을 알아온 박문수에게 위로와 지원을 받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것이다. 실제로 처음에 영조를 지지했던 세력은 노론이었고, 박문수는 장희빈의 아들 경종을 지지했던 소론이었기 때문에 그가 탕평책을 지지하고 소론을 설득하면 영조는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박문수는 영조를 지원하기는커녕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탕평책을 둘러싸고 사색당파가 너무 격렬하게 대립했기 때문에 영조는 마음고생도 많이 했다. 요즘도 정치인의 말 한마디를 꼬투리 잡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영조 때도 정치판이 살얼음판이다 보니 말 한마디에 예민했다. 심지어 국왕인 영조가 무슨 말을 해도 모두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곡해하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마음의 상처를 받곤 했던 영조는 어느 날 박문수에게 이런 넋두리를 했다. “나는 조선 삼백 년 종사가 내 한 몸에 달렸음을 알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렇기에창업은 쉽고, 수성은 어렵다는 명언을 늘 가슴깊이 새기고 사력을 다하고 있다.” 그러자 이 야박한 박문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하께서 손대고 있는 것은 뜻을 세우고 인재를 등용하며 재물을 절약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탕평이란 이름만 있을 뿐 실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약간의 격려 비슷한 말이라고 이렇게 덧붙였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만 목표한 수준으로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영조가막말 대신박문수를 총애했던 이유

이렇게 거침없이 막나갔던 박문수였지만 영조는 박문수를 대단히 총애했다. 다른 관료들이 영조에게 달려와 박문수의 태도를 비난하며 처벌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해도 영조는 그저 알았다고 하고는 그냥 넘기기 일쑤였다. 영조와 박문수의 관계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버릇없고 불가사의한 관계였다. 그러면 도대체 영조는 박문수를 왜 이렇게 아끼고 파격적인 대우를 했던 것일까?

 

영조는 박문수를 왕세제 때부터 가까이 두기 시작했다. 소론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1728년 이인좌의 난을 적극 진압했고, 이 덕분에 분무공신 2등으로 영성군에 봉해졌다. 그러나 단지 이런 관계 때문에 박문수를 총애한 것은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박문수가 영조에게 대단히 유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박문수의 그 버릇없는 태도가 영조에게 아주 유용한 것이었다.

 

영조는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고 머리가 대단히 좋은 왕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이것이 단점으로 작용했다. 너무 많이 생각하고, 앞으로 전개될 일에 대해 몇 단계를 앞서 그려보고 대처하려 해서 너무 복잡했다. 반면 박문수의 성격은 직선적이었고 거슬리는 상대방의 행동에 대해 거침없이 지적하는 타입이었다. 영조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고 답답해서 미치겠다고 할 정도였고, 영조에게 바로 달려와 영조의 단점을 직설적으로 지적했다. “전하는 너무 영리하고 총명해서 때때로 작은 일에 빠져 큰 줄거리를 잃어버립니다라고 했다. 때로는 울면서 영조에게 간언하기도 했다.

 

1744 6, 선전관들이 자신들과 같은 당색의 사람을 뽑기 위해 신임 무관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평소에 영조는 탕평에 대해 늘 경계를 풀지 않고 무관들에 대해서도 당론을 주장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그런데 이런 무관들이 새로 관리를 뽑는 자리에서 편당을 짓는 행위를 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영조가 건강이 좋지 않아 정국이 편치 못했던 시점에 선전관들이 남산에 모여 술판을 벌이고 활쏘기행사를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영조는 문관들이 당론을 주장하는 것을 본받아 무관들이 편당을 지었다고 노발대발하면서 여기에 가담한 무신들 16명을 모조리 궐문 밖에 매달겠다고 했다.

 

이 사건은 대왕대비의 만류로 이들을 유배 보내는 선에서 간신히 마무리됐다. 주위 여러 신하들은 영조의 과도한 제스처의 의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나서서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박문수는 이런 영조의 처분이 지나쳤을 뿐만 아니라, 만약 16명을 효시했다면 지나친 처벌인 것은 분명하지만 오히려 기강을 세울 수는 있었을 것이라며 영조가 판결을 번복하는 바람에 권위는 더 실추됐다고 질타했다. 그리고 박문수는 영조의 가장 나쁜 단점을 지적했다. “선전관을 처치하는 일 따위는 무관 책임자에게 맡기면 될 것을 그렇게 사소한 일까지 전하께서 관여하시면 실무자는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면류관(관 아래로 구슬을 늘어뜨린 관)이 왜 국왕의 관이 된 줄 아십니까? 관에서 늘어뜨린 구슬은 군주가 귀를 가리라는, 즉 사소한 일에는 못 들은 척하고 넘어가라는 의미입니다.”

 

박문수는 영조의 이 치명적인 단점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눈물까지 흘리면서 이 말을 했다. 이에 영조는 당론을 증오하는 마음이 늘 가슴속에 가득 차 있어 지나쳤던 것 같다고 하며 뉘우치는 뜻을 계속해서 내비쳤다고 한다.

 

‘보검(寶劍)의 손잡이역할을 할 참모에게 필요한 자질

뛰어난 리더일수록 자기 함정에 빠지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그 사람에 필적할 만한 상대가 없어서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결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잘못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가 바로참모. 특히 직언을 하는 참모가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에 바로 함정이 숨어 있다. 대부분 리더는듣기 싫은 소리를 들어야 한다’ ‘직언을 하는 사람이 훌륭한 참모다라는 상식 정도는 알고 있다. 실제로 직언 잘하는 참모를 뽑기도 한다. 하지만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리더가 자기 함정에 빠지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나는 것일까?

 

참모를 선정하는 기준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자신이 뽑은 참모가 직언을 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대부분의 리더는 본능적으로 자기와 성향이 비슷한 참모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와 성향이 비슷한 참모로부터 나오는 이견은 나와 생각이 다르다 하더라도 진정한 반대 의견이 아니다. 오히려 리더의 마음속에 있는 불안한 생각 중 하나일 뿐이다. 그렇게 리더와 참모는 한 배에 탄 공동 운명체가 된다. 때로는 한 배를 같이 타고 사이좋게 노 저으며 가다가 함께 침몰하기도 한다.

 

참모진을 구성할 때 두 가지 케이스가 있다. 리더가 직접 참모를 뽑는 경우와 혹은 어떤 다른 사정에 의해서 이미 구성된 참모진을 받아들이는 경우다. 대부분의 경우 리더가 심혈을 기울여 구성한 참모진이 그 역할에 충실하다고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그 이유는 리더가 직접 참모진을 구성할 경우 성향이 같은 사람들로 채워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영조는 박문수를보검(寶劍)의 손잡이라고 평가했다. 여기서 보검은 영조 자신을 가리킨다. 보검이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즉 국왕이 올바른 정책을 시행하고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박문수가 꼭 필요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영조가 이처럼 박문수를 귀하게 여긴 이유는 박문수가 영조를 보고 안타깝고 답답해서 미치겠다고 할 정도로 성품 자체가 영조와 상극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영조를 위대한 왕으로 만들었고, 박문수를 신화적인 암행어사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리더의 잘못을 바로잡아줄 수 있게 직언하는 참모를 원한다면, 단순히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판단하지 말고 리더와 대립되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성품, 그런 성품을 지닌 인물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사람이 바로 리더인 당신에게 박문수와 같은 인재가 될 것이다.

 

노혜경 덕성여대 연구교수 hkroh68@hotmail.com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한국사학) 학위를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을 지냈고 강남대, 광운대, 충북대 강사로 활동했다. 저서로 <영조어제해제6>가 있다.

  • 노혜경 | - (현) 호서대 인문융합대학 교수
    - 강남대, 광운대, 충북대 강사
    -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 덕성여대 연구교수
    - <영조어제해제6> 저자
    hkroh6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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