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탁월한 실력의 신숙주가 ‘배신의 아이콘’이 된 이유는?

161호 (2014년 9월 Issue 2)

탁월한 실력의 신숙주가 ‘배신의 아이콘이 된 이유는?

Article at a Glance – HR, 인문학

숙주나물이 숙주나물로 불리게 된 건 잘 변하기 때문이다. 변절자 신숙주로부터 유래한 말이다. 그만큼 신숙주는 조선왕조배신의 아이콘이었다. 사람들이 배신감을 크게 느낀 건 그가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많은 비판을 받는지도 모른다. 신숙주는 문장력이 뛰어나고 유학에 능통한 것은 물론 외교와 안보, 어학능력까지 모두 갖춘 르네상스형 인간이었다. 늘 겸손함을 유지하고 1인자가 하기 곤란한 일을 처리하면서 세 명이 넘는 왕의 총애를 받았다. 2인자로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그였지만 그는직언하지 않는 참모였다. 조직의 미래를 위하는 2인자라면 신숙주의 다른 모든 면을 배우더라도직언하지 않는 점만큼은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배신의 아이콘, 신숙주

1456(세조2) 62. 명나라 사신을 환영하는 연회장에서 세조와 세자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고자 했던 사육신의 계획이 발각됐다. 이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신숙주는 깜짝 놀랐다. 안채의 문이 활짝 열려져 있고 부인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황급히 집 안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던 신숙주는 두어 자 되는 베를 손에 쥐고 홀로 다락 대들보 밑에 앉아 있는 부인을 발견했다. “부인! 어째서 그 곳에 계시오?” 하고 그가 묻자 부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평소 성삼문 등과 형제보다도 더 두터운 친교를 맺으셨기에 오늘 옥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틀림없이 당신도 함께 체포돼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죽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저도 자결하려 하던 참입니다. 그런데 당신께서 어째서 혼자 살아 돌아오신 것입니까?” 신숙주는 말문이 막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널리 알려진 이 장면은 조선 중기 <송와잡설(松窩雜說)>로부터 근대 이광수가 지은 소설 <단종애사>에 이르기까지 여러 책들에서 조금씩 다르게 변주돼 왔다. 어떤 기록에는 부인이 이러한 신숙주를 야단치고 목숨을 끊었다고 돼 있고, 또 어떤 기록에는 신숙주가자식들 때문에 죽지 못했다고 변명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런데 이 얘기는 완벽한 허구다. 신숙주의 부인은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기 전, 신숙주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당시에 병으로 죽었다. 이러한 모순 때문에 이 일화는 사육신 때의 일이 아니라 계유정난이 일어나서 김종서가 죽던 날, 혹은 단종이 퇴위하고 세조가 보위에 오르던 날에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근거를 대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잘못된 사실이 수백 년이 지나도록 진실처럼 믿어져 왔을까. 왜 백성들은 녹두나물이 잘 쉬기 때문에숙주나물이라고 부른다는 등 그를 변절의 대명사로 꼽았을까. 신숙주가 격하된 것은 무엇보다 숙종 때 단종과 사육신이 복권되고1 대의명분과 의리가 강조됐던 조선의 정신사적 흐름에 기인한다. 거기에 더해 그만큼 그가 출중한 인물이었던 것도 이유일 것이다. 흔히 실망은 기대에 비례하기 마련이다. 기대가 컸던 사람일수록 그 기대를 지키지 않았을 때 오는 실망도 커진다. 더욱이 그 사람이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실망은 쉽게 미움으로까지 변모되는데 훌륭한 자질과 역량을 잘못된 곳에 쓴 데 대한 아쉬움이 짙어지는 것이다. 정인지, 정창손, 최항 등 집현전의 다른 선배들도 같은 길을 걸었지만 유독 신숙주에게변절자라는 집중포화가 쏟아진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모든 분야에 뛰어났던 르네상스적 인간. 어학의 천재이자 외교, 안보 분야의 귀재. 탁월한 행정능력과 정무감각을 갖췄으며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았던 그가 주군의 후계자를 저버리고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지지한 것. ‘불의(不義)’한 정권에 참여해 중추로 활동한 그의 삶이 비장한 최후를 맞으며 충절의 상징으로 기억되는 벗, 성삼문과 대비되면서 사람들의 실망도 커졌을 것이다.

 

그런데 명분을 중요시하는 조선 사회에서 이러한변절자의 낙인은 치명적인 것이어야 하지만 그를 비난했던 사람들조차도 신숙주를악인(惡人)’이나간웅(奸雄)’으로 보지는 않는다. 지조가 부족한 나약한 지식인 정도로 평가한다. 이는 무엇보다 신숙주가 남긴 업적과 그의 행적 때문일 것이다. 그는 부귀와 권력을 탐한 다른 세조의 공신들과는 달리 엄격하게 자기 자신을 관리하며 맡은 바 소임에 최선을 다했다. ‘세조를 왕으로 만든 것은 한명회지만 세조를 왕답게 만든 것은 신숙주라는 세간의 평가처럼 만약 신숙주가 없었다면 14세기 후반의 조선은 지금 우리가 알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탁월했던, 너무나 탁월했던

신숙주는 1438년 세종20, 진사시에 장원하고 이어 문과에 3등으로 급제했다. 세종의 재위기간 동안에는 집현전 부수찬, 응교, 직제학을 지내는 등 주로 집현전 학사로 활동한다.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이력은 1443, 스물여섯의 나이로 서장관(書狀官)2 이 돼 일본에 다녀온 것이다. 큰 병을 앓은 직후였기 때문에 얼마든지 사양해도 괜찮을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신숙주는 기꺼이 받아들였고()를 써달라는 사람들이 몰려들어도 머뭇거림 없이 즉석에서 지어주니 모두가 탄복하는등 문명(文名)을 떨쳤다. 양국 간의 난제도 해결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귀국 후에 일본의 역사와 지리, 정세, 대일 교류의 역사, 사신 왕래 절차 등을 집약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저술한다. “국교를 맺어 서로 예방하며 풍습이 다른 나라를 어루만지고 접촉하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먼저 그 정세를 알아야 예()를 다할 수 있다3 는 취지에서 지은 이 책은 조선과 일본을 막론하고 후대에까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신숙주는 학문에 무척 뛰어났다.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을 찾은 한림학사 예겸(倪謙)으로부터굴원4 의 반열에 오를 만한 동방의 명인이다라는 칭찬을 받았고5 훈민정음 창제에도 깊이 관여한다. 음운학과 어학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 <홍무정운(洪武正韻)>의 한글주석서와 <동국정운(東國正韻)>의 책임 편찬을 맡았으며 중국어, 일본어, 몽고어, 여진어를 비롯한 각국의 언어에 능통해서 통번역도 자유자재로 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학문에 대한 열정 또한 깊어서 집현전에서 밤새 책을 읽다가 새벽닭이 울고 나서야 잠이 들곤 했는데 이를 본 세종이 자신이 입고 있던 돈피 가죽옷을 벗어 덮어주었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6

 

세종은 문종에게신숙주는 국가의 중대사를 부탁할 만한 자라며 소중히 쓸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신숙주가 문종의 치세를 여는 주역이 돼 주리라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문종은 보위에 오른 이래 계속 병마에 시달렸다. 그리고 2년 만에 승하한다. 죽기 얼마 전, 문종은 무릎에 단종을 앉힌 채 세자시절부터 절친했던 집현전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놓고 당부의 말을 남겼다. “내 이 아이를 경들에게 부탁한다.”7

 

문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단종은 불과 열두 살의 어린나이였다. 더욱이 당시 왕실에는 단종을 도와 수렴청정을 해 줄 할머니 대왕대비나 어머니 대비가 없었다. 그래서 김종서, 황보인 등 재상들이 대신 국정을 책임지고 주도하게 된다. 이 정국은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인해 끝나게 되는데 평가가 극명하게 갈라진다. 재상들이 충성을 다해 임금을 보좌하고 있었지만 왕권에 야심을 가지고 있던 수양대군이 정변을 일으킨 것이라는 평가와 재상들이 전횡을 휘두르고 국가기강이 흔들려 더는 좌시할 수 없는 상황에 빠졌으므로 수양대군이 거사를 벌였다는 평가다. 그런데 훗날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문제에 대해서는 명분과 의리에 따라 찬반 여부가 분명하게 갈리지만 이 계유정난 자체에 대해서는 다소 애매한 입장을 보인 사람도 있었다. 정난(靖難)공신 3등에 책봉된 성삼문이 대표적이다. 사육신의 일원인 박팽년, 이개, 유성원 등도 이때 요직에 오르는데 수양대군이 집현전 학자들을 포섭하기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들 또한 벼슬을 거절하거나 정난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최소한 묵인을 한 것이다. 아마도 재상들의 정치에 대해 일부분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수양대군이 왕권을 위협하지 않는다면 굳이 반대하려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신숙주도 이때 정난공신 2등에 책봉됐다. 외직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정난에 직접 참여했다는 기록도 보이지 않지만 함께 명나라 사은사로 다녀오는 등 이미 수양대군과는 깊은 교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어 그는 우승지를 거쳐 도승지가 됐고 세조 1년에는 세조 등극에 세운 공을 인정받아 좌익(佐翼) 1등 공신에 봉해진다. 이때 1등 공신이 된 사람 중 세조의 형제와 매제, 세조의 사돈 한확을 제외하면 권남, 신숙주, 한명회 세 사람이 남는다. 이 셋이 바로 세조의 핵심 측근이며 세조의 시대를 만들어간 주역들이다.

 

신숙주는 세조 2년 병조판서 겸 보문각 대제학, 고령군(高靈君)에 봉해졌고 이후 판중추원사와 우찬성, 좌찬성을 지냈다. 성균관 대사성을 겸직하며 조선의 학문과 교육을 총괄하기도 했다. 그리고 1458(세조 4) 우의정이 됐으며 이듬해 좌의정을 거쳐 세조 8년에는 신하들의 수반인 영의정에 오른다.

 

세조가 죽은 후에도 신숙주는 원상(院相)이 돼 예종의 국정을 자문했고 성종이 즉위하자 다시 영의정으로 제수돼 4년 가까이 재임했다. 이때 예조판서를 오랫동안 겸임했던 것이 특이하다. 영의정이 실무부처 장관인 판서를 겸임하는 일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찾아볼 수 없는데 외교와 학문에 관한 그의 탁월한 경륜 때문으로 생각된다. 예종이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죽어 권력의 공백이 생기고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이 진행된 이 시기에 신숙주는 굳건히 중심을 잡으며 국정을 빠르게 안정시켜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익대(翊戴) 1등 공신, 좌리(佐理) 1등 공신에 차례로 봉해지는데 총 세 번의 1등 공신, 한 번의 2등 공신에 책봉된 것이다. 이는 1등 공신에 네 번 오른 한명회와 함께 조선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경력이었다.

 

세조와의 미묘한 관계

이러한 신숙주의 화려한 이력은 세조의 전폭적인 지지 때문에 가능했다. 세조는영의정이 신숙주같이 현량(賢良)한 인재를 찾아 천거할 수 있겠는가?” “내가 신숙주의 어짊을 알아보고 뽑아 써서 이렇게 됐으니 나에게 인재를 알아보는 밝음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8 라며 공개적으로 신숙주를 인재의 대명사로 꼽았다. 또한 “(신숙주는) 단순한 서생이 아니라 지혜를 갖춘 장수이며 곧 나의 위징(魏徵)이다9 라고 말하며 이것을 실록에 기록하게 했다.10 역사에 길이 전하겠다는 것이다. ‘신숙주는 나의 위징이다는 말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실록에 등장하는데옛날 제나라 환공이 관중(管仲)에게, 한나라 고조가 장량(張良)에게, 광무제가 등우(鄧禹)에게, 촉 선주(先主: 유비)가 공명(孔明)에게, 당 태종이 위징에 대한 것과 내가 숙주에게 대하는 것이 모두 똑같다11 신숙주에 대한 깊은 신뢰와 예우를 자랑하기도 했다.

 

물론 신숙주는 이러한 평가를 받을 만한 재상이었다. 게다가 세조의 권위까지 높여줄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정통성이 부족했던 세조에게신숙주 같은 이가 지지한 사람이라면 세조도 괜찮은 임금감이 아닐까?’라는 당시 사람들의 인식은 큰 힘이 됐을 것이다. 친구들을 떠나 변절자라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자신을 도와준 그에 대한 고마움도 작용했을테고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록에 나타난 세조의 거듭된 칭찬과 선물공세는 조금은 이상해 보인다. ‘내가 이처럼 너에게 잘해주니 너는 내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압박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지나칠 정도로 호의를 베푸는 것은 보통 그 사람이 내게 절실히 필요하지만 아직 신뢰가 쌓이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모습이다.

 

게다가 세조는 보위에 오른 이후부터 의심이 많고 남을 쉽게 믿지 못했다. 이러한 모습은 비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 정통성이 부족한 리더들에게서 쉽게 찾을 수가 있다. 정통성 콤플렉스 때문에, 권력을 유지하고 자신과 같은 찬탈자가 나오는 일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재밌는 야사가 전한다. 하루는 세조가 신숙주와 한명회 두 사람과 함께 술자리를 같이했는데 세조가 장난으로 신숙주의 팔을 비틀고는 자신의 팔도 비틀어보라고 하자 술에 취한 신숙주가 너무 세게 잡아서 세조가아프다. 아프다하고 소리를 낸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날 술자리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온 한명회는 신숙주에게 사람을 보내대감은 평소 아무리 취해도 반드시 밤중에 일어나 책을 보는 버릇이 있었는데 오늘 밤에는 반드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일렀다. 신숙주는 그 말을 따랐고신숙주가 취해서 계속 자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세조는신숙주가 과연 크게 취했구나하며 안심했다고 전해진다. 신숙주가 술기운을 빙자해 자신을 능멸한 것이 아닌지 의심한 세조가 사람을 보내 신숙주를 살펴보게 했던 것이다.12

 

흔히 실망은 기대에 비례하기 마련이다. 기대가 컸던 사람일수록 그 기대를 지키지 않았을 때 오는 실망도 커진다.

 

세조가 신숙주를 완전히 믿지 않았다는 것은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을 때 단적으로 드러났다. 이시애는 반란을 일으키면서 조정에 혼란을 가져다줄 목적으로 신숙주와 한명회 등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세조 정권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 나란히 역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허위였지만 세조는 두 사람을 의심해 신숙주를 옥에 가두고 병석에 있던 한명회를 연금시켰다. 두 사람의 아들들도 모두 체포했다. 그리고 심지어는 신숙주가 차고 있던 형구를 다소 헐겁게 해 준 담당 관리를 처형하기까지 한다. 함길도 관찰사로 가 있던 신숙주의 아들 신면이 반군들에 의해 피살되고 사건의 정황이 명백하게 드러난 후에야 두 사람은 겨우 방면될 수 있었다. 멋쩍어진 세조는 두 사람에게 사과를 하면서도 한명회는 자기 마음대로 일을 처리한 적이 있고 신숙주는 왕에게 무례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죄를 물은 것이라고 변명했다. 특히 신숙주의 경우는 임금이 잘못했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옥에 가뒀다는 것인데 임금 자신의 위신을 깎아내리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직언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펼치는 재주

이런 군주 밑에서 신숙주의 행동은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선비의 의무라고 할 수 있는직언을 꺼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신도비문을 보면차분하고 침착해 승순(承順: 윗사람의 명을 순순히 좇음)하고중략한 번도 직언(直言)을 팔아서 자기 이름을 높이려 하지 아니하니 세조가 더욱 중히 여겼다고 돼 있다. 직언을 잘하고 강직하다는 명성을 얻기 위해서 임금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신숙주는 그러질 않고 임금의 명을 순순히 따르며 차분하게 일처리를 잘했다는 것이다. 좋은 이야기 같지만 결국 임금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시키는 대로만 행동했다는 의미로도 읽혀진다.13

 

또한 그는 자신의 학문을 자랑하지 않았다. 상소를 올리고 임금 앞에서 발언할 때 경전이나 역사를 인용하는 것은 당시의 일상적인 모습이었지만 신숙주는 그러지 않고 오직 정책적인 본론만 이야기하곤 했다. 한번은 세조가 문건을 주고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라고 하자 그는 침묵했다. 그러자 세조는()자가 잘못됐는데 어찌 경은 알지 못하냐며 벌주를 내렸다고 한다. 세조가 머리를 써서 신숙주를 골탕 먹였을 때도 그는 속아 넘어갔다. 이에 세조는지혜로운 자가 천 번 생각하더라도 반드시 한 번 실수는 있는 법이다. 경이 지금 나에게 속았다고 말하며 즐거워한다.14 추측이지만 신숙주는 아마도 글의 잘못된 부분을 알고 있었고 세조가 그를 속이려고 한다는 것도 눈치 챘을 것이다. 하지만 모른척함으로써 세조가 자신보다 뛰어난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준 것이다. 특히나 세조는 자신의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고 과시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이러한 그의 처신은 매우 현명한 것이었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자연스럽게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일부로 능력을 표출함으로써 주군의 질투를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다.

 

이와 함께 신숙주는 대체가 불가능한 자신만의 영역을 확고히 구축했다. 바로 외교와 안보 분야다. 세종 때 일본을 방문하고 김종서의 휘하에서 북방 개척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이 분야의 전문가로 자리매김했다. 문형(文衡)을 맡을 정도의 학문과 문장 실력, 중국과 일본에 널리 알려진 명성, 오랜 기간 예조에 근무하며 익힌 외교력, 이웃 국가의 언어에 모두 능통했던 어학 실력도 중요한 요소가 됐을 것이다. 그는 세조 즉위 후에는 평안도 도체찰사와 함경도 도체찰사를 역임하며 북방의 안보를 확립하는 데 이바지했으며 탁월한 전략과 지휘로 세조 6년에는 야인정벌의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세조는 외교 안보와 관련된 사안은 반드시 신숙주와 논의하고 결정했는데 중국 사신이 오는 일로 함길도 도체찰사로 근무하고 있던 신숙주를 급히 상경시키고15 충청도에 파견돼 있던 그를지금 사은사 이극감이 가지고 갈 문서를 경과 더불어 완성하려고 하니 배를 타고 급히 올라오라고 지시한 적도 있다.16 이는 비단 세조 때뿐만이 아니었다. 성종 조에 영의정을 지내고 은퇴해서까지도 관련된 일들은 반드시 그의 자문을 받을 정도였다. 무릇 진정한 힘의 크기는 자신이 얼마나 필요한 사람이냐에 따라 좌우된다. 신숙주는 다른 사람이 결코 대체할 수 없는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이것이 세조와 같은 의심 많은 군주를 비롯해서 임금들이 하나같이 신숙주를 예우하고 곁에 뒀던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아울러 신숙주는 임금이 부담스러워하는 일들을 대신 떠안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권위를 가지고 공동체를 이끌어야 할 리더가 도덕적인 비난이나 정치적인 부담을 사게 되면 리더십을 온전히 발휘할 수가 없다. 물론 피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피하겠지만 그런 일들이 때론 필요하고 부득이하게 벌어지는 것도 현실이다. 따라서 참모, 특히 2인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그 짐을 나누거나 대신 책임을 짊어져 줌으로써 리더의 권위를 지켜줄 필요가 있다.신숙주는 순흥부에 안치돼 있던 금성대군이 영월로 유배 간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역모를 일으키자 금성대군과 노산군(단종)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주청했다. 이때 실록을 보면어전회의를 마치고 모든 대신들이 밖으로 나갔는데 좌찬성 신숙주가 홀로 남아서이유(李瑜: 금성대군)는 명백한 대역(大逆)을 범했으니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또한 지난해 이개(李塏) 등이 노산군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거사하려 하였는데(사육신 사건), 이제 유()도 노산군을 끼고 난역(亂逆)을 일으키려 했으니 노산군도 역시 편히 살게 해서는 안 됩니다고 아뢰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7 세종과 문종의 정통성을 이었고 존재 자체가 자신의 왕권에 위협이 되는 단종을 세조도 내심 제거하고 싶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것도 모자라 죽이기까지 했다는 오명을 얻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에 신숙주가 총대를 멨고 이어 대신들이 함께 요청함으로써 세조는 외형적으로나마 직접 나서서 지시했다는 비난은 받지 않게 됐다.

 

신숙주는 다른 사람이 결코 대체할 수 없는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이것이 세조와 같은 의심 많은 군주를 비롯해서 임금들이 하나같이 신숙주를 예우하고 곁에 뒀던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는 공신들에 대한 군기반장 노릇도 했다. 세조가 세 번이나 공신을 책봉하면서 세조의 시대는 공신들로 넘쳐났다.18 세조는 공신을 각별히 우대했는데 그러다 보니 재산 축적에 혈안이 됐던 정인지와 황수신, 사람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던 홍윤성 등 공신들이 온갖 비리와 부패의 온상이 됐고 전횡을 부리며 잡음을 일으켰지만 세조는 이를 묵인했다. 공신들이 반발할 경우 자칫 정통성이 부족한 자신의 정권도 흔들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숙주는 홍윤성의 죄를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진언하는 등 공신이 과오를 저지를 때마다 이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한명회와 더불어 세조의 핵심참모이자 신숙주 자신이 공신 중 최고 서열에 있는 등 정치적 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다른 공신들의 협공을 받을 수 있는 위험한 행동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신숙주는 주저하지 않았고 세조는 공신의 잘못을 용서하면서도 이러한 신숙주의 비판을 적절히 활용하며 이들을 견제할 수 있었다.

 

신숙주는 이러한 처신 속에서 자신이 꿈꿨던 개혁과제들을 실천해 갔다. 그는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은 것은 인()이요, 법을 어기지 않는 것은 의(), 태만하지 않는 것은 근()이요, 과감한 것은 민()이다. 인의를 지키고 근민하게 행동하면 장차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19 라며 아직 완전히 구축되지 못한 조선의 법과 제도의 빈틈을 보완하고 시행규칙들을 정비했다. 그는 시스템의 개선을 통해불확실성을 제거함으로써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경세이론과 제안들은개선을 통한 완성에 맞춰져 있었는데 그 개선은 시스템 도입의 취지를 성찰해 근본적인 문제를 바로잡는 것으로 이뤄진다. 화폐개혁과 관해화폐가 널리 사용되게 하기 위해서는 그 근본을 연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백성들만 번거롭게 만드는 법이 될 뿐입니다라며무엇보다 백성들의자발적인의지에 따라 시장이 열리게 해야 물산의 유통이 증가하고 화폐도 활발하게 통용될 수 있다고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렇다면 신숙주는 단종 밑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쳐 보일 수는 없었을까? 이후 신숙주의 행적으로 볼 때 그가 세조를 선택한 것이 권력이나 부귀를 탐해서가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왕조의 기틀이 완성되지 않은 그때, 조선의 미래를 이끌어갈 임금으로서 단종보다는 세조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그래서 변절자라는 비난이 쏟아질 것을 알면서도 세조를 선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선한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많은 경우 우리는 도덕적으로 의심스럽거나 위험한 수단을 택하지 않을 수 없으며 부작용이 수반될 가능성 또는 개연성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막스 베버의 말처럼 말이다.20

 

신숙주가 현대 조직의 2인자에게 주는 교훈과 시사점

이렇게 신숙주의 선택을 이해하고 나면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는 그 자체로 탁월한 2인자였다고 볼 수 있다. 2인자는 조직에 리더 다음 가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영향력은 단순히 두 번째로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직위 또는 직함에 따르는 공식적인 권한, 리더가 부여하는 권위, 인품, 우월한 전문성과 업무 역량, 연결권력(1인자와의 친밀도, 조직 내 실력자들과의 친분관계) 등이 종합해져서 구축된다. 신숙주가 2인자로서 확고히 자리매김한 것은 이러한 요소들을 모두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리더와 매끄러운 관계 설정을 맺음으로써 리더로부터 높은 권위를 부여받는다. 이는 실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2인자의 존재 가치는 바로 1인자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외향적인 성격인 세조에 맞춰 신숙주는 내향적인 참모의 역할을 자임했다. 심리학자 융에 따르면 사람은 자신과는 반대되는 유형을 선호한다. 물론 한쪽으로 완전히 경도되는 사람은 없다. 신숙주도 세종과 성종 시절이나, 여진을 정벌하러 나갔을 때는 적극적인 추진력과 위기돌파 능력을 보이는 등 외향적인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외향성을 가진 리더와 만나서는 내향적으로 대처함으로써 훌륭한 팀워크를 이룬 것이다. 안정적이고 용의주도하며 이성적인 신숙주의 기획능력은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세조의 외향성이 가진 단점들을 효과적으로 보완해줄 수 있었다.

 

또한 그는 항상 겸손하게 행동했다. 1인자는 대부분 권력의지와 자기 확신이 강하다. 의심도 많은 편이다. 그래서 신숙주는 자신에게 오는 스포트라이트를 모두 보스에게 돌렸으며 리더에게 부담이 가고 리더가 욕을 먹을 수 있는 일들은 자신이 나서서 처리했다. 2인자는 이미 많은 권한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1인자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더라도 1인자의 잠재적인 경쟁자로 간주되기 쉽다. 따라서 1인자가 상처받을 수 있는 일을 대신 떠안고 모든 공을 일인자에게 돌림으로써 1인자의 불안감을 해소시킨 것은 현명한 처세술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숙주는 1인자가좋아할 만한최고의 2인자 참모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1인자를 위한최고의 참모, ‘조직을 위한최선의 2인자였다고 평가하기에는 부족하다. 2인자는 1인자와 같은 시야를 가진 수석 참모로서 1인자의 지시를 이행하고 1인자를 보좌하는 일에 그치지 말고 1인자의 과오를 바로잡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줄 의무가 있다. 1인자가 판단을 그르치지 않도록 직언해야 한다. 그가 우선순위를 둬야 할 것은 리더, 즉 보스가 아니라 조직이고 1인자의 안위가 아니라 공동체의 안녕이기 때문이다. 세조가 신숙주를 비교하곤 했던 당 태종의 명재상 위징은 목숨을 걸고 당당히 그러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신숙주는 임금에게 바른 말을 하지 못한 참모였다. 그의 능력을 생각했을 때 무척 아쉬운 부분이다.물론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가가 올바른 말을 쉽게 하지 못하도록 만든 세조도 다른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역시 1인자들에게는 반면교사일 수밖에 없다.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e@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한국 철학을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를 거치며 10여 년간 한국의 정치사상과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공부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트위터에서 세종(@SejongDaeWang)과 정조(@King_Jeongjo)의 가상 계정을 운영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저서로 트위터에 게재한 내용과 주간지에 연재한 역사 칼럼세종과 정조의 대화를 보완해 엮은 <왕의 경영>, 올바른 리더십의 길에 대해 다룬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45호 Fake Data for AI 2022년 05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