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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공신, 친인척까지 숙청한 태종의 칼날 하륜만 비켜간 이유는?

김준태 | 152호 (2014년 5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 HR, 인문학

 창업기의 재상은 언제나 위태로운 자리다. 대업을 함께 이루는 과정에서 쌓은 재상의 지분이 왕권 강화에 방해가 되고 재상이 가진 뛰어난 재능도 군주에게는 의심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 정도전 숙청 이후, 태종 이방원과 함께 조선의 설계도를 마저 그려나간 재상 하륜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상사인 태종의 철학과 성격, 업무스타일 등을 이해하고 그에 맞춰 자신의 이상을 펼쳐나갈 줄 아는 지혜가 있었다. 친인척과 공신을 가리지 않고 휘두르던 태종의 칼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다.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1398년 여름, 어느 집에서 떠들썩한 잔치가 열렸다.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된 집주인을 환송하는 자리였다. 집을 가득 채운 손님 중에는 임금의 다섯 째 아들인 정안군도 있었는데 그가 집주인에게 술잔을 건네니 술에 가득 취한 집주인은 비틀거리다가 그만 술상을 정안군 쪽으로 엎어버렸다. 옷이 잔뜩 더럽혀진 정안군이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자 놀란 집주인은왕자께서 노하시어 가셨으니 얼른 가서 사죄를 드리고 오겠다라며 뒤따라 나섰다.

 

사저로 돌아온 정안군은 자신을 쫓아온 집주인에게 짐짓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엇 때문에 왔는가?” 그러자 집주인은 언제 술에 취했었냐는 듯 차분하게 대답했다. “지금 왕자께서 처해 계신 상황이 매우 위태롭습니다. 제가 술상을 엎은 것은 장차 있을 경복(傾覆)1  할 환란에 대해 따로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정안군이 몸을 바로하며 대책을 물으니 집주인은신은 충청도로 부임하라는 어명을 받았기 때문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마침 안산군수 이숙번이 정릉(貞陵)2 을 이장할 군사를 거느리고 한양에 와 있으니 이 사람에게 대사를 맡기시면 될 것입니다. 신 또한 진천(鎭川)에서 대기하고 있겠사옵니다. 일이 시작되면 신을 부르소서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얼마 후인 1398 826. 정안군은 이숙번의 지원을 받아 정도전 등 자신의 반대세력을 숙청했다. 이것이 1차 왕자의 난이다. 이날 정안군은 경복궁 남문 앞에 군막을 치고 정변을 지휘했는데 자신 옆에 장막을 하나 더 설치하도록 했다. 누구를 위한 군막인지 사람들의 궁금증이 더해질 무렵, 충청도로 내려갔던 집주인이 나타나 당연하다는 듯 그 가운데 앉았다.3

 

하륜, 정도전 이후 조선의 설계를 맡다

이 집주인이 바로 이번에 다룰 하륜(河崙, 1347∼1416)이다. 하륜은 여러모로 정도전과 비교된다. 두 사람 모두 조선왕조 건국 초기에 각종 법과 제도를 기획·설계하고 국가 시스템 구축을 주도한설계자형재상이다. 두 사람은 각각 태조와 태종이라는 두 창업군주의 핵심참모였으며 그 치세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불세출의 경세가, 비운의 혁명가라는 이름을 얻고 있는 정도전에 비해 하륜은모사’ ‘책사의 이미지가 강하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사극정도전을 보면 하륜은 고려 말의 권세가 이인임의 측근으로 정도전의 대척점에 서서 책략을 주도한다. 아마도 후반부에 가면 태종의 책사가 돼 정도전을 좌절시키는 역할로 그려질 것이다.

 

이러한 하륜의 이미지는 분명 사실(史實)에 근거한 것이기는 하다. <용재총화(?齋叢話)>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과 같은 사료들도 하륜을 같은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다.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은 하륜을 두고아름다운 모책이나 은밀한 의논을 임금에게 아뢴 것이 대단히 많았고 물러 나와서는 이를 절대 남에게 누설하지 않았다고 묘사하는데 여기서도 그가 막후 책략가적인 면모가 강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륜을 어딘가 정당하지 못한 음지의 인물로만 단정해서는 안 된다. 방향과 태도, 방법의 차이가 있었을 뿐 그 역시 성리학적 이상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유학자였고4  학문이나 정치력 모두 정도전에게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정도전이 조선의 문물과 제도를 설계했다고 하지만 그는 건국 7년 만에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죽음을 맞이했다. 자신의 구상을 온전히 구현해내기에는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다. 더욱이 아직 채 기틀이 잡히지 못했던 조선도 뛰어난 설계자를 계속 필요로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륜이 정도전의 빈자리를 메우게 된 것이다. 정도전이 구상했던 사회개혁의 폭과 깊이를 좁혀 놓았다는 비판이 없지는 않지만 이후 조선의 근간이 된 통치체제, 신분제도, 인재선발제도, 사회운영제도 등은 모두 하륜의 손을 거쳤다.

 

그런데 지난 호에서 조준을 다루면서 창업기의 재상은 매우 위태로운 자리라고 말한 바 있다. 대업을 함께 이루는 과정에서 쌓은 재상의 지분이 왕권 강화에 방해가 되고, 재상이 가진 뛰어난 재능도 군주의 의심하는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업기의 재상들 중 상당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정도전이 대표적인 예다. 지난 글에서 살펴봤듯 조준은 그 칼날을 피하기 위해 우유부단한 실무형 재상으로 스스로를 탈바꿈시켰다. 이런 점에서 하륜은 상당히 독특하다. 정치판을 뒤흔들고, 정변을 성공시킬 정도의 뛰어난 지략을 지녔으며,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힘을 행사했지만 그는 자신의 주군인 태종으로부터 변함없는 신뢰와 보호를 받았다. 왕권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공신뿐 아니라 처남이나 사돈까지도 과감히 제거해버렸던 태종이었기에 이는 더더욱 의외다.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하륜의 생애를 따라 가보며 해답을 찾아보기로 하자.

 

 

 

1347년에 태어난 하륜은 진주(晉州) 사람으로 호는 호정(浩亭)이다. 그는 자신의 문집인 <호정집>에서 집안의 내력을 설명하며 과거시험에 대대로 급제한 명문 사족임을 강조했는데 실상은 증조부·조부·부 모두 과거에 급제한 기록이 없고 벼슬 역시 하급 관원에 그쳤을 뿐이다.5  1377(우왕 3)에 부친 하윤린이 순흥부사를 지낸 것도 당시 대사성(大司成)이었던 하륜 본인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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